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는 케이시가 놀리는 것이 반가웠다. 집에서는, 특히 테드가같이 있으면, 요즘 케이시는 점점 더 정중한 예의범절로 넘어올수 없는 벽을 치고 숨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베이어드에서 만나니 그녀는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당돌한 소녀, 보고듣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재미를 느끼던 소녀로 되돌아간 것같았다. 심지어 걸음걸이에도 흥과 활력이 돌아온 것 같았다. - P114

한 달 동안 같이 살다 보니, 케이시는 집주인의 안전한 옷장 구성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탤보츠, L.L.빈, 랜즈 엔드, 바스 위준엘라는 사립학교를 졸업한 아름다운 수녀님처럼 옷을 입었다.  - P115

"너 향수 안 뿌리지?"
"응, 테드는 향수나 화장품을 좋아하지 않아."
"정말?" 케이시는 못 믿겠다는 듯 말했다. "넌 좋아하는데?"
엘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네가 좋아하는 향을 생각해봐."
엘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케이시는 손을 뻗어 엘라의 이마에작은 브이 자 모양으로 생긴 주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래마. 사빈이 주름살이 생기지 않도록 늘 의식하라고 가르쳐준 체스쳐였다. - P116

엘라에게는 잘 와닿지 않았지만, 흥미로웠다. "네가 하나 골라주면 어떨까. 향수 말이야."
"우린 드레스를 찾고 있잖아."
케이시는 점원으로 고객을 상대할 때짓는 깍듯하고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자기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발알려달라고 묻는 엘라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내가 누군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해줄수 있지?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멈췄다. - P117

엘라는 웃었다. "넌 어떤 드레스를 입고 싶어, 케이시?"
"결혼하는 건 내가 아니잖아."
"너도 결혼하고 싶어?"
케이시는 요점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엇나가는 대화가 짜증스러워 눈살을 찌푸렸다. 버지니아는 종종 케이시가 남자처럼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다. 여자들의 사고가 가지를 치며 뻗는다면 남자들은 나무둥치 같다는 것이 버지니아의 지론이었다. 엘라의 산만한 사고방식을 상대하고 있으려니 케이시는 자신이 한결 남자처럼 느껴졌다. - P118

엘라는 테드가 생일 선물로 사준 샤넬 핸드백의 금장 끈을 연신 꼬았다. 길고 흰 손가락이 퀼트 가죽 위에서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했다. 케이시는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엘라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 P119

정말 모든 것을 한데 그런 그녀가 자신이 결혼에 대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확신을 케이시에게서 얻으려고 한다. 아낌없이 주는 너그러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거의 탐욕스럽다고 해야 할 정도로 인정을 원하는 것 같았다. 내가 패자라는 게 이렇게 분명한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승자에게 그런 확신을 준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 P119

엘라는 혼자 웨딩드레스를골랐다. 케이시 본인이라면 같은 상황에서 혼자 고르는 것을 오히려 좋아했겠지만, 엘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엘라는 어머니도 없고 자매도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아버지와 테드지만, 그들은 여자들이 당연한 듯 서로 해주는 수많은 일들에서 무용지물일 것이다. 케이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속을 털어놓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뭔가를 부탁하는 사람은 더 적었다. - P119

자신이 자신감 있는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결혼 생각만 하면평소보다 한층 더 자신이 없어졌다. 평소 딸의 결정을 꺾는 법이없고 지금껏 그럴 필요도 없었던 아버지조차 약혼 기간을 길게두는 것이 어떠냐고 에둘러 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굳이 하지 않던 말을 케이시가 입 밖에 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엘라의 검고 예쁜 눈에 깊은 근심이 어린 것을 케이시가 못보고 넘어갈 리 없었다. - P120

한국인들에게는 매사가 그저 남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케이시의 인생은 여전히탈선 상태였다. 게다가 항상 제이가 그리웠다. 아침마다 그에게전화를 걸지 않으려고 자기 손을 묶고 싶을 정도였다. "고작 이정도가 뭐라고." - P122

