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시대라고 불리는 고대에는 더욱 그러했지만, 기독교 교회는 신앙을 끝까지 지키면서 죽은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세워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사도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바티칸에 세워졌고, 산 피에트로 대성당 • 산 조반니 교회와 더불어 로마의 4대 교회의 하나로 꼽히는 산 파올로(성 바오로) 교회도 ‘푸오리무라‘ (성벽 밖)라는 호칭이 보여주듯 사도 바오로가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성밖 가도 옆에 지어졌다. - P17

 전부터 라테라노 지구라고 불린 이곳에는 콘스탄티누스와 권력투쟁을 벌인 끝에 패배한 막센티우스 황제 휘하의 기병군단 막사가 있었다. 기독교 반대파이기도 했던 정적의 세력 기반을 파괴하고 그 터에기독교 교회를 세우는 것은, 보기 드문 정치적 인간인 콘스탄티누스가막센티우스를 지지했던 로마 민중에게 승자로서의 자신을 과시하는행위이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1년 뒤 공포될 ‘밀라노 칙령‘의 전주곡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 P18

‘아비뇽 유수‘가 끝난 뒤에는 교황의 처소가 산 피에트로 대성당으로 옮겨진 모양이지만, 그래도 로마의 주교좌 교회라는 라테라노 교회의 지위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로마 교황은 로마 주교이고, 지금도 이 겸직 상태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새로 선출된 교황이맨 처음 찾아가는 곳은 라테라노 교회다. - P19

CHRISTUS VINCUT
CHRISTUS REGNAT
CHRISTUS IMPERAT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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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정말 말하고 싶은 바는, 각 개인의 용기와이타심 없이는 어떤 제도도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아무리 사회적, 경제적 개선책을 찾은들 다 뜬구름 잡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 P125

이처럼 도덕은 세가지 사항과 관련이 있습니다. 첫번째, 도덕은 각 개인이 서로 공평하게 처신하며 조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번째, 각 개인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정돈, 또는조화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번째, 인류의 삶 전체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목적, 즉 인간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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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즈음의 지중해 서쪽에서 로마제국은이름만 남아 있었다. 그 빈 공간으로 제국 경계 바깥에 살던 게르만족이홍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이 침입자 또는 이주민 집단들은 현지인들과섞여 자연스레 크고 작은 국가들을 형성했다. 이제 그들은 외부인이 아니라 유럽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중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P367

로마제국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운 존재는 게르만족 말고도 또 있었다.
그리스도교다. 특히 고대 로마의 지적 유산과 제국 경영 노하우는 교회가계승하고 있었다.  - P368

15~16세기 르네상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사이에 있는 천 년은아무 의미도 없는 시간이었다. 기껏해야 고대와 르네상스 시대(혹은 근대)중간에 낀 과도기에 불과했다. 중세middle ages 라는 명칭에도 이런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다 (엄밀히 말하면 ‘중세‘라는 시대 명칭과 구분 방식은 서유럽의 사정만을 반영하고 있다). - P369

유럽사에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476년엔 라벨나에 틀어박혀 있던 서로마제국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고트족의왕 오도아케르에게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 P369

오도아케르는 허울마저도 우스꽝스러워진 황제라는 호칭을 쓰기가머쓱했는지 이탈리아 왕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그러고는 동로마제국의황제 아래에서 영주로서 이탈리아를 대리 통치하겠다고 허락을 구했다(오도아케르는 마지막 황제의 제관과 의복, 자줏빛 망토를 콘스탄티노플로 공손히보냈다.  - P369

때로는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시대의 양상을 더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건축과 예술품의 자취를 살펴보면 이런 방식이 적어도 5백년 이상 더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세의 이런 흔적들을 후세인들(19세기 초의 학자들)은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이라고 이름 붙이게 된다. ‘로마풍‘이라는 뜻이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그 풍토는 수십 세대 동안 여전히로마였던 것이다. - P370

로마의 잔해가 서쪽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이어졌다면, 동쪽에서는 비잔틴 양식으로 이어졌다.  - P371

