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세라티가 씨익 웃으며 테이블에 무심한 듯 벤츠와 아우디로고가 보이는 차 키를 올려두었다. 반포 아파트 입주민 카드도함께였다. "이런 게 자존감이야." 마세라티의 이야기에 지운은 언젠가 《자존감 수업》이라는책에서 읽은 자존감의 정의가 다 헛소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년 대한민국에서는 집 주소와 계좌가 자존감이었다. 이런세상의 진리를 왜 이제야 알았을까? 지운은 살짝 분한 마음이들었다. - P142
애초에 펠로가 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문의중에서도 무척 똑똑하고 열정적인 소수만이 펠로가 될 수 있었다. 즉, 전국의 전교 1등이 모이는 의대에서 6년 내내 상위권 성적을 내고 인턴, 레지던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상위 5퍼센트만이 펠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펠로는 출발점일 뿐 논문, 학생 교육, 과내 행정업무, 정부 지원 과제, 교수님 뒤치다꺼리 등 온갖 잡무를 완벽하게 해내야만 진료조교수로 추천받을수 있었다. 그리고 진료조교수 열 명 중 한 명 정도만 정규직인전임조교수로 승진할 수 있었다. 전임조교수가 되면 비로소 대학병원의 식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 P101
"그 단톡방 멤버 여섯 분이 코스닥 상장할 저희 회사 사외이사진입니다. 이번에 모두 1억 5000만 원씩 장외주식 매입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아직 가진 돈이 2300만원뿐인데…." "아이고, 교수님 제 실력 보셨잖습니까? 내일 전문의 면허증은행에 제출하시고 1억 5000만 원 아니, 1억3000 만원만 대출받으십시오. 서 부장이 따라가서 다 도와드릴 겁니다. 그렇지,서부장?" - P110
하지만 6개월 뒤 한 상무는 사라져버렸다. 상장한다던 그의회사 홈페이지도 단톡방 멤버들도, 부자의 심장이 땅끝까지 내려앉았다. 설마, 하고 M제약에직접 찾아가보았지만 한 상무도 서 부장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대답뿐이었다. 매일매일 안부를 묻던 멤버들 역시 SNS를모두 탈퇴하고 잠적해버렸다. 부자곰은 황급히 한 상무를 비롯한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대답이한결같았다. "이 전화는 수신이 정지된 번호입니다." 그 모든 게 잘 설계된 각본이었다. - P111
은비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우선 4700만 원, 6년 동안 은행에서 고객에게 온갖 모욕과 성희롱을 참아가며 모은 피같은 예금과 적금이었다. 거기에 재혁은 은비가 차곡차곡 모아온 보험 납입금까지 탈탈 털어갔다. 여기서 멈췄다면 그나마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재혁은 은비의 이름으로 신용대출을 3000만원이나 받았다. 은비가 부모님께 결혼 준비 자금으로 빌린 돈3000만 원까지 고스란히 남자친구의 투자금이 되었다. 그렇게총 1억 원 넘는 돈이 모래성처럼 사라졌다. - P66
울컥 화가 난 은비가 재혁에게 쏘아붙였다. "내 이름으로 대출까지 받아놓고 그 말이 나와? 오빠가 사람이야? 우리 부모님 돈까지 빌렸잖아! 이제 진짜 없어!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어!" "진짜 확실하다니까. 나 좀 믿어봐, 마지막으로! 우리 다시 돈복구해서 결혼해야지." 은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P68
몇 분 뒤 재혁이 무언가결심했다는 듯 은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네 부지점장이랑 팀장 이번에 둘 다 일주일간 휴가간댔지." 은비가 코를 훌쩍이며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얼굴로남자친구를 바라봤다. "딱 3일이면 돼. 너희 은행 돈 오빠한테 좀 빼서 보내줘. 아무도 모를거야." - P68
