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안 된다. 백제 놈들은 나의 원수다. 사기 놈에게 속아이렇게 되었지만, 실제로 내 왼팔을 자른 놈은 백제의 장수였다. 그리고 저놈들이 명마를 가져갈 경우 내 조국인 고구려에엄청난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둘 다 양보할 수 없다." 조환은 확실하게 선을 그은 듯 말을 끝내자마자 한일자로 굳게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조건을 내걸어 봤자 들어줄 턱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백제 장정들을 살려 보내는 대신 사기 행수의 호위무사를 맡았던 우리 두 사람을 포로로 삼으십시오. - P79
"포로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내가 너희들을노예로 팔아먹든 종으로 삼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다. 너희들의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진정 그리할 수 있겠는가?" 조환은 넌지시 담덕과 마동의 의중을 떠보았다. - P80
"왕자님, 대체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털털거리는 수레 위에서 마동이 불안한 눈길로 담덕을 바라보았다. 백제에서 동진으로 무역선을 타고 올 때부터 두 사람만 있을 경우 마동은 반드시 담덕을 왕자로 대우했다. "어차피 백제 장정들과는 떨어져야 할 운명이었다. 그들이 우리의 정체를 알기 전에 장안 대상의 포로가 된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조환이 이끄는 대상들을 따라가면 마음대로 장안구경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 P81
한편, 조환은 상단 장정이 가져온 담덕의 단도를 요모조모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손잡이에 금장의 용무늬와 삼태극이 새겨져 있었다.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탁자 위에는 태공망의 병법서 필사본도 놓여 있었다. - P84
"백제 소년 무사라? 이 장도를 가진 자는 신분이 높은가문의 자제일 것이오. 이 칼자루에 새겨진 삼태극 문양은 서북방의 흉노족들이 즐겨 쓰는데, 어찌하여 백제에서 이런 단도가나왔는지 모르겠소." 손장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환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두 소년 무사가 백제인 같지 않았어요. 고구려 말씨를 쓰더란 말입니다." 조환의 눈이 손장무의 눈과 허공에서 마주쳤다. "고구려 말씨를 쓴다?" - P85
"고구려 말씨는 백제 말씨보다 억양이 좀 드센 편이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두 소년이 백제인 행세를 하고 있느냐, 그것이수상하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 두 사람의 무술이 출중해서 곁에 수하로 두고 싶은 욕심에 억지를 부려 포로로 삼기는 했는데 - P85
조환은 그동안 두 소년 무사를 예의 주시하면서 느낀 점을그대로 손장무에게 말했다. "가만있자………… 고구려 말씨를 쓴다? 나이 어린 자가 영특하고 어른스러워 보인다?" 손장무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긴장된 얼굴로 조환을 쳐다보았다. "그 나이 어린 자의 품속에서 이 단도와 함께 태공망의 병법서인 『육도』의 필사본이 나왔습니다. 우리 장안에서도 소장하고 있는 자가 많지 않고 개인적으로도 구하기가 매우 힘든 책인데, 그자가 이런 필사본을 가지고 있다니 그야말로 심상찮은일이 아니겠습니까?" - P86
"글씨체를 보니 제대로 익힌 솜씨요. 두 소년은 예사 인물이아닌 것이 틀림없소. 만약 그들이 고구려에서 온 소년 무사이고 이 단도를 가지고 있다면, 저 초원로를 통하여 서역과 교역을 할 때 들여온 물건이 분명하오. 고구려는 오래전부터 초원로를 통해 서역과 교류를 해오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사람이 과연 고구려인 중 누구이겠소?" "초원로를 통한 교역…………?" 조환은 문득 하가촌 대상단 하대용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구려에서 서역과 직접 교역을 하는 상단은 하 대인의 대상단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원로를 통하여 서역의 말들을 들여와 종마장을 경영하면서 고구려 철갑기병에 군마까지 공급하고 있다는 걸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P87
"이 단도가 바로 담덕 왕자의 신분을 말해 주고 있질 않습니까? 이 단도는 서역과의 교역품이 분명하고, 하대용 상단에서나온 것이 틀림없소. 그렇다면 이는 필시 지금 고구려 대왕 이련과 왕후가 아들 담덕에게 내린 하사품일 것이오." - P88
"이 태공망의 병법서 필사본을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짐작했소이다. 손행수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짐작한 것과 다르지 않소. 앞으로 우리 대상단은 고구려와 지속적으로 교역을 해야 하는데, 두 사람을 우리가 포로로 잡아놓고 있다는 것이 행운인지 악운인지 알 수 없소이다." 조환은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 P88
"잘 보셨습니다. 나는 전에 동부욕살 하대곤 장군의 호위무사 겸 집사였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변명할 여지 없이 담덕 왕자에게 오해를 사기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까부터 행운이기보다 악운이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조환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허허허! 사막을 호령하던 대상단행수의 사자후는 어디로가고 갑자기 그렇게 의기소침해지셨습니까?" - P89
"그렇지 않습니까? 서역으로 가는 사막지대에서 비적 떼들조차 꼼짝 못하게 하는 조 행수가 아닙니까? 염려 마세요. 저들이 만약 담덕 일행이 맞다 해도 행운과 악운은 손바닥 뒤집기 차이에 불과합니다.조행수가 방금 악운이라 말했지만, 그것을 행운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대상단의 기지와 지혜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상술이지요. - P89
대상단은 적성국에 가서도목숨까지 걸고 물건을 사고파니, 어쩌면 장사는 전쟁보다 더한전쟁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대상단의 상술은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고 악재를 호재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손장무가 조환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허면, 일단 두 소년을 데려다 시험을 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 P89
