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섭은 이부자리 속에서는 말을 낮추다가도 날이 밝으면 꼭꼭 존대를 썼다. 그건 아무리 나이 어리거나하급직을 맡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을 낮출 수 없게 되어 있는당규에 따른 언어습관이었다. - P126
소화는 소스라치며 고개를 쳐들었다. 바로 눈앞에 정하섭의 얼굴이 더없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아아, 저 사람이 내 남편이라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고, 다음 순간 소화는 가슴이 컥 막히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어림없고 가당찮은 욕심이라는 자각이 내던지는 절망감이 가슴을 쳤던 것이다. - P127
그분은 반찬을 골고루 먹으라는 말과 함께 고기반찬을 자신의 숟가락 위에 불쑥 놓았던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과 푸근하고도 넉넉하게 웃고 있는 얼굴, 그래서 그런 느닷없는 생각이 솟구쳤던 것이다. - P127
그 얘기가 무사허니 이 시상에 나왔드라도 나가 아부지가 누군지 몰랐다끼 갸도 아부지 몰랐겄제라. 소화는 목이 막혀오는 울음을 씹었다. - P130
정하섭은 다음날 새벽안개를 밟고 떠났다. 소화는 닦아도 닦아도 앞을 가리는 눈물 속으로 정하섭을 떠나보냈다. 그러면서 새벽에 꾼 꿈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었다. - P130
"알겄소, 투전판이야 자리럴 털고 일어나야 누가 땄는지 아는 법이고, 쌈이야 끝나봐야 누가 이겼는지 아는 법잉께, 깨끔허니 이겨갖고 와서 큰소리럴 쳐도 치든지, 여맹에 가입허라고 권해도 권허든지 허씨요. 그때 여맹에 가입만 하는 거이 아니라 위원장놀이라도 요러타께헐 수 있응께로" - P135
이지숙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만에하나까지의 위험도 경계하는 죽산댁의 태도에서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모성의 철저성과그녀 나름대로 갖춘 삶의 슬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상진위원장이 아내를 잘둔것인지, 잘못 둔 것인지 언뜻 구분이 안 되는 채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P135
그들의 당연하지 않느냐는 반응에 염상진은, 그게 당의 지시를어기는 게 아니냐는 원칙론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이에어울리지 않게 지방적 특수성을 이해한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야산투쟁의 생존자 천점바구, 그가 민청원 지삼봉과 같은 비중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당의 특별조처를 어기고 네 사람이나죽인 것이다. 염상진은 괴로움을 씹었다. - P145
광주에서도 영암에서도 똑같은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광주에서는대로상에서 일곱 명이 총 맞아 죽었고, 영암군 금정면에서는 열대여섯 명이 죽었다고 했다. 염상진은 그 해결책을 도당에 묻기로 했다. 동전의 범법자가 많아져 천점바구를 구해낼 명분은 그만큼 커졌던 것이다.
- P146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최서학은 완전한 거지꼴이 되어 송광사가까이 와 있었다. 그가 입은 인민군복은 때가 끼고 땀에 절어 남루한 데다가 퀴퀴하고도 껍찔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 P146
최저학은 손을 내둘렀다. 호박속을 붙이다니, 그런 야만적인 것은 할 수가 없었다. - P150
참말로 인민군덜언영판 좋습디다. 많이는 안 겪어봤어도, 물한 그럭 얻어묵고도 고맙다고 허고, 밥 한 그럭얼 얻어묵으면 꼭 돈얼 낼라고 하고, 돈얼 안 받겠다고 허먼 마당얼 씰든지, 물얼 질러오든지 혀서 꼭 그 값얼 헐라고 허고 말이요." - P150
남양댁은 힘이 들게 말을 했고, 그 옆에 목골댁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그런 표나는 태도에서, 두 사람이 한 사건의 피해자이며, 그 사건은 표면화되었을경우 오히려 피해자에게 또다른 피해를 입히게 되고, 여자 피해자의 경우 그런 사건이란 십중팔구 성문제라는 것을 이지숙은 판단내리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판단이 맞는다면 그 사건이야말로 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해서 자신이 도맡고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이지숙은 생각했다. - P159
"저어, 실례합니다. 아까 혹시 박두병이란 사람 이름을 말씀하셨는지요?" 자신이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김범우는 그냥 지나칠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에… 그러기는 했는디요. 한 남자의 경계하는 대답에 김범우의 가슴은 쿵 울렸다. "그 사람이 지금 무슨 일을 합니까?" "으째 그러신디요?" 남자는 더욱 경계하는 빛을 드러냈다. "예, 친군데 그간 소식이 끊겼습니다." "도당 조직부장이구만요." - P163
이야기가 현실문제로 바뀌면서 김범우는 박두병이가 이학송이나 손승호와 다르게 도당의 고급간부로서 염상진과 똑같은 골수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의 현실구축을 위해 매진하는 열렬한 당원이었고, - P167
전쟁의 필승을 확신하고 있는 행복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는 전혀 토론의 상대자일수가 없었고, 자신의 생각 같은 것은 절대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김범우는 그의 말만 듣는입장을 취했다. 그러면서 김범우는 자신이 서울에서보다 더 좁은울타리 안에 갇힌 것을 깨달았다. - P167
자네가 의무수행을 긍정하는 경우 당이 자네한테 부여한 선택권은 두 가지네. 첫째는 손 형과 함께 도당 문화선전부에서 일하는 것이고, 둘째는 의용군으로 나가 참전하는 것일세 - P167
