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은 티나를 향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배를 타고 떠나기전날 밤, 어머니는 내 외투안감에 금반지 스무 개를 손수 꿰매주셨다. 류머티즘 때문에 손이 퉁퉁 부어서 평소 바느질은 하녀들이 대신하곤 했는데도…………."자기 손이 있는 자리에 어머니의손이 대신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인지, 아버지는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쌌다. "돌아다니다가 흔들려도 소리가 나지 말라고 반지를 일일이 이불솜에 싸주셨어." 반지 하나를 팔 때마다 두꺼운 바늘로 외투 안감에 누벼진 하얀 이불용 실을 뜯어내던 순간을 떠올리며, 조셉은 어머니의 배려에 새삼 감복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  - P23

‘준오야, 필요할 때 이걸 하나씩꺼내 써라. 따뜻한 음식 든든하게 먹어야 해. 나중에 우리 아들돌아오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줄게." 누런 기가 도는 조셉의 흰자위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 P23

"진짜 직장에 다니든가." 아버지는 말했다. "로스쿨에 가든가.
모자 파는 일은 진짜 직장이라고 할 수 없어. 시급 8달러를 벌려고 8만 달러짜리 대학에 다니다니, 그보다 한심한 소리는 내 들어본 적이 없다. 기껏 졸업해서 머리핀이나 팔 생각이었으면 프린스턴은 왜 다녔냐?" - P26

내심 티나는 철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하나님이 길을 인도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혼전에 성관계를 갖지 않고 철의 마음이 식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가 정말 일생을 맡겨도 될 상대인지 알고 싶었다. 티나는 계시를 원했다. 지난 몇달동안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지만, 철에 대한 욕망만 끓어오를 뿐 아무 징표도 찾을 수가 없었다. - P25

 학과에서 일등을 해도 저 애는 집안이 보잘것없으니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이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이 어떤건지 아세요? 아버지가 세탁소를 한다고했더니 제가 무슨 더러운 빨랫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러서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말로는 동등하다는 사람들이 저를 마치 속에지저분한 것을 가득 채운 유리 인형처럼 바라보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아시겠어요? 짐작이나 가시냐고요."  - P27

대학에서 공부한 자식들이 언젠가 아버지보다 잘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셉은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자식이 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내려다보면서제 인생 경험이나 그간 겪은 고통, 세상을 보는 시각이 부모에게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이 이렇게 잔인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P29

그는 한국식 억양 때문에 뭉개지는 자신의 영어 발음을 의식했고, 아이들에게 집에서 항상 영어를 쓰도록 한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한 것은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미국인들 앞에서아버지처럼 멍청해보이지 말라고. 너무나 많은 것들이 후회스러웠다. - P29

케이시는 아버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망가진 게 아니에요.
쟤도요." 케이시는 티나를 가리켰다. "잘못 큰 게 아닌데 자꾸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정말이지 넌더리가 나요. 아버지야말로우리 같은 자식을 낳아서 복권당첨된 줄 아셔야 해요. 왜 자꾸우리가 잘못 컸다는 거예요? 도대체 왜 이정도면 괜찮다고 할 때가 없는 거냐고요? 집어치우라고요. 닥치라고요." 그녀는 마지막말을 조용히 내뱉었다. - P35

케이시는 즐겨 하던 옥상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규칙은없고 단 하나의 목표만 있는 게임이었다. 창문을 하나 고른 뒤, 그안에 보이는 물건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케이시는 한 사람이 지닌 소지품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 P41

덕트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격자무늬 안락의자는 거기 앉은 남자가 빈털터리라는사실을 말해준다. 금칠한 거울 틀은 아직 바래지 않은 여자의 왕족 같은 영혼을 비춰준다. 부엌 싱크대위에 놓인, 저가 브랜드 오트밀 포장지는 은퇴한 노인의 주머니에 돈이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P41

케이시의 첫 신용카드는 한도가 5,000달러였다. 항공권은 얼마나 할까? 이탈리아에서 산다니 멋있고 흥미진진할 것 같았지만,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라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 P43

"예전에 너한테 빚진 것도 아직 못 갚았는데." 케이시가 말했다.
4년 전, 티나는 그동안 저축한 돈을 털어 케이시의 낙태 비용을댔다. 제이를 만나기 전, 케이시는 이름과 전화번호조차 남기지않은 상대와 하룻밤 불장난을 벌이고 덜컥 임신했다.  - P44

"알아." 티나는 말했다. 그것은 일종의 법률이었다. 둘 중 누구라도 집에 백인남자친구를 데려왔다가는 집에서 쫓겨난다. 둘다 한국인과 결혼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한국인 남자들이 한 씨네 자매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49

 그녀는 지금까지 여덟 명의 남자와 잤고, 모두 다 사귀는 사이조차 아니었으며, 그중 일곱 명과는 열아홉살 이전에 잤다. 프린스턴에는 서른 명에서 마흔 명의 파트너를 경험한 여자도 있었고(그런 애들은 일기장에 적기도 하고 순위를 매기기도 했다), 단 한 명의 진정한 연인을 찾은 여자도 있었다. 물론 티나 같은 사람, 마지막까지 버티는 애들도 있다. - P51

"성스러운 서약 같은 거?" 케이시는 그 말이 거의 혐오스럽기라도 한 듯 육체적으로 움찔했다. "아, 제발, 티나 정신차려. 넌 스무 살이야. 지금 결혼 같은 걸 할 수는 없잖아. 그가 침대에서 형편없으면 어쩔 거야? 정말 웃긴 것이라고. 앞으로 50년 동안 부부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아니지, 요즘 과학의 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70년이 될 수도 있어. 어쩔 거야?" - P55

 "미안해. 내 말은, 사랑을 하려면,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는 거야." - P56

 하지만 케이시는 아버지에게 맞는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미국에서는 부모가체벌하는 것을 학교에서 알게 되면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다고그녀와 티나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그래서 자매는 아무에게도 그일에 대해 입을 열지않았다. 자라면서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부모님이 언제까지나 제자리에서 맴도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 P61

길거리에 나서면 리아는 늘 어딘가 겁먹은 표정이었고, 세탁소 손님들은 부모님을 바보 취급했다. 손님들은 열심히 일하는 부부가다른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읽고 쓸 줄 안다는 사실을 굳이알려 하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을 지켜봐온 케이시와 티나는 리아와 조셉의 행동이 자식을 위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다. 부모님의 행동이 오해받을까봐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제이는 케이시의 부모님이 편견을 갖고 있다고 단정했다. "나에 대해 네가 침묵하는 것 자체가 그분들의 인종주의에 공모하는 행위야."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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