"두 사람에게 묻겠다. 너희들은 스스로 백제 행수 사기의 호위무사라 했다. 그런데 내가 사기의 목을 베기 위해 쫓아갈 때호위무사들인 너희들은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느냐?" 조환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것은 상단과 아무런 관계없는, 오직 두 사람 개인의 원한에 얽힌 싸움 아니었습니까? 더구나 건강 상단과 장안 상단은대치 중에 있었구요. 수적으로도 건강 상단이 열세인데, 행수개인보다는 상단을 지킬 의무가 더 크지요." - P90
"흐음, 허면 백제 장정들을 대신해 두 사람이 포로를 자청한이유는 무엇인가?" 조환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전쟁 상황도 아닌데 서로 간에 피를 흘릴 수는 없질 않습니까? 백제 장정들 전원을 포로로 삼겠다는 것은 일전을 벌이자는 뜻에 다름 아닙니다. 그건 양측 상단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일이지요. 피를 흘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양상단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 P91
"지혜는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습득을통해 오래도록 숙련시킨 통합적인 사고 속에서 지혜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든 대결 구도 속에서는 서로 상생하는 길을 찾는 것이 정도 아닌가요?" - P91
"전진의 황제께선 우리 고구려에서 나는 호피를 좋아합니다. 고구려와 교역하면서 태백산에서 나는 호피를 황제께 자주 헌상했지요." "황제가 호피를 좋아한다구요?" "예, 태백산 호랑이는 이마에 임금왕자 무늬가 있지요. 그무늬가 왕을 상징한다 하여 제후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황제는 바로 제후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사품으로 호피를 내려환심을 사곤 하지요." - P96
"중원을 다스리는 황제는 연호를 사용한다고 들었소. 황제만연호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도 제후들을 다스리기위한 권위의 상징 같은 것입니까?" 황궁 곳곳을 두루 돌면서 담덕은 조환에게 궁금한 것을 자주 물었다. "맞습니다. 제후들은 절대로 연호를 사용할 수 없지요. 연호는 천하 패권을 쥔황제만이 사용하는 정치적 상징 수단입니다. 제후가 다스리는 각 나라들은 모두 황제의 연호를 사용해야만 하지요. 그것이 바로 중원 제국의 천하관입니다. 하늘 아래 황제가 있고, 지상의 땅은 모두 천하를 제패한 군주의소유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각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들은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신하로서 복종해야 합니다. - P97
조환은 그러면서 전진의 부견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연호를 영흥興이라 했으며, 한 해전에 부견을 배반하고 후연을 세운 모용수는 연원이라 했고, 후진을 세운 요장은 백작이라 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허면 모용수와 요장이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 황제를 칭한다는 것 아닙니까? - P97
휘하 장수였던 모용수와 요장두 사람이 반역을 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있으니, 그 타는 속이 어떠하겠습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즘 들어요장이 곧부견을 잡아 죽이겠다며 장안으로 쳐들어올 기세라는 소문이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조환의 말이 맞았다. 이른 봄부터 서북풍의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요장이 이젠 장안까지 밀고 들어와 부견의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 P98
"조 행수께서 본인 스스로 판단하기에 죄를 지었다면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생명의 은인인하대곤 장군에대한 의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는 충분히 상을 받을 만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딱히 조 행수가 죄를 지었다고 할 수도 없지요." 담덕은 그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는 조환을 바로 앉게 했다. - P102
이번 유랑생활을 하면서 백제의 관미성에 가보았습니다. 관미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이고, 그 요새는 한수로 통하는 관문이기 때문에 백제에선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물론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른 측면에서 관미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패하 하류의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예성이 있는데, 이곳이 부소갑에서산출되는 인삼을 교역하는 국제무역항 역할을 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관미성만 탈취하게 된다면 예성항을 고구려의 국제무역항으로 만들어 자연스럽게 인삼 교역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조 행수와 앞으로 이와 같은 교역에 관한 일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 P104
담덕의 말을 들은 조환은 어떤 감동으로 몸까지 떨려 오는걸 느꼈다. 아직 담덕은 열한 살의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나 생각은 이미 중년의 나이를 넘어선 조환 자신보다 훨씬앞질러가고 있었다. "왕자님! 허락만 해주신다면 충심을 다 바쳐 왕자님을 돕겠사옵니다. 고구려를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일에 제 모든 것을바치겠사옵니다." 조환은 감읍한 나머지 다시 무릎을 꿇었다. - P105
