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목은 예를 갖춘 후 얼른 의복을 챙겨 입었다. 옷을 입으면서 그는 담덕에게 단도에 얽힌 사연을 어찌 말해야 할지 난감하여 얼굴까지 붉어졌다. - P140

일목은 이렇게 얼버무려 대답하며 담덕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다시 또 그 위에 겹쳐 떠오르는 연화의 모습을 어렴풋이 본듯했다. - P140

일목은 얼른 단도를 품속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유민군을 앞으로 태극군이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담덕은 빙그레 웃었다. 그 이름이 어쩐지 마음에 꼭 들었던것이다. - P141

강안에서 발생한 안개는 황사와 섞여 뿌옇게 번져 나갔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땅인지 구분하기조차어려울 지경이었다. 강줄기를 따라 좌우에 형성된 진흙과 토사가 섞인 하상은 무성한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길게 늘어진 갈댓잎들이 습한 공기로 인해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채바람에 서걱대고 있었다. - P142

대흥안령 남부에서 발원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서요하, 동북쪽에서 서남 방향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를동요하라고 했다. 이 두 물줄기가 만나 요하의 큰 줄기를 이루는데,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흐름을 지속하다 발해만으로빠져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 P143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요하를 경계로 하여 서쪽을 요서동쪽을 요동이라 불렀다. 강의 좌우로 퇴적층이 발달되면서 기름진 농토를 이루었고, 그 주변에 크고 작은 촌락들이 들어섰다. 사람들이 두루 모이는 평지에는 도성이 생기고,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높다란 석축의 산성들이 곳곳에 조성되었다. - P143

"이곳이 우리 연나라의 황성이다. 대황제 폐하께서 건설하신궁궐이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거라. 폐허가 된 이 궁궐은우리 묘용부의 가슴이다. 이 가슴을 누가 이렇게 파헤쳐 왔느냐? 그 원흉이 누구이겠느냐?"
적갈색 말을 탄 자가 반백의 수염을 휘날리며 바로 옆에 선젊은 장수에게 물었다. 금빛 투구를 쓴 그는 모용수였고, 그가 말하는 대황제란 모용황을 이르는 것이었다. - P144

"예, 폐하! 그 원흉은 부견입니다."
젊은 장수는 모용수의 넷째 아들 모용보로, 그는 호위무사처럼 아버지를 따르고 있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모용부의 가슴을 파헤친 게 부견의 군대인 것은 사실이나, 먼저 모용부의 가슴을 병들게 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허약성이다. 정신이 병들면 육체가 시드는 법, 짐은다시 우리 모용부의 정신을 세우고 육체를 강건하게 할 것이다." - P155

모용수가 둘러선 병사들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육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모용수는 젊은 장수 못지않을 만큼 튼튼한 체력을 갖고 있었다. 7척 장신의 타고난 거구였으며, 특히팔을 늘어뜨릴 경우 무릎까지 닿아 활쏘기에 능하고 창을 잘다루었다. 비록 수염이 희끗희끗하지만,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없을 정도로 팽팽하고 윤기가 흘렀다. 푸른빛이 감도는 그의두 눈은 이리의 그것처럼 번뜩거렸다.
- P145

그러나 모용보는 모계 혈통을 이어받아 체격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고, 눈빛도 강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성격 또한 우유부단하였는데, 아버지 모용수는 아들의 그런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내심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 모용전이 일찍 죽자본처인 단씨에게서 낳은 아들 모용보를 곁에 두고아꼈다. - P145

그도 그럴 것이, 전진은 남쪽의 동진을 경략하는 데 전력투구하여 동쪽 변방인 요하지역에 관심을 가질 겨를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요하를 넘볼 수도 없었다. 고국원왕과 소수림왕 2대에 걸쳐 전진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내심 요동을 찾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눈치만 볼 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남쪽 변경의 백제가 호시탐탐 공격을가해 오는 바람에 요하지역 진출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요동조차도 감히 넘보기 어려운 처지였다. - P147

요서지역은 한때 백제가 경략해 지배를 했었는데, 근초고왕사후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마침 후연을 세운 모용수는 아우 모용좌로 하여금 요서지역을 연나라군의 전략기지로삼도록 했다. 모용수가 일군을 이끌고 용성을 경유해 요서지역에 도착하자, 모용좌는 그들을 극진히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 P148