두고 발전한 이런 양식을 비잔틴 양식이라고 한다. 로마 문명의 잔해에 그리스적이고 오리엔트적인 취향이 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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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은 독일 분단과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다." 분단이후 250만 명 넘는 동독의 지식인과 기술자가 서베를린으로 넘어가자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부터 서베를린을 156.4km 장벽으로 에워쌌다. 최소 높이 3m의 담장에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 폭15m 넘는 출입금지구역, 기관총을 거치한 감시초소, 사냥개, 지뢰, 차량 접근 방지용 해자까지 넘을 엄두를 내기 어려운 장애물을 설치했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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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도시 공간의 구조와 문화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다. 빈이 지체높은 귀족이라면 부다페스트는 모진 고생을 했지만 따뜻한 마음을간직한 평민 같았고 프라하는 걱정 없이 살아가는 ‘명랑소년‘을 보는 듯했다 - P1

온몸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나 재활 중인 중년 남자라고 해도 될 드레스덴은 프라하에 갈 때들르기 좋은 도시여서 2권에 넣었다. - P2

인생이 그렇듯 여행도정답은 없다. - P3

애초에 욕심이 지나쳤는지도 모르겠다. ‘콘텍스트‘를 이야기ㅎ면 ‘텍스트‘를 먼저 제시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한시의 왕궁·성당·교회·박물관. 거리. 광장은 복잡하게 얽힌 입여서 글로 보여주기 어렵다.  - P3

1권 표지에는 네 도시의 대표 건물을 내세웠다. 유럽의 역사를바꾸었던 그 도시들에는 문명사의 한 시대를 증언하는 집이 있었다.
하지만 2권의 도시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보다는 도시의 역사에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각인한 사람의 모습이 더 크고 뚜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을 표지에 넣었다. 빈은 시씨 황후, 부다페스트는 언드라시 백작, 프라하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다. 드레스덴은 딱히 내세울 대표 인물을 정하기 어려워서 랜드마크 1번에 해당하는 성모교회를 선택했다. 그 사람들의 삶과 성취, 성모교회의 죽음과 부활은 내마음에 파르테논·콜로세움 · 아야소피아 · 에펠탑 못지않은 여운을남겼다. - P2

1권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를 꼼꼼히 살폈다. 나는 도시의 건축물 · 박물관·미술관 · 길 · 광장·공원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콘텍스트(context)‘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도시는 콘텍스트를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며, 그 말을 알아듣는 여행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P2

인문학의 ‘위대한 고전‘을 읽을 때는 서문부터 끝까지 차근차근읽어야 한다. 멋대로 건너뛰거나 앞뒤를 바꿔 읽으면 더 힘들다. 빈여행도 그랬다.  - P16

대도시지만 빈의 공간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이름난 건축물과사문화공간은 도심 순환도로인 링 -슈트라세(Ring-strasse) 주변에 포ㅣ해 있고 외곽은 대부분 상업지구와 주거단지다. 빈 사람들은 링슈트라세를 간단히 ‘링‘이라고 한다. 링은 이렇게 말했다. ‘답은 정해져있어. 넌 걷기만 해!‘ - P16

오래전 처음 번에 갔을 때, 어설프게 알면 아예 모르느니만 못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슈테판 성당이 독일어로 슈테판스‘돔‘(Stephans dom‘)이니까 지붕이 반구 형태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돔‘은 가톨릭의 대주교좌 성당을 가리키는 말일 뿐지붕의 모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P17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우리는 놀이를 즐기는 종이다. 뭘 가지고 어떻게 노는지만 달라질 뿐,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 P22

슈테판 성당은 파리의 노트르담처럼 종교 행사와 국가 의전을 연권력 공간이었다. 하지만 서양 고전음악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은 여기서 모차르트를 떠올린다. 그의 화려한 결혼식과 초라한 장례식이모두 여기서 열렸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독자들이 노트르담에서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 P21

유럽의 크고 오래된 성당들이 대개 그러했듯 슈테판 성당도 왕가의 영묘였다. 중앙 제단 가까이에 놓인 프리드리히 3세 (1415-1493)의대리석 관에는 모음 다섯 개 (A.E.I.O.U.)가 새겨져 있는데, "오스트리아는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존재하리"라는 라틴어 문장 또는 "온 세상이 오스트리아에 복속하리"라는 독일어 문장의 단어 첫 글자를 적은것이라고 한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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