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께서 사랑하는 아내가 굶주리다 못해 도망치도록 놔두고 어찌 그리 학문에만 몰두한 것이오?" 담덕이 갑자기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쳐다보자 이정국은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럽습니다. 무사는 칼과 창으로 세상을 구하려고 하지만 소장은 감히 학문과 글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병법서를 탐구하였지요. 태산에서 왕자님을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신 태공망의 병법서를 보고 깜짝놀란 것은, 그것야말로 소장이 찾고자 했던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 P245
최상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전쟁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싸움이지만,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병법 아니겠습니까? 그걸 연구하다 보니 옆에서 굶다 못해 도망치는 아내조차 챙기지 못했지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 P245
"장군의 아내가 재가하여 만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요즘 며칠 가까이에서 말을 붙여보니 좋은 사람이더군요. 그 사람은 조상 대대로 쇠를 다루어 왔다고 합니다. 원래 북흉노 출신으로 저금산(알타이) 기슭에서 대장간 일을 하다가 대흥안령을 넘어 부여땅에 정착했답니다. - P245
그렇게 되자 이정국은 갑자기 홀로 남겨진 처지가 되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군막을 찾아가지 않고 한동안 발 달린 허수아비처럼 들판을 어정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는 지금 김슬갑과함께 누워 있을 전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김슬갑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갈 데없는 전처를 아내로 맞아들여 구제해 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처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처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질투심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 P247
애써 주저하면서도 자주 찾아가 안부를 묻는 이정국으로서는 혹시 자신의 처지가 후한 때 회계태수를 지낸 주매신처럼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또한 없지 않았다. 주매신은 집안이 가난하여 나무꾼 노릇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를 줄줄 외우며 다녔다. 나무를할 때나 지게를 지고 장으로 가서 나무를 팔 때나 그는 늘 중얼중얼 미친놈처럼 글을 외곤 했던 것이다. 가난을 견디지 못한아내는 남편의 그런 모습이 부끄러워 결국 도망을 쳐버렸다. - P249
오랜 세월이 흘러 주매신은 나이가 오십 줄에 들어서야 황제의 눈에 띄어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주매신의 고향인 회계군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는 그를 회계태수로 임명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반란군을 진압하고 금의환향하여 당당하게 성안으로 들어갈 때, 그는 거리에 나와 구경을하던 전처와 재혼한 남편 부부를 보았다. 그들은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주매신은 그들 부부를 수레에 태워 성에 들어가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전날 배가 고플 때 제사 음식을 준 것을 고맙게 여겨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전처는 자신이 가난을 견디지 못해 도망친 것을 부끄럽게 여겨결국은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 P249
"그 단도의 칼자루에 새겨진 삼태극 문양을 보시오. 그것이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소?" 담덕은 날카롭게 김슬갑을 쏘아보았다. "이건 많이 본 문양이옵니다. 금산 기슭에서 쇠를 다루는 장인들은 자주 이 문양을 사용하지요. 아마도 이 단도는 알타이지역에서 만들어진 것 같사옵니다. - P254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삼태극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상징한다고 하였사옵니다." "무엇이? 그것은 곧 천지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우리 배달민족에게만 천지인 사상이 있는 줄 알았는데, 흉노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군요." "천지인 사상은 우주의 원리라 들었습니다. 북방민족들 사이에서 공유하고 있는 사상으로, 특히 쇠를 다루는 우리 장인들은 그 우주 원리를 매우 숭상하는 편입니다." - P255
이를 불에 달구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냅니다. 즉, 하늘과 땅과사람이 하나의 우주 기운으로 합치될때 비로소 새로운 것이태어나지요. 삼태극의 청색은 무극으로 하늘을, 적색은 태극으로 땅을, 황색은 황극으로 사람을 상징한다고 들었사옵니다. 그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주의 원리인데, 삼태극의 휘돌아가는 모양이 그것을 뜻한다 하옵니다. 한시도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원리말입니다. - P256
"그 도인이란 분이 누구요?" "존함은 알 수 없고 다만 무명선사라 불린다했습니다. 그 도인께선 부여 땅의 이산 저 산을 찾아 돌아다니며 검술을 익히는데, ‘사람을 살리는 검‘을 연구한다고 들었사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검이라?" 담덕이 다시 되뇌었다. 바로 이정국에게도 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셈이었다. - P258
"고구려 사람이라고?" "그렇사옵니다. 그 도인은 깊은 산속에서 고구려의 전통 검법을 집대성하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고구려의 검법을 집대성한다고?" "예, 그러하옵니다" "더 아는 바는 없소?" "저도 아비가 보검을 만들 때 보고는, 이후 그 도인을 단 한번도 본 적은 없사옵니다. 사람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혼자서 검술을 익힌다 했습니다." - P258
전령병이 하루 전에 달려와 국내성에 고구려 원정군이 곧입성한다는 소식을 알렸으므로, 왕후도 대왕을 맞이하기 위해대신들과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보름전 요하 전투의 승전보가 국내성으로 날아들때왕자 담덕에대한 소식도 전해졌다. ‘우리 아들 담덕이 무사히 살아 있었구나!‘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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