고구려를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되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우리 연나라의 도성인용성을 복원하는 일일세. 이번에 용성에가보니 부견의 군대가 휩쓸고 간 흔적이 그대로 폐허가 된 채남아 있더군. 그러니 우선 용성을 복원하고, 각처에 흩어져 있는 우리 모용선비들을 불러 모아야지. 지금은 전쟁을 일으키는것보다 안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배가 튼튼해야 폭풍에도 뒤집히지 않는 법이거든. 지금은 언제 어디서 폭풍이 몰아칠지 모르는 광풍의 시대네. 그러니 바람이 잔잔할 때 서둘러배부터 고쳐야지." - P149

"그것 참 좋은 전략이다. 대황제 폐하께서 옛날 고구려를 공략했을 때, 고구려 5만여 백성을 볼모로 잡아 용성으로 끌고온 적이 있었지. 그들의 자손이 벌써 3대에 이르니 고구려 유민들도 많이 늘어났겠구나. 당시 고구려에는 무라는 황제가 있었는데 불세출의 명장이었지. 그가 5만의 군사로 우리 연나라 대군을 추격하려 했으나, 볼모로 붙잡힌 고구려 백성들 때문에포기를 했다고 들었다. 회군할 때 우리 연나라 대군은 볼모로끌고 오는 고구려 백성들을 화살받이로 삼았던 것이지. 그러니고구려군이 동족에게 화살을 쏠 수 있었겠는가?"
- P151

모용수는 그러면서 통쾌하게 웃었다. 그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요동성을 선점하겠다는 아우 모용좌도 마음에 들었고, 고구려 유민 출신 청장년들을 방패막이로 보내자는 아들 모용보의 전략도 기발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P151

고구려 백암성은 요동성 북쪽의 요하 지류인 태자하 절벽에세운 요새였다. 군사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요동성과 인접해 있었으므로, 요하 부근의 연나라 군사 움직임을 가장 빨리 감지할 수 있었다.
- P152

대왕 이련은 백암성의 전령이 가져온 소식을 접하자 오장이뒤틀리는 듯 쓰라린 고통을 느꼈다. 그의 입에서는 저절로 깊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가 태어나기 전, 부왕인 고국원왕 시절 연나라 모용황이 수도를 용성을 옮긴 후 고구려로 쳐들어왔던 치욕의 역사를 떠올렸던 것이다. - P152

동부욕살 하대곤이 양아들 해평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을당시, 고계는 반군을 제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상이 되었다.
고계는 국상의 자리에 오르면서 고구려의 내정뿐만 아니라 군사권까지 모두 장악할 수 있었다. 계루부의 수장으로 그는 오래도록 세도정치를 해온 연나부 세력을 몰아내고 대왕 이련의왕권을 강화하는 데 공헌한 일등공신이었다. - P153

동부군의 반란 당시 하대곤은 자결을 해평은 왜국으로 망명을 했다. 그리고 국내성에서 연나부의 수장 역할을 하던 국상 연소불에게는 삼족을 멸하는 무거운 형벌이 내려졌으며, 그를 따르던 연나부 세력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목이 달아났다.
이처럼 연나부를 처단한 고계는 계루부를 재정비하여 왕권을강화했고, 그해 11월 오래도록 병상에 있던 대왕구부가 서거하고 왕태제 이련이 즉위 - P153

"한 달이면 정비를 끝낼 수 있사옵니다. 여름이 되기 전에 요동까지 출격이 가능합니다."
고계 역시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남쪽 변경은 어떠하오?"
- P154

"세작들의 보고에 의하면 백제는 내정이 분열되어 대신들 사이에 파벌싸움이 벌어질 조짐이라고 하옵니다. 작년 봄에 죽은 백제왕 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큰아들이 우유부단하여 왕권이 크게 흔들리고 있으며, 그 틈을 타서 반역을 꿈꾸는세력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옵니다. 그러하니 남쪽 변경은 크게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옵니다." - P154