고구려 국경까지 가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라 짐작됩니다. 만약 연나라 군대를 만나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면 모용수의 넷째 아들 모용보가 이끄는 군대의 휘하 장수로 있는 고화의 이름을 대십시오. 고화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모용보 군대의 노장인데 연나라 군사들 사이에서도 매우추앙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연전에 시생도 고구려로 상단을 이끌고 가다가 연나라 군대에 잡혔는데, 고화 장군 덕분에 안전하게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고화 장군은 시생의 아버지 친구이기도 합니다. 고화 장군의 아들 고발도 모용보 군대에서 아버지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 P106
담덕은 사방 지평선으로 연결된 너른 들판을 둘러보며 내심남다른 감개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경우 산악 지형이 많아서 그런 평야지대를 구경하기 쉽지 않았다. 담덕과 마동은 가다가 날이 저물면 자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말을 달렸다.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중원의 들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 P108
"만약 연나라 군사들을 모두 죽이면 이 마을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엄포를 주어 살려 보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다시는 이 마을에 오지 못하게 했지만, 다른 연나라 군사들이 또 들이닥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년들이 연나라 군사들에게 강제로 징집되지 않게 하려면 당분간 깊은 산속으로 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듣기에 태산 줄기에는 연나라 군사들의 징집을 피해 숨어든 고구려 유민들이 많다 들었습니다." - P115
"우회하지 말고 곧바로 태산으로 가자. 지금 아니면 언제 태산을 넘어보겠느냐?" 정작 담덕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바로 태산에 은거하고 있다는 고구려 유민 청년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전날 연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혀갈 뻔한 청년들이따라나섰다. - P116
"우와, 이건 황금이잖아?" "횡재했네." 이렇게 떠드는 졸개들 가운데는 저희들끼리만 의사소통을하기 위해 서로 눈짓을 해가며 고구려 말을 쓰는 자들이 있었다. 담덕은 그 말을 예사로 듣지 않았다. "이놈들이 수상하구나. 어찌하여 이런 좋은 말에 황금을 지니고 있는가?" - P119
고구려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우리가 아주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요. 우린 고구려 유민의 자손이오. 이번에 연나라 군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태산을 찾아온 것이오. 우리를 살리려다 부모가 모두 그들에게 살해당하였소. 그래서 고구려 유민들이 태산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숨겨둔 재산을다 털어 금덩이로 만들어 가지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오." 담덕의 말을 듣고 붉은 두건은 금세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고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 P119
두령은 담덕의 당돌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둑에게도 법도가 있다 들었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감춰진 재물을 알아내는 것을 성이라 하고, 잘 판단하는 것을 지라고 한다 했습니다. 또한 가장 먼저 앞장서 들어가는 것을용,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을 의, 훔친 물건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인이라 하였습니다. 아무리 산채라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손님을 홀대하는 것을 보니 판단하는 능력, 즉 지가 매우 부족한 듯 보입니다." 담덕의 말에 두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 P122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어디에서 읽었느냐?" 『장자』에 나오는 말 아닙니까?" 담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령은 뭔가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급히 졸개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여봐라! 어서 이 귀한 손님들의 포박을 풀어드려라." - P122
일찍부터 책을 많이 읽은 것 같군. 나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서당에서 학동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네 선비족들 등쌀에못 이겨 이곳으로 피신을 오긴 했지만…………" 두령은 잠시 말을 끊었다. "훈장님이셨군요. 이거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쓴 꼴이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아닐세. 『남화경』에 나오는 도둑의 도가 나이 어린 그대의입에서 나올 줄은 정말 몰랐네." 두령이 말하는 남화경』은 『장자』를 달리 부르는 책이었다 "어려서부터 경전을 좋아했습니다. 병법서도 좋아하여 두루섭렵하였지요." - P123
"근자에 이르러서는 어렵게 태공망의 『육도』를 구해 읽었습니다." "강태공의 병법서를? 그것은 좀처럼 구하기 힘든 책이라서아직 나도 구경조차 못했는데…두령은 놀라운 표정으로 담덕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담덕은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태공망의 『육도』필사본을 꺼내 두령에게 보여주었다. - P124
"산동에서 나는 술로, 이를 즉묵로주라고도 부른다네. 이은 수수로 담그는 고량주와 달리 차조를 재료로 쓰지 저ㅎ의 소흥에서는 황주라고 부르기도 한다네." - P125
