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덕은 어느 사이 적군의 말을 빼앗아 타고 성안을 내달리며 칼을 휘둘러댔다. 그는 적의 목을 베기보다 칼등으로 쳐까무러치게 했다. 연나라 군사들 중에는 고구려 유민의 자제들도많이 있을 것이므로 함부로 살생할 수가 없었다. - P228

"담덕아! 너는 저 옛날 모용황이 우리 고구려에 쳐들어와 5만의 고구려 백성을 볼모로 삼아 끌고 간 치욕의 역사를 잊었느냐? 이번에 우리 고구려군은 부왕이신 고국원왕의 원수를갚으러 온 것이다. 철천지원수에게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갚아야 한다!" - P230

"담덕아! 이 아비가 경솔했구나 그렇게 화를 낼 일도 아닌데말이다. 허나 이 아비는 지금까지 단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것이 모용씨들이다. 특히 모용황은 형님이자 선대왕이신 소수림대왕께서도 저 중원의 월나라 구천과 오나라 부차가 와신상담을 하듯 이를 갈아온 원수다. 연나라가 우리 고구려에겐 철천지원수임을 잘 기억해 두어라." - P231

대왕은 정말 소리가 나도록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어린 시절 담덕은 소수림왕이 선대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보여준 날이 뾰족한 화살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이 그 화살촉에 짐독을 묻혀 고국원왕을 전사케했다는 사실을 그 역시 뼛속에 사무치도록 들어왔던 것이다. - P232

포로들 뒤에는 고구려 후군이 따라붙고 있었다. 연나라 군대가 추격해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후방을 경계하면서 동시에포로들을 호송하는 역할도 맡았다. 따라서 말을 탄 후군 기병들은 포로들 중간 곳곳에 배치되어 마치 개돼지를 부리듯 채찍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시러베아들 놈들아! 꾀부리지 말고 빨리 걸어라!"
기병들은 연나라 포로들을 마구 닦달해 댔다. - P233

"아닙니다. 아내는 고구려 사람입니다. 제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엉너리 떨지 말거라 어찌 고구려 여인이 너 같은 연나라 오랑캐의 아내가 됐더란 말이냐?"
"오랑캐라고 해도 좋습니다. 말채찍으로 마음대로 때려도 달게 맞겠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고구려 여인이니 저도 고구려를좋아합니다. 제발 아내만큼은 살려주십시오."
"잔꾀 부릴 생각 말고 어서 대열 속으로 들어가라! 대열에서이탈하는 자는 모두 도망치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기병은 사내의 등짝을 말채찍으로 갈겼다. - P234

"예, 왕자님! 보시다시피 포로들이 꾀를 부려 이탈자가 자주발생합니다. 이들을 닦달하다 보니 행군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백성들을 함부로 다루면 되겠는가?"
담덕은 흙투성이가 된 남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뒤를 따라온 호위무사 마동과 태산에서 고구려 유민의 두령으로 있던 이정국도 눈길을 땅바닥으로 향했다. - P235

포로와 연나라 남녀 백성들을 호송하는 후군을 두루 돌아본 후, 담덕은 현도성에서 대왕에게 볼모로 잡힌 백성들을 풀어주라고 재삼 간청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 연나라 군대의 포로는 모르지만 남녀 백성들까지 볼모로 삼아 그 멀고 먼귀환 노정에 오른 것은 아무래도 잘못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포로와 백성 1만이 자꾸 뒤로 처지자 후군을 맡은 고구려군사들은 그들을 개돼지처럼 마구 다루었다. 노정은 길고 날씨는 한창 여름이라 찜통더위에 지쳐 쓰러지거나 열사병으로 죽는 자들이 자꾸 늘어났다. - P237

"폐하! 소자가 이끄는 태극군에게 포로와 연나라 백성들의호송을 맡겨주시옵소서. 날이 갈수록 기아에 허덕이고 열사병에 걸려 죽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사옵니다."
"그자들은 포로이니라 제 몸 제가 추스르지 못해 병에 걸려죽는 걸 어찌하겠느냐? 네가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대왕 이련은 수레 위에 앉아 말을 탄 담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선 더위에 지친 나머지 짜증 같은 것이 묻어나고 있었다 - P237

저들을 짐승이나 가축처럼 여기시나이까?"
"저들이 우리 고구려의 백성은 아니지 않느냐? 엄연히 저들은 모용씨의 수족들이다."
"저들도 곧 국내성으로 가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 역시 고구려 백성이 되는 것 아니옵니까?"
- P238

담덕은 어린 나이지만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에 대해서는 어른들보다 더 분명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어쩌면 어리기때문에 그 순수함이 그런 용기로 나타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하가촌 도장에서 사부 을두미에게 군주의 통치 철학을 배웠다.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배와 물에 비유한 대목은 어린 그의 마음에도 청동에 새긴 글자처럼 지워지지 않는 명문으로 남아 있었다. - P238

"성질이 사나운 날짐승도 정성을 다하여 길들이면 가축이 되지 않사옵니까? 마소가 그렇고, 개와 돼지가 원래는 산이나 들에 사는 사나운 짐승이었는데 점차 사람의 손길에 의해 온순한 축생으로 길들여져 살아가는 이치가 그렇습니다. 저 포로들역시 길들이기에 따라 백성이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할 것이옵니다. 소자가 훈련시킨 태극군은 바로 연나라에 끌려왔던 고구려 유민의 자제들로, 저들과 통하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태극군에게 저들의 통제를 맡겨주십시오."
담덕이 이렇게 간곡하게 요청하자, 대왕도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 P239

"지금 여기 연나라 포로들과 백성들 가운데는 여러분들과같은 고구려 유민들도 섞여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동안 여러분들의 조상과 가족들은 모용선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포로나 볼모로 끌려온 연나라 백성들도 여러분들의 이웃이나 친지와 다름없습니다. 내 몸이 귀하듯 저들의 몸도 귀한 것입니다. 내몸처럼 저들의 몸을 돌보며 국내까지무사하게 호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담덕의 말에 태극군 중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들이 많았다 - P240

"부끄러운 얘깁니다만, 실은 그 고구려 여인은 전날 제 내자였습니다. 그보다 먼저 제 집안의 내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조부는 한족 출신이고, 조모는 고구려 출신입니다. 부친 역시 고구려 여인을 아내로 맞았고, 저 또한 아까 낮에 본 그고구려 여인을 만났습니다. 조모와 친모가 고구려 출신 여인이니, 제 몸속에도 고구려 피가 많이 흐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내자까지 모계 3대는 모두들 고구려 유민 출신들이지요."
이정국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담덕을 바라보았다.
"장군께선 그런 조상의 내력을 가지고 있었군요?" - P240

예, 그러하온데 소장이 너무 집안일에는 등한시한 채 학문을 익히는 데만 열중하다 보니, 내자가 끝내 집을 나가 버리고말았습니다. 굵기를 밥 먹듯 한다는 말이 있듯이, 하루 한 끼먹기도 힘들 정도로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살림하는 아녀자로서 견디기 힘들었겠지요. 열흘을 굶더니 얼굴이 해골처럼 반쪽이 되어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장은 그때까지도 경서의책장만 넘기며 글을 읽고 있었지요. 가정을 버리고 도망친 내자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모두가 소장의 불찰이었지요."
이정국의 눈에 번쩍이는 눈물이 어렸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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