고계가 말하는 국본은 다음 왕위를 이를 태제나 태자를 일컬었다. 만약의 일이긴 하지만 대왕이 원정을 떠나 유고를 당할경우, 곧바로 국본이 왕위를 이어야 하기 때문에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짐이 어찌 그걸 모르겠소? 허나 대왕이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전장에 나가는 것은 우리 고구려의 전통이오. 더구나 모용선비는 부왕의 원수이니 이번 기회에 짐이 그 포한을 갚으려고 하오.  - P155

국내성 군사 1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가면서 서남쪽의 환도성·오골성·건안성 · 안시성, 그리고 서북쪽의 백암성·개모성·신성 등 각 성에서 차출된 군사들 3만을 모아 도합 4만의원정군을 편성토록 했던 것이다. - P156

 담덕을 낳은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태기가 없었다. 더구나 해평의 반란 이후 담덕의 행방이 묘연해 가슴앓이를 해오고 있었다. 그것은 가슴의 병이 될 정도여서 자신도 모르게 시시때때로 한숨으로 터져 나왔다. - P156

며칠 전 비가 내려 요하는 검붉은 흙탕물이었다. 서문을 빠져나온 전령병은 요하에서 일단 말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었다. 그러나 빗물에 잠겼다 물이 빠지면서 드러난 진흙 펄로들어서자 말은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펄에 말발굽이 빠져 제대로 걷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어떤 곳은 무릎까지 빠지는 펄도있었다. - P161

그로부터 보름 후, 모용좌의 파발을 받아본 모용수는 용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고구려가 이렇게 빨리 군사를 움직일 줄이야. 먼저 요동성을 견고하게 지킨 후 용성을 재건토록 해도 늦지 않았을 터인데…………. 이건 전적으로 나의 불찰이다.‘ - P163

그도 그럴 것이 문제는 동쪽의 고구려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건재한 전진의 부견은 장안에 군사를 결집시켜 후연과 후진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진을 세운 요장 역시 전진을 압박하고 중원 진출을 꿈꾸면서,
동시에 호시탐탐 후연의 중산을 엿보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모용수나 요장처럼 부견 수하 장수로 있던 선비족의 일파인걸복국인이 또한 장안 서쪽에 기반을 둔 채 반역을 꿈꾸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또 다른 선비족 일파인 탁발규 역시 후연 서북쪽에 기반을 두고 그 세력을 점차 키워 가고 있는 중이었다. - P164

"폐하! 소자를 요동으로 보내주십시오. 여암을 선봉장으로 하여 보기병 1만을 주시면 고구려왕 이련의 목을 가져오겠나이다."
이렇게 나선 것은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이었다. 모용농은 모용보의 이복동생으로 장창을 잘 쓰는 용장이었다. - P165

모용농의 천장을 울리는 큰 목소리에선 젊음의 혈기가 뚝뚝묻어났다. 그가 추천한 여암은 346년 전연의 모용황이 둘째 아들 모용준 등을 시켜 부여를 공략했을 때 포로로 잡은 5만여부여 유민의 후손이었다. 당시 부여왕 현도 포로 신세가 되어연나라 도성으로 압송되었는데, 모용황은 자신의 딸을 그에게주고 진동장군으로 삼았던 적이 있었다. 여암 역시 부여 왕족의 후손이었다. - P165

모용수는 이미 연로한 만큼 후계자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부터 마음속으로는 정비 단씨 소생인 넷째 아들 모용보를 태자로 세우고 싶었지만, 패기나 용맹에 있어서는 후비 소생인 여섯째 아들 모용농이 앞섰다. - P166

군주의 자격이 꼭 패기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인덕이 더 우선했다. 그런 면에서는 성격이 우유부단하나 마음이 후덕하고 지혜로운 모용보가 모용농을 능가한다고 판단되었다.
- P167

그러나 전쟁은 패기와 지혜, 그 두 가지를 겸비해야만 적을이길 수 있었다. 모용수는 이번 고구려와의 전투야말로 성격이다른 두 아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됐어. 아주 좋은 기회야." - P167

아들 고발이 모집해 온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정들도 비록짧은 기간 훈련을 받고 배속된 군사들이지만 그 수가 5백을 넘었다. 연나라 선비족 출신들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편이지만,
고구려 군대를 공략하러 가는 마당에 고구려 유민 출신들이혹시 불순한 마음을 품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되었던 것이다. - P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