당시 여러분들의 부모형제들이 저들의 포로가 되어 선비족의 도성으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노예로 팔리고, 성벽 쌓는 노역에 시달리는 등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조상들의 피를 이어받은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연나라에게 당한 치욕과 분노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지금전진의 부견에게 망했던 연나라가 재기를 했습니다. 모용황의아들 모용수가 선비족을 규합해 후연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숙적후연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 P127
더군다나 모용수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여러분과 같은 고구려 유민의 자제들을 징집해, 예전에 여러분의 부모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처럼 방패막이의 희생물로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고구려의 피를이어받은 여러분들이 태산회마령을 넘는 선량한 백성들의 주머니나 터는 좀도둑 노릇으로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 P127
그날 밤 담덕은 두령과 밤이 깊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령의 이름은 이정국이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즐겼으나 병법서를 더욱 가까이했습니다. 왕자님께서 거두어주신다면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될 때까지 멸사봉공으로 모시겠사옵니다." "이곳에서 이정국 선생을 만나다니, 나는 참으로 인복이 많은 사람이오. 더구나 산채의 장정들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선생께서 장정들을 설득하여 나와 함께 산동으로 갈 수 있도록 앞장서 주실 수 있겠는지요?" - P128
"고맙습니다. 내가 가지고 온 금덩어리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장정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도록 하십시오. 젊은이들이 당분간 집을 떠나 있으려면 저 금덩이들이 가족들 생계에 적잖은도움을 줄 것입니다." 담덕은 장안에서 조환과 손장무가 준 금덩어리의 쓰임새를비로소 찾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 P129
산채 식구들이 다 떠나고 나서, 담덕과 마동은 회마령을 넘어산동으로 향했다. 그들을 따라왔던 고구려 유민 마을 청년들도 산채 식구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이웃 마을 청장년들을 모집해 산동으로 오라고 다시 돌려보냈다. - P130
중원 서쪽 청해성에서 발원한 황하는 화북의 너른 들판을가로지르고 높은 산을 비껴 돌아 동쪽의 발해만에 닿으면서바다와 합류했다. 중원에서는 장강 다음으로 긴 강이었다. - P130
그들이 찾는 일목장군이 바로 해적들을 소탕하는 해룡부를 진두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선과 군선이 즐비하게 늘어선 해변이 잘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해룡부 지휘소가 있었다. 용이 그려진 수많은 깃발들이바닷바람을 맞아 세차게 펄럭이며 자못 그 위용을 자랑하고있었다. - P131
일목은 한눈에 보아도 담덕이 왕후를 닮았다는 것을 알 수있었다. 젊은 시절 홀로 가슴 태우며 연모했던 하연화, 그 우아한 모습은 그의 가슴에 화인처럼 뚜렷한 자국으로 아로새겨져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자신의 이름인 추수를 오래도록 잊고 지금까지 일목이란 이름으로 살아왔다. - P132
일목, 아니 추수는 평양성 전투 때 고국원왕을 옆에서 제대로 호위하지 못해 끝내 백제군의 독화살을 맞고 전사케 한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동안 누구에게도말 못하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손자인담덕을 보자 갑자기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어떤 울분의 덩어리 같은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 P133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목의 눈물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었다. 하나는 호위무사로서 고국원왕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불충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때 마음속 연인이었던 연화의 아들을 대하면서 어떤 회한 같은 감정이 묘하게뒤섞여 마음의 가닥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133
유청하 자신도 당시 큰 부상을 입고 쓰러졌는데, 해평의 무리들이 떠나고 나서 왕태제이련과 동궁빈 하씨가 무술도장으로 들이닥쳤을 때 발견되었다고 했다. 무술도장에서 살아남은장정들은 그를 포함해 겨우 세 명이었다. 그의 나머지 졸개들은 을두미처럼 해평의 무리들에게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 P135
"소장이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대왕 폐하와 왕후 전하께서 엄명을 내리셨기 때문이옵니다. 담덕 왕자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고는 죽을 수도 없는 몸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시며 소장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옵니다" - P135
일목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는데, 그러다 보니 이상한신음소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충은 수곡성 전투에서 왼팔을 자신은 평양성 전투에서 왼쪽 눈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이 추수라는 이름을 버리고 일목이 된 것처럼 두충도 본래 이름을 고쳐 조환으로 행세하고 있다니, 두 사람 다 묘하게도 엇비슷한 운명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 P136
국내성에는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알리지 마십시오 여기서 고구려 유민의 자제들을 기다려, 그들을 일당백의군사로 키운 다음 국내성으로 함께 갈 생각입니다. 어찌 그냥혼잣몸으로 가서 대왕 폐하와 왕후 전하를 뵈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불초한 자식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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