케이시가 말이 없었던 것은 재주 부리는 푸들을 칭찬하듯 엘라를 향해 손뼉을 치고 있는 조운을 어떻게 해야 물러가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드레스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단지 다른 사람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 P123

엘라를 한층 나이들어 보이게 하고 활짝 핀 꽃봉오리 같은 생기를 빼앗는 스타일이었다. 독특한 데가 없고 전통적으로 우아한 드레스,
그레이스 켈리 같은 신부를 꿈꾸는 여자를 위한 값비싼 드레스였다. 그래, 나이가 더 많은 금발한테 더 잘 어울리겠군, 케이시는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P123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없었지만, 결혼식 날 여자는 자고로 희망 넘치고 앞날에 대한 축복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신부란 순수함 그 자체여야 한다. 성적으로 그렇지는 않더라도(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마다 엘라의 침실에서는 테드의 신음이 들려왔다), 최소한 낭만적으로는, 엘라는 흰 장미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다.  - P123

그날만은모든 여자들 중에서 단연 돋보여야 하는 동시에, 결혼식 날의 여느 신부들과 같아야 하는 것이다. 신부는 신랑에게 이상적인 존재재여야 하고, 드레스는 그의식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다. 안 그런가? 하지만 케이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엘라가 입을 드레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 P123

조운은 실수를 저질렀다. 케이시는 예리하게 관찰했다. 소매 판매업계의 금기 중에는 무슨 물건을 고를지 조언하기 위해 같이와 있는 고객의 배우자와 친구들의 의견이나 감정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 거래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운의 오만이었다. - P124

"조운" 케이시는 모음을 길게 두 음절로 발음했다.
점원은 눈을 굴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이런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반박하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엘라가 입어본 드레스 중 가장 비싼 것을 판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신부 쪽은 가격 때문에 후회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엘라의 드레스가 아니에요." 케이시는 말했다.
"무슨 말씀이시죠?" 조운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잖아요." 조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질수록,
케이시의 목소리는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저 옷을 입으니 얼마나 불행해 보이냐고요." - P125

하지만 사실 지금 이 드레스를 취소하려면 조운이 사방에 굽실거리며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 경우 굳이 신부 친구의 변덕으로 제작사를 열받게 할 필요는 없을것 같았다. 질투심 때문에 저러는 것이 분명하다. - P125

조운은 입씨름을 해봤자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희고 고른 이를 꾹 다문 입술 안에 숨긴 채 미소 지었다. 그리고케이시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신부의 친구는 3층 매장에서 판매하는 다음 시즌 옷을 입고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네덜란드 디자이너의 상품인 저 회색 치마만 700달러쯤 할 것이다. 때로 조운은 부자들이 미웠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으면서 불평이끊이지 않는다. 조운은 지옥의 존재를 믿었다. 정의라는 개념은근면한 중간계급인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다. - P126

그날 아침 케이시는 이런 식으로 평가받게 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옷을 갖춰 입었다. 엘라가 케이시에게 드레스를 같이 봐달라고 부탁한 순간, 이런 갈등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백화점 판매원들은 대체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속물들이다.  - P126

버지니아는 케이시가 옷차림에 유난을 떤다고 놀리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케이시는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반격했다. "그래서?
매장에 들어섰을 때 넌 일본인 관광객이나 유모, 우편 주문 신부,
손톱 미용사로 오해받지는 않잖아? 네가 뭘 안다고 그래?" 피부색이 진한 스웨덴 혼혈 미인처럼 보이는 버지니아는 다시는 그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 P126

케이시는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내 얼른 뒷면을 확인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베이어드에서 특별주문하는 상품이나 신부용품에 대해서는환불불가 조항이 없어요. 오랫동안 여기서 일하셨으니 알고 계실텐데요. 변덕이 심한 우리 여자들이 베이어드에서 웃돈을 줘가면서 쇼핑하는 이유는 어떤 경우든 구매를 취소할 수 있고, 마음을바꿀 수 있고, 최종적으로 선택한 물건에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요.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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