쓰기 일기
서윤후 지음 / 샘터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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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인의 일기장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첫 번째, 시집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의 시인이었기 때문에
두 번째, [일기]이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만들기, 구체적으론 [코바늘]을 아주 사랑했는데(자주 말하지만 지금은 친구고, 베프), 베프가 나에게 연인이던 시절에 자주 하게 되었던 것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나의 연인을 소개해주기 위해서, 또 남들이 몰라주는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랬던 것이 어느 새부턴가는 ‘만들지는 않아도 써야는 하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고, 좀 더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고, 그래서 책도 다양하게 읽어보고, 많이 써보게 되었던 것 같다.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을 때 만나게 된 것이 [시집]이었고, 오랜만에 접한 시집을 읽으며 그 사이에 내 감수성이 이렇게나 풍부해져서 이 글들을 마음에 담을 수 있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렁임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니! 하고 나만 몰래 느끼는 성취감 같은 것들이 있었던 것 같다.

수공예와 시는 닮은 구석이 있는데, 바로 [맑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래하면 할수록 마음이 맑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기에, 함께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수행하는 마음으로 살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윤후 시인의 일기장에서는 그때의 단련하며 살고 있었던 내가 떠올랐던 것 같다. 또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느껴진 감정은 오로지 당시의 내가 느꼈던 감정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쓰기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언제부터 일기를 쓰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어릴 때 학교에서 억지로 쓰게 만들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는 마음 치유라는 의도가 가장 컸던 것 같다. 마음 치유로 다시 접한 일기장은 수행하듯 살던 시기에는 정화의 도구였고, 책과 글이 좋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연습 또는 둔감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던 것도 같다. 나도 가끔 블로그에 내가 쓴 일기의 일부를 보여주기도 하고 블로그에 쓰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이어서 진짜 일기라기 보다는 일상을 나누는 것에 가깝다. 블로그에 공개적으로 적는 것엔 욕도 안들어가고 누군가에 대한 험담도 없고 나의 망상도 적혀있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해볼 때 내가 생각하는 일기는 누군가에게 터놓기 껄끄러운 속을 마음껏 검열하지 않고 손으로 말하는 공간인 것 같다.


반면 서윤후 시인의 [쓰기 일기]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물론 사적인 이야기나 남에 대한 불만도 적혀있지만 그것보다 더 마음에 닿았던 것은 시에 대한 ‘진심‘이었고, 시가 만들어진 ‘과정‘을 나누어 읽은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이 날 내가 쓴 일기는 이렇게 시가 되었습니다.˝ 하는. 그리고 분명 일기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내가 읽었을 땐 이미 ‘시‘인 것 같기도 했는데, 그래서 다른 장르의 책을 읽었을 때와 다르게 느리게, 천천히 읽어야 했다. 꼭꼭 씹어먹어야 하는 현미밥이랄까?, 아니면 동네 산에 오르면 보이는 돌멩이들이 쌓여있는 돌탑에 나도 돌멩이 하나 올리고 싶어서 돌을 고를 때, 엄청 신중하게 골라서 흙을 털어내고 돌탑이 무너지지 않게 빈틈에 조심히 올려놓을 때, 그런 장면이 떠오르는 글!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마음에 소원을 빌고 있으니까, 그래서 읽으면서도 신중함이나 조심스러움, 가장 자신의 마음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을 고르고 골랐다는 섬세함 그런 것들이 전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평범하게‘ 시를 좋아하는 소시민으로써의 시에 대한 마음가짐을 점검해보는 시간도 되었던 것 같다. 나도 가끔 시를 쓰고 블로그에도 올리지만 내가 쓰는 시는 대체로 즐거움이 묻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아니면 좀 미칠 것 같을 때? 갑자기 변형되는 감정이나 감각이 있었다, 그게 즐거웠고-). 힘든 시기에 썼던 시 역시 써짐과 동시에 그 아픔이 말로 표현하기엔 어려운, 갑자기 상승되는 기쁨? 그러한 것으로 승화가 되어서 사실 너무 짜릿한 기억으로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에 시를 꾸준히 접하게 되었던 것 같고. 지금은 시 감성이 많이 떨어진 시기인데, 그래도 여유가 생기면 되찾고 싶다고 자주 마음속으로 되뇌일 정도로 그 승화되는 순간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음, 그래서 결론은 나는 시가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 감성이 떨어질 때마다 찾게 되는 것은 역시나 시집이다, 또는 정말 잘 써진 가사의 노래를 듣는 것. 나는 어제 산을 올랐는데, 산을 오르면서 자연이 너무 좋고 역시 사람은 자연 속에 머물러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고 집에 와서 밤에 듣게 된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에 빨려들어가듯 홀려서 ‘이것이 바로 악마다‘ 라는 생각을 했다. 자연은 신이 만들고 감성은 사람이 만드는 것인데, 사람은 어찌할 수 없게 사람이 만드는 것에 홀리기 마련인 것 같다. 자연은 평화롭고 너그럽고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사람은 그렇지가 않아서 그렇지 않음에서 오는 특유의 따뜻함과 위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란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될까? 내가 하는 생각과 느낌이 잘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마음이 진지해진다. 시도 그런 것일까? 아, 그래서 내가 수공예할 때 그렇게 진지했었구나, 싶었다. 사실 읽으면서 조금 거울치료 받는 기분도 들었는데,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걸 지금 깨달아버렸다.

암튼 서윤후 시인의 이름에서 ‘아빠 어디가‘의 윤후가 먼저 떠올랐었는데, [무민]을 읽을 때 윤후가 무민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아야~˝ 하던 어린 윤후, 서윤후 시인도 조금 그 윤후 어린이를 떠올리게 한다. 서윤후 시인은 무민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시는, 어쩌면 인공지능의 범주에서 가능한 영역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믿고 싶지 않은 쪽에 더 가깝다. 눈빛, 온기, 손그늘, 어깨동무, 뺨, 비스듬히, 부드러움, 솜털, 보조개. 그런 것들은 인간이기에 켤 수 있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p55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는가. 일상을 겪어내고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어떤 결핍이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이 따라오는지를 스스로 진찰하는 일로써 이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
p79

은연중에 생각나는 것들에 먹이를 줘서는 안 될 것이다. 내 옆에서, 내 안에서 계속 재잘거리는 것들의 노래에 맞춰 풍경을 간직하는 것. 그것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발이 빠지기 좋은 작은 웅덩이 하나를 꼭 그려 넣어야 한다.
p97

나의 어린 양들을 세어 꿈결로 가기 직전에 만나는 시, 나는 이런 시들을 종종 놓쳤다.
p113

제목은 ‘나나너너‘. 나를 두 번 말하고 너를 두 번 말하는 사이에 나와 내가 많아졌으나 사라지는 느낌, 발음했을 때 서로가 집착하는 느낌을 주었다가도 입속에서 금방 사라지는 질감이 좋아서 제목만 정해둔 것이었다.
p125








[이 글은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은 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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