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 정부는 육체적으로 완벽한 유아만 생명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그들은 사내아이가 일곱 살이 되면 가족의 품에서 떼어내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그곳에서 교육하고 훈련해 전쟁터에 나가서 싸울 준비를 하게 했다. 아이가 자라 스무 살이 되면 결혼을 할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막사에서 살면서 공동 식사를 하고 매일 훈련을 받아야했다. 그리고 조국 스파르타에 23년을 봉사하고 난 서른이 되어서야 완전한 시민권과 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 P66

의회는 아테네와는 달리 보수주의적인 원로 귀족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60세가 되기 전에는 군복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다른 무엇보다도기 용맹스러움, 규율처럼 군인에게 중요한 덕목을 높이 샀다.
- P66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군주제와 과제를 섞은 복합적인 것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의 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고 대신 국내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는다든지 지역 내에서 자국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아테네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모델을 따르라고 설득하지는 않았다. 스파르타는 훌륭한 보병대를보유하고 있었지만 보수적인 현 지배 세력이었다.  - P69

코린토스인의 이 같은 희화화가 완전히 과장은 아니다. 아테네인들의 모든 생활 영역에는 대범함이 투영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이 인류 진보의 최전선에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섬마다 주축을 이루고 있던과제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장려하면서 다른 국가 일에 간섭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중립국들을 대상으로(예컨대 코르키라) 동맹국이 되어달라고 꾸준히 설득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스파르타를 가장 당황케한 것은 아테네의 야망에 한계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 P69

전쟁의 과실이 쓰디쓴 만큼이나 두 나라 모두에게 평화의 과실은 달콤했다. 조약 덕분에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자국 내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는 군사비용을 절감하고 이웃 나라들과의 오랜 동맹 관계를 강화했다. 아테네는 강력한 해군력을 사용해서 에게해 전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해상국들로부터 금을 추출했다. 그렇게 해서 축적한 전략적 예비금이 총 금 6,000 달란트라는 전례 없는 금액에 달했는데, 거기에다가 해마다 1,000 달란트의 소득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금욕적이고 보수적인사회이기로 유명한 스파르타조차 작은 규모이긴 해도 나름의 문화적 부흥기를 맛보고 있었다. - P71

불꽃이 점화된 것은 기원전 435년의 일이다. 지역 충돌이 발생했을 때 처음에는 그 충돌이 아테네의 이해관계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중요한 동맹국인 코린토스가 중립국이었던 코르키라를 자극하여 저 멀리 지금의 알바니아에 위치한 에피담누스를 두고 결전을 벌이려 했던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 P72

코린토스는 그리스 전역에서 해상 전투 요원을 모집하여 재빠르게 가능해군 전력을 늘려서, 머지않아 150척의 전함을 지닌 동맹국이 되었다. 이아테네에 비하면 상대도 되지 않았지만 코린토스는 그리스에서 두 번큰 함대를 보유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에 당황한 중립국 코르키라는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다. - P72

아테네 앞에 놓인 것은 우열을 가늠하기 힘든두 가지 나쁜 선택지뿐이었다. 만약 직접 코르키라를 돕는다면, 코린토스를 적으로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30년 평화조약을 어기는 셈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코린토스로 하여금 코르키라의 함대를 합병하는 결과를 허용하여 결국 제해권이 스파르타 쪽으로 넘어가버리고 마는 위험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지 몰랐다. - P73

스파르타 역시 이와 비슷한 전략적 딜레마에 직면했다. 만약 자신들이 코린토스의 코르키라 공격을 지지한다면 아테네는 스파르타가 자국의 해군력에 도전한다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고 선제공격을 준비할지도 몰랐다. 반면에 만약 스파르타가 중립을 지킨다면 아테네가 갈등에서 결정적인 행위자가 되어 결국 스파르타가 다른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스파르타로서는 이런 상황이야말로 묵과하고 넘어갈 수없는 마지노선이었다. 이웃 나라들에게 안정적인 영향력을 유지하는 일본노예들의 위협을 막는 데 필수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 P73

코린토스인들이 만약 스파르타가 무슨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자기네들은 동맹을 탈퇴할 생각이라고 말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스파르타인들 모두 틀림없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아테네의 부상이 수백 년간 스파르타가 그리스 전체의 안전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어온 핵심 동맹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 P75

번번이 진정한 국가이익처럼 보이는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나라들을 보면, 국가 정책이 일관된 한 가지만아니라 필수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정부 내각 분파들 간의 협상에라 결정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페리클레스가 여러 차례 지도자로 자기는 했지만 그에게 공식적인 권한은 별로 없었다. 아테네의 법률 시스템독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 개인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으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리클레스는 의회 실력자인 만큼여러 정치인들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그저 그의 설득 능력에 있을 뿐이었다. - P76

