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남은 인목대비의 아버지이자 영창군의 외조부였다. 뿐만 아니라 계축옥사의 주모자로 몰려 주살된 ‘역적‘이자 이후 폐모논의가 시작되는데 단서를 제공했던 인물이었다. 대북파는 ‘불충한 그를 처단한 것을 자신들의 공적으로 내세워 ‘토역 담당자로서 발신하는 데 근거로 삼아왔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 얘기를 꺼내지 말라니? - P271
특히 이귀는 황해도 평산(平山)부사에 임명되었다. 이귀를 풀어주고 다시 등용했던 것은 최명길을 석방한 것과 함께 광해군의 커다란 ‘실수‘였다. 두 사람 모두 1년 후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 P272
이귀 인조반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한모주(主)인 이귀는 성혼의 제자였다. 성격이 괄괄했던 그는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임진왜란 이후 정인홍에게 밀려 권력에서 물러났던 그는 인조반정을 성공시킴으로써 정인홍에게 정치적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 P273
‘광해를 폐하고 인조를 세운 수공(功)이 누구냐? 이때의 일을 말하자면 이귀는 칼자루를 잡은 사람이요, 김류와 김자점은 칼자루요. 이괄은 칼날이다. 하나 만일 궁중에 이귀와 체결한 김개똥이 없었다면 그렇게 쉽게 패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소설 「이괄」에 나오는 구절이다. 신채호가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위와 같은 이야기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P274
어쨌든 ‘심하전투‘ 이후 광해군은 소신 있는 대외 정책을 밀고 나갔지만 그 대외 정책이 몰고온 내정의 파란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왕권의 보위를 위해 여전히 전전긍긍했고, 결국 인조반정을 맞게되었던 것이다. - P275
반정 주체들은 3월 12일 새벽 창덕궁을 기습했다. 기습을 받기 직전경호 책임자인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창덕궁을 호위하고 일부 병력을 보내 창의문 바깥을 수색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수상한 것들을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 수색이었다. 연서역(延西驛)에 모여있던 반란군은 자정이 지나자 창의문을 통과해 창덕궁 앞에 도착했다. 이때 훈련대장 이흥립은 반정군을 맞이한다. 그의 투항은 곧 반정의 성공을 알리는 것이자 광해군의 몰락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약 1천 명 정도의 반정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창덕궁으로 난입했다. 이귀와 김자점을 체포하려고 모여 있던 대소신료들은 반정군의 함성소리에 놀라흩어졌다. - P278
‘5·16 당시에도 박정희가 이끈 쿠데타군은 겨우 4천 명 정도였고, 그를 진압하려 했던 이한림 1군사령관의 예하 병력이 10만이 넘었던 것을생각하면, 쿠데타의 성공은 무엇보다 권력의 핵심 포스트를 신속하게 장악하는 것이 요체임을 절감하게 된다. - P279
반정의 핵심적인 주체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반정을 일으킨명분은 무엇인가? 반정의 핵심 주체인 김류, 이귀, 김자점, 구굉 등은 대개 서인 계열의 사대부들이거나 인조와 연결된 외척들이었다. 특히 사대부들 가운데는 이이, 성혼,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들이 많았다. - P281
첫 번째는 역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거론했다. - P281
두 번째는 궁궐 건설 사업을 비롯하여 토목공사가 성행했던 것을 거론했다. 10년이 넘게 계속된 궁궐 공사 때문에 수많은 민가가 헐렸으며, - P281
세 번째는 명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밀통함으로써 명을 배신했다는 것을 거론했다 - P281
반정할 때 맨 처음 훈신(勳臣)들이 모여 맹세했는데 두 가지 밀약이있었다. 그것은 국혼(國婚)을 잃지 말자는 것과 산림(山林)을 올려 쓰자는 것이었다.
‘국혼‘이란 왕실, 더 정확하게는 국왕과 혼인을 맺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혼을 잃지 말자(國婚)‘는 것은 왕비는 대대로 자파, 곧 서인가문의 여자를 들여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국왕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확고히 하자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산림을 올려 쓰자(用山林)는것은 명망 있는 재야의 산림 인사를 중용하여 자파의 위상을 높이자는것이다. - P286
더욱이 조선과의 관계에서 명분만 따지기에는 명의 현실이 너무 급박했다. 어떻게 해서든 조선을 후금과의 대립 구도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이제이‘를 하려면 조선을다독거려야했다. - P293
인조를 승인하기로 결정한 이후에도 반대하는 신료들이 적지 않았다. 동림당(東林黨) 계열의 예부 과도관(官) 위대중(大中)은 인조를책봉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신하로서 임금을 쫓아낸 인조를 책봉하는 것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며 간사한 자에게 상을주어 반역을 가르치는 행위라고 극언을 퍼부었다. - P293
명이 인조반정을 승인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22개월이 걸렸다. 그기간 동안 명은 ‘종주국으로서 번국에서 일어난 난신적자들의 찬탈 행위를 응징해야 한다는 명분과, 어떻게든 ‘조선의 새로운 집권층을 움직여후금을 치는데 끌어들여야 한다‘는 실리 사이에서 고민했다. 만주를상실하고 북경의 바로 코앞인 산해관까지 후금의 위협에 노출된 절박한현실에서 명의 고민은 클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인조반정은 그 발생과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국내 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명청 교체라는 17세기초동북아시아국제정치의 변동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 P294
하지만 배금‘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인조반정 이후의 대금정책은 광해군 대 이래의 기미책에 바탕을 둔 현상 유지책이라고 보는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다. 1624년 4월, 가도의 모문룡은 조선에 사람을 보내 자신이 휘하 병력을 보내 후금을 칠 것이라 통고하고 명군을 인도할 길잡이를 보내달라고요구했다. 그러나 ‘친명배금‘을 공언했던 반정공신들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후금을 자극하여 사단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때문이다. - P295
김류는 1등으로 분류되었고 이들은 2등이었다. 이괄은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유자광은 모의에만 가담했다. 그럼에도 그는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런데 나는 반정군의 병력 편성과 기획 전체를 담당했다. 어찌하여 내가 2등공신밖에 될 수 없다는 말인가? - P300
인조는 결국 파천했고 이괄은 서울을 점령했다. 이괄은 서울점령 직후흥안군(興安君)제(堤)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선조의 열 번째 아들로 인조에게는 숙부뻘이었다. 한 번 배반한 인물은 계속 배반한다고 했던가? 인조가 경기방어사로 임명한 이흥립은 이괄에게 투항했다. 인조반정이 있었던 당해 훈련대장으로서 반정군에게 투항했던 바로 그 이홍립이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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