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팔복은 개별적인 행동보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 세계관의 변화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아는 사람으로의 존재의변화를 초청합니다. 팔복은 복 받는 비결이 아니라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참된 복을 알아보라는 초대입니다. - P57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이 아니라 인간 그 존재 자체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 P57

슬픔의 이유에 대한 두 번째 견해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정말 고통스럽고 아픈 일들로 인한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슬퍼하다‘라는 동사는매우 강력한 동사로,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개역개정 마태복음 5:4에서 ‘애통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펜테오‘는 칠십인역창세기 37:34에서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 버리고 그가 죽었다고 야곱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야곱이 요셉이 죽은 줄 알고 통곡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야곱이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그의 허리를 묶고 많은날 동안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했다"). 여기서 한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비탄한사람에게 죽은 분이 좋은 곳에 갔으니 슬퍼할 것이없다고 위로하며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본문의 의도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슬픔에 대해서도 우리 신앙이 응답해야 하지만, 신앙이 우리를 슬픔에 대해 둔하고 무감각한 사람으로 만들어서는안 됩니다.  - P65

토요일은 분명한 실체인 일요일의 찬란한 햇빛을 기다리며 금요일의 현실적 어려움을 살아내는 날입니다 - P68

우선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요한복음 11:32-35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습니다(공동번역개정). 그리고 급기야 나사로의 주검을 찾으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누가복음 19:41-44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일들을 알지 못하고 심판과 멸망 앞에 놓인 도시를 내려다보시는 "예수님의 두 눈에 눈물이 흥건했습니다.">14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린 슬픔을 예수님도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개인뿐 아니라 세상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7은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 P70

예수님이 우십니다. 하나님이 우십니다. 하나님의울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능력도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호소할 때 어떤 사람은 해결책을 제시하려하지만 어떤 사람은 공감을 합니다. 해결책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공감이 더 적절할 때도 있습니다.
우시는 하나님은 공감의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 P72

우리는 토요일이라는 긴장과 역설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긴장과 역설의 토요일에 필요한능력은 함께하는 공감의 능력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상처 입은 경험이 있을 때 상처입은 사람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유를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주어진 토요일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애통의 시간이 지닌 의미를 조금씩 알아 갑니다. 무엇보다 토요일은 우시는 하나님을 닮아 가는 시간입니다. 우시는 하나님을 닮아 가면서 우리는 공감의 힘을 길러 갑니다. 우리를 함께 우는 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알아 갑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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