모든 참관인들 가운데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은 오직 스파르타의 왕아르키다모스뿐이었다. 그는 어느 쪽에게도 압도적으로 유리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한 세대는 계속되리라고 예견했다.
아르키다모스가 예견한 대로 전쟁은 참혹했다. 30여 년에 걸친 아테네와스파르타 간의 유혈참극으로 그리스 문화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페르시아전쟁 이후에 합의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지고 힘의 균형으로 공고화되어온 질서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 P77

특히 전쟁은 아테네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조종 소리로 들렸다. 스페타는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국력은 쇠약해졌고 동맹은 망가졌으며 부거의 바닥난 지경이 되었다. 그후 2,000 년 동안 그리스가 다시 자진해서뭉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컨대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아이디어의 발단이 된 이 사건, 펠로폰네소스전쟁은 그리스 역사만이 아니라 서양문명사에서도 하나의 분수령이 된 것이다. - P78

왜 그리스의 두 주요 세력 간의 경쟁은 결국, 각자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것을 파괴해버리고 만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을까?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근본적인 원인은 신흥세력과 지배 세력 간의 구조적 긴장이 얼마나 깊은가에 있다. 이런 경쟁이 두 나라를 잇따른 교착상태에 빠뜨림에 따라 서로의 정치 구조 안에서 가장 열성적인 목소리가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자존심이 더 강해지며, 상대국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더 날카로워지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은 점점 더강해진다.  - P79

투키디데스는 전쟁으로 이끈 이 역학에 기름을 끼얹는 세 가지주요 동인을 밝혔다. 바로 이해관계, 두려움 그리고 명예다. - P79

자유로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주권을 지키는 일이다. 투키디데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테네의 끝없는 팽창이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을 잠식하기 시작함"에 따라, 스파르타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입장에 처했다고 느꼈고"
따라서 전쟁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구조적 현실에 관한 ‘사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투키디데스가 사용한 단어다.  - P79

객관적인 조건을 인식하는 주체는 바로 인간이고, 우리 인간이그 조건을 바라보기 위해 사용하는 렌즈는 우리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지배 세력의 두려움은 종종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켜 위험을 과장하게만든다. 반면, 새로 부상하는 세력의 자신감은 가능한 일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게 만든다. - P79

이해관계와 인식 너머에는 투키디데스가 ‘명예‘라고 부른 제3의 요소가있다. 현대인들의 귀에는 이 말이 허세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투키디데스의 개념은 지금 우리가 국가의 자기 인식,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존중에 관한 확신 그리고 자존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개념이다.  - P80

한 세기에 걸쳐 점점 힘이 강해진 아테네는 자연스레 스스로의 자격에 관한 자각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메가라나 코린토스처럼 자국보다 약한 나라가 접근해왔을 때 이들 나라가 스파르타의 동맹국이라는 사실은 이들 나라가 아테네에 적절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 결코 될수 없었다. 이 위대한 역사가의 말에 따르면, 이 세 가지 요소가 갈수록 서로 점점 더 심하게 얽히는 바람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반복하게 되었다. - P80

서로 일종의 체스 게임을 벌이는 동시에, 각 나라는 서로의상대국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명예이자 재앙이라고 믿는 국내의 정치 주체들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과도 씨름해야 했다.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국내정치에 휘말려버린 것이었다. 미국대통령학 분야의 석학인 리처드 뉴스타트 Richard Neustadt 가 미국 대통령 역할의 특징이라고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게 요약한 바를, 페리클레스와 아르키다모스는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말은 여전히 ‘약함‘이다." - P80

아테네의 힘이 갈수록 커지고 덩달아 스파르타의 우려도 갈수록 커져감에 따라, 두 나라는 점점 더 전쟁을 피하기 어렵게 만드는 길을 자꾸만택했다는 점이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아테네의 확신에 찬 주장은 오만으로까지 부풀어 올랐고, 스파르타의 불안은 피해망상 수준으로까지 곪아갔다.
- P81

평화조약은 상대 세력의 영향권에 대한 개입을 금지함으로써 의도치 않게남아 있는 중립국들에 대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경쟁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코르키라와 메가라에서 발생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은 결국,
수십 년 동안 점점 커져온 압력의 분출구가 되었다.
그렇게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최초의 희생자들이 걸려든 것이다. 아테네와스파르타 양국 모두에서 훌륭한 정치가들과 지혜로운 목소리들이 입을 모아 전쟁은 곧 재앙을 뜻하리라고 경고했지만, 힘의 균형이 이동한 현실 탓에 양측 모두 가능한 선택지 중 가장 덜 나쁜 쪽이 폭력이라고 결론짓게되었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