정신이면 횡령을 했겠니. 아니래, 비트코인 선물 했다던데? 그건 또 뭐니. 세상이 미쳤다. 미쳤어. 야, 근데 넌 그런 걸어떻게 다 아냐? 쟤 전 남친이 주식이랑 코인 하다 돈 다 날렸잖아. 말도 마, 그 새끼. 너 돈도 빌려줬다며. 받았어? 잠수 탄 새끼가 갚았겠냐? 암튼 우리 은행도 100퍼센트비트코인 아니면 주식이야. 한 일주일만 횡령해서 두 배로 불리려고 한 거지. - P71
‘은비야, 오빠가 정말 급해서 그러는데 ・・・ 지난번에 한 이야기 생각해봤어? 진짜 딱 3일, 아니 5일만 쓰고 돌려줄게‘ 안 그래도 뒤숭숭한 시기에 누가 볼세라 은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오빠. 나은행 잘리면 책임질 거야? 나보고 범죄자 되라고?‘ ‘3일만 있으면 너한테 빌린 돈이랑 다른 빚 전부 갚을 수 있어. 진짜 확실한 정보야.‘ ‘누가 그래? 누가? 맨날 게임하고 토토 하는 오빠 친구들? 그걸 믿으라고?‘ ‘이번에는 진짜야. 오늘 바로 추매해야 해. 내일 상한가 갈거라고 떴어. - P72
은비야, 이건 범죄가 아니라 그냥 잠깐 아주 잠깐 빌리는 거야.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나 좋자고 이래? 빨리 우리 돈 모아서집 사야지. 이번엔 진짜 확실해. 상한가 아니 최소 3 연상은간대‘ - P73
K대 졸업장과 석사 학위는 서른넷 백수 재혁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2014년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해봤자 취업하기어렵다는 주변의 말에 불안해진 그는 기어이 서울의 K대로 편입에 성공했다. 합격 소식을 들은 은비는 뛸 듯이 기뻤다. - P76
K대를 졸업한 재혁은 중견 기업 몇 군데에 합격했지만 대기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봉이 6000만 원도 안 된다는 이유로모두 입사를 거절했다. 그의 말대로 고작 ‘지잡대 출신‘인 은비가 은행 정규직 공개 채용에 합격했을 때 재혁은 씁쓸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 P77
이후 K대 동기들에게 스타트업 동업을 제안받았지만 재혁은 창업은 위험하다며 거절했다. 석사 학위를 따고지방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제안받았을 땐 남자의 야망 운운하며 거절했다.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이 흘러가고 그는 노량진이 아닌 안암동자취방에서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재수, 삼수, 사수까지 하면서도 모의고사에서 한 번도 평균 40점을 넘기지 못했다. 그만큼준비가 부족했지만 그는 절대 7급 공무원보다 쉬운 시험에는도전하지 않았다. - P77
"지훈아, 네가 소개팅을 나갔어. 상대방이랑 성격이 너무 잘맞아. 말도 너무 잘 통해 인연인 거지. 5년 연애하고 이제 서른세 살쯤 그 여자한테 프러포즈를 딱 해. 그럼 그 여자가 너랑 결혼할까? 아니야, 강남에 아파트 있는 새끼랑 결혼해 아니면 키크고 잘생긴 연하랑 하겠지. 우리는 뭘까? 음, 답은 주식밖에 없는거야." - P131
정규직이 되고 첫 월급을 받는 날, 지운은 즐거운 마음으로급여명세서를 확인했다. ‘실수령액 207만 원.‘ 지훈은 머릿속으로 바쁘게 계산기를 돌려보았다. 스마트폰요금 6만 9000원, 월세 70만 원, 한 달 치 전기세, 가스비, 식권50장 15만 원, 지하철 교통카드 충전비 6만 원... 식비를 아끼기위해 하루 두 끼를 구내식당에서 사 먹고 탕비실 커피믹스만 마시면서 한 달을 버텨도 저축할 수 있는 돈이 90만 원도 안 되었다. 그렇게 모아봤자 1년에 1080 만원 정기 적금 이자가 조금올랐다고 하지만 그만큼 물가도 오른 탓에 치킨, 피자를 한 번씩만 시켜 먹어도 7~8만 원이 나갔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1년에 1000만 원 모으기도 쉽지 않아보였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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