그만그만한 나이의 아이들이 햇볕 따가운 줄도 모르고 뻘밭에서 복작거리고 있었다. 8월 중순이 지나면서 더위는 완연하게 한풀 꺾여들었고,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이 스산하게 감겼다. 이즈음부터는 논의 메뚜기도 개구리도, 개울의 미꾸라지도 붕어도 속살이 오르며 윤기가 돌기 시작하는 것처럼 뻘밭의 꽃게도 속이 여물어갔다. - P168
한여름 꽃게가 속이 부실한 채로 간장의 짠맛에 곁들여식어빠진 꽁보리밥을 넘기기 위한 반찬이라면 이즈음부터의 꽃게는 속이 알차서 씹는 맛과 함께 그 고소함이 제격을 갖춘 반찬 노릇을 했다. 그래서 여름을 나느라고 잃은 입맛을 돌리거나, 바뀌는계절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사람들은 꽃게장을 즐겼다. - P168
당은 인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데 있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재산조사를 해서 인민에게 피해를 입혀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나라 재정에 피해가 생기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세금원을 정확하게 파악할 목적으로 과학적인 조사방법을 동원한 것이 낟알세기였다. - P188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에서 규정하는 재산의 범위가 각 개인이 생산해낸 일체의 소유물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조건 아래서 농지를 무상으로 분배받아 자작농으로 독립한 농민들은 2할 5푼의 세금만 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과 다르게 가축까지 다 세금원으로 계산했다 하더라도 세금은 3할 미만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에는, 지역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있었지만, 거의가 반타작인 5할을 소작료로 지주에게 바치고, 세금은 또 따로 내게 되어 있었다. 새 법에 따르면 전에 비해 배 이상의 이익을 보게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거칠게 반발을 보이고 있었다. 완벽한 홍보계몽을 통한 이해 · 납득의 과정 없이 시행됨으로써 농민들은 재산의 범위와 조사의 방법에 대해 감정적인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이다. - P188
딴 나라의 지배나 간섭에 대해서는 무조건 몸서리치며 거부하도록 민족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아무런 이유 설명도없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갑자기 태도를 변경함으로써 민중의 오해를 사서 막대한 지지를 잃었던 경우와 똑같았다. - P189
농민들은 자기들이 어엿한 자작농이 되었다는 사실은 깨닫지 않고, 소작인 시절에지주한테도 간섭받지 않았던 논두렁 콩을 세는 것에 정나미 떨어져 하고, 열을 올렸다. 지주들이 논두렁의 콩이나 밭고랑의 고추를 못 본 체하고 넘긴 작은 혜택은 결코 소작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양이도 쥐를 막다른 길로 몰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건 소작인들의 숨통을 미리 틔워버리는 지주들의 교활한 지배방법이었다. - P189
김범우는 일단 일할 자리를 정하게 되자 스스로의 태도를 확실하게 했다.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식의 수동성을 버리고 맡은 일을 적극적으로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자신의 성격에도 맞았고, 역사의 정당한 흐름을 따라가는 바른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과에 대한 불안스러운 예측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 P190
자넨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그렇게 가시 박힌 소리만 해대며 사람 복장을 쑤셔댈 때는 언제고, 또 이렇게 일을 열성으로 해대는 건 뭐고….." - P190
염선배나 자네가 내 진의를 잘못 파악한 게 아닐까. 염 선배는 나를 감상적 민족주의자로 곡해했고, 자넨 나를 기회주의자로 매도하지 않았나? 다생각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일이지." - P191
미국은 절대 간단한 나라가 아니고, 이학송선배 말을 흉내내자면, 미국은 우리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될걸세." - P191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 어림도 없는 소리네. 미국이란 나라가 그런 성명서 하나로 물러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거네. 그리고 유엔이라는 것이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미국의 힘으로 만들어져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닌가. 물론 당에서 그런 성명서를 낸 건미국이 물러갈 것을 기대해서라기보다 남의 민족문제에 무력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미국의 만행을 세계여론에 알리자는 목적이 더크겠지만 말야" - P192
고구마는 쑥떡·개떡과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줄을 이어주는 농가음식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양식이 떨어지는 겨울 막바지에 이르면 어른 아이 할것 없이 고구마 한 개씩으로 하루살이를 해냈다. - P193
‘고흥놈들 고구마똥‘이라는 말이 있었다. 섬이나 다름없는 고흥은 밭이 태반인 데다땅이 거칠어 생명력이 강한 고구마농사가 자연히 성행했다. 세끼를고구마만 먹다 보면 그 똥도 ‘고구마똥‘이 될수밖에 없었다. 곡식없이 겨울나기를 해야 하는 고달픈 삶을 일컫는 말이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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