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왕자 중 한 명을 인질로 보내야 하오." 정호가 딱 잘라서 말했다. "그렇게는 못하오. 아직 왕자들이 어리기 때문이오. 나의 아들 실성은 왕자들과 숙질간이오. 성골 혈통의왕손이므로 인질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오." 대서지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사금 내물의 왕후는 미추이사금의 딸로 대서지의 조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 실성은 신라 왕자들의 외당숙이 되는 셈이었다. "좋소이다. 왕자 눌지가 어려서 안 된다니 성년이 되면 그때가서 인질을 교체하도록 하겠소." 정호가 협상안을 제시하자 대서지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었다. - P292
고구려 사신단의 정사 정호는 신라 문무 대신들이 시립한가운데 이사금 내물을 향해 말했다. 친서의 내용은 세 가지였다. 첫째로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으로 천자국에 대한 예의로써 해마다 조문을 하고 조공을 바칠것, 둘째로 신라 왕자 한 명을 인질로 보낼 것, 그리고 셋째로신라 땅에 고구려 군사기지를 두어 외적이 침입할 때 적극 지원을 하겠다는 것 등이었다. - P288
그러나 신라로서는 고구려 태왕 담덕의 친서 내용을 그대로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서쪽 경계에 백제가 도사리고있고, 서남쪽에는 가야국이 있었다. 그리고 백제와 가야는 왜국과 친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어, 고구려와 선린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동서남북 사면이 모두 적국에 둘러싸이게 될 판이었다. 다행히도 북쪽에 고구려가 있어 왕자를 인질로 보내는대신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친서를 보내왔으므로, 약소국으로서 굴욕적인 외교지만 강대국의 요청을 거절하기어려웠던 것이다. - P289
이사금 내물은 왕자들 대신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겠다는 대서지가 고맙기는 했지만, 고구려 사신이 그 조건을 받아들일지 않을 경우에도 대비해야 하므로 심히 걱정스런 눈길을보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서지가 무슨 꿍꿍이로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겠다는 것인지도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신라를 위한 일이니 목숨을 걸고라도 고구려 사신을설득시켜야지요." - P291
하지만 신라로서는 고구려의 군사력으로 이웃 나라의 공격을 막아야만 했으므로, 그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노릇이었다. 당장 서북쪽으로 백제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남쪽의 경계에 있는 가야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상대였다. 더군다나 동남쪽의 바다를 면한 땅은 왜구들이 호시탐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으므로, 신라는 사방을 적과 대치하고 있는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북쪽 경계의 고국려가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니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 P293
"우리 고구려는 신라를 우방으로 삼아, 인근의 적들을 경계할 수 있는 요지에 군사기지를 마련할까 하오만…………." 이렇게 고구려 사신단정사정호가 운을 떼었다. 고구려가 요구하는 군사기지는 마을성(충주)이었다. 그곳은달천(달래강)이 한수 상류에서 만나는 합수지점으로, 그 물길은 백제의 도성 한성 북편을 끼고 돌아 서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 P293
"미을성은 백제의 옆구리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면 저들도 감히 신라를 넘보기어려울 것이오. 또한 남쪽의 가야가 신라 국경을 침범할 경우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라서 고구려군이 출동하면 쉽게 제압할수 있습니다." 고구려 사신단 부사인 무장원삼이 군사적 효용성을 적극거론하고 나섰다. "우리 신라는 육지로 백제 및 가야와 국경으로 삼고 있고, 바다는 남쪽의 왜구와 인접해 있소. 우리 신라는 마을성이 반도 가운데 위치해 있다 하여 따로 중원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고구려군이 그곳에 주둔하게 되면 바다로 쳐들어오는 왜구들을 소탕할 방법이 없질 않겠소?" - P294
바닷길로 왜구가 쳐들어올 경우 미성군사기지에서 곧바로 국내성으로 파발을 띄워 원군을 요청하기 수월하기 때문이오." 원삼도 태왕 담덕의 특별한 지시를 받고 왔기 때문에 물러설입장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군사회담이 성사되어야만 백제의 옆구리를 시리게 할 고구려 군사기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담덕은 마을성에 군사기지를 만들 경우 국원성이라는고구려의 새로운 성곽을 세울 요량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만약 왜구가 쳐들어올 경우 고구려에서 원군을 보내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해 주시오. 그런 연후 마을성에 군사기지를 세우는 일을 다시 논의해 보십시다." - P295
실성은 이미 열여덟 살로 곧 혼인을 앞두고 있었다. 혼인 상대도 미추이사금의 막내딸로 정해져 있었다. 대서지가 미추이사금의 막냇동생이므로, 그 자식들은 사촌 간에 혼인을 하게되는 셈이었다. 신라 왕실에서는 성골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가까운 집안끼리 혼인하는 것이 필수조건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혼사가 오가고 있는 마당이라 사실 대서지는 실성을고구려에 인질로 보낸다는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 - P296
"그대의 말이 맞소. 나는 반드시 돌아와 오늘 우리가 맺은 백년가약의 맹세를 지키도록 할 것이오. 비록 고구려에 인질로가지만, 나는 유학을 간다고 생각하기로 했소. 고구려에는 명문귀족의 자제들이 다니는 태학이 있다 들었소. 나는 고구려에 가서 우리 신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공부를 하고 돌아올것이오.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려주기 바라오. 이 세상모든 인생사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오 사랑과 이별이 그렇고, 생과 사가 그렇고, 하늘과 땅의 이치가 그렇소. 그러한 두 가지의 이치는 따로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논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오. 마치 손바닥과 손등이 같이 있어야손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과 같소. 그러므로 그러한것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일진대, 사람들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소. - P302
환난을 견디면 곧 환희로 바뀌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그러니 지금은 우리 둘이 이 위기를 견디는 힘을 길러야 할 때요. 방금 내가 말한 바처럼 사랑과 이별은 손바닥과 손등 같은 이치임을 그대는 알아야 하오. 자, 손을 한번 뒤집어 보시오. 이렇게 쉽게 손등이 손바닥으로바뀌지 않소? 사랑과 이별도 그렇소. 가슴 아픈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것…………. 우리 사흘 후 헤어질때 이처럼 손바닥 뒤집듯 곧 이별이 사랑으로 바뀔 것이란 기대를 가집시다. 눈물을 안으로 삼킨 채 일가친척들 앞에서 웃는모습을 보여줍시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내가 인질로 끌려가는신라인으로서, 마음으로나마 고구려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 P303
"어찌하여 신라에서 온 인질이 자국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주상의 말을 이 어미는 잘 이해할 수가 없구먼." "실성이란 인질로 인하여 첫째, 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맺는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으니 그것이 우선 우리 고구려에 득이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둘째, 고구려와 선린관계에 있다는 것을주변 나라들에 널리 알려 그들로 하여금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하니 그것이 신라에게 도움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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