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도 잠깐 나왔지만 내수사에 관련된 비용도 적지 않았다" 연산군이 말한 대로 내수사는 국왕의 개인적인 용도와 궁궐의 사무에 쓸 수있는 재원이었다(3.7.17 병진). 그러나 당시 내수사의 재정과 기구는 다른시기보다 분명히 팽창했다고 판단된다.  - P183

연산군대 공납이 확대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재위 7년 이른바 ‘신유공안을 제정한 일이었다. 연산군은 그해 4월 공안상정 두을어 좌의정 성준, 광원군이극돈, 이조판서 강구손, 공조참판 이계남등에게 일을 맡겼다(7.4.14 임진). 상정청에서는 석 달 뒤 대폭 확대된 공안을 보고했으며 그 내용은 그대로 시행되었다(7.7.17갑자). - P184

이이조헌·박동량,송시열,정약용 등  중 · 후기의 저명한 지식인들은 모두 연산군 때 궁궐의 사치와 민생의 부담이 폭증한 결정적인 원인으로 이 ‘신유공안‘을 지적하면서 강력히 비판했다(아울러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감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계속 상당한 폐단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P184

그러므로 논리로만 접근한다면, 연산군의 사치는 그 자체로 그렇게 핵심적이며 심각한 폐단이 아닐 수도 있었다(뒤에서 살펴볼 다른 유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부분의 폭군처럼 그는 사치와 유희의 필연적인 반작용이라고 할 만한 정사의 태만에 빠져들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바로 이것이 본질과 비본질을 혼동하거나 우선순위를 뒤바꾼 결정적인 과오였다. - P185

사치와 관련된 욕망을 채워나간 연산군은 사냥, 연회 · 음행 같은다양한 유희에도 큰 관심과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 그는 사냥과 연회를중대한 일‘이라고 부르면서 조참과 경연을 중지했다(3.2.13을유).한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이런 유희를 은밀하고 단독으로 즐기는 데 대단히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 P185

연산군은 사계절마다  사냥하는 까닭은 모두 백성을 위해 해로운 것을 없애려는 목적이며 (49.11병) 사냥은 군사 훈련의 일종이지 유희가 아니므로 (4.11.15자) 흉년에도 그만둘 수 없다는 수긍하기 어려운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강변했다(9.9.20계미). - P186

사냥에 관련된 연산군의 의지는사냥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면 판서라도 용서치 않겠다고 천명할 정도로 강력했다(9.10.17경술), - P188

"이런 행동과 의지에 따라 사냥에 관련된 관서가 확대되는 것은 논리적인 수순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은 창덕궁 안에 설치된 내용방이었다. 응방은 원래 연산군 3년 2월 대비전에 신선한 물품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다시 설치되었다(3.2.12갑신) - P188

응방에서는 그 이름대로 사냥에서 사용할 매를 주로 길렀지만, 그밖에도 국왕의 기호나 용도에 따라 다양한 짐승을 사육했다.  - P188

꼭 연회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재위 중반에 접어들면서 국왕이 관심을 보인 유흥은 나례였다. 그는 나례가 매우 잡스러운 놀이이기는였다.
하지만 볼만하다면서 뛰어난 배우들을 물색하라고 지시했다 - P190

대간의 강청으로 술을 금지했지만 궁궐에서 음탕하게 즐기는 행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는 기록(9.2.11무신)이 보여주듯이 연회는 자연스럽게 음행으로 이어졌다. 연산군의 음행 또한 그 단초는 상당히 일찍부터드러났지만 재위 8~9년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 시작은 암 . 수말이 교섭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엽기적인 관음이었다.  - P192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이 음행을 본격적으로 자행하기 시작한 때는 재위 9년 중반이었다. 9년 6월 13일(무신) 연산군은 정원에 가서 여승들을 겁탈했는데, 『연산군일기」는 그것이 색욕을 마음대로푼 시초라고 썼다.  - P193

그러나 같은 해 2월 늙었으되 병이 없는 백마를 내수사로 보내라고 명령했는데, 백마고기가 양기를 돕기 때문이었다는 기사(9.2.8을사)로 미루어볼때음행과 관련된 문제는 그 이전부터 불거지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후술하듯이 갑자사화 이후흥청등과 관련해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국왕은 자신이 접촉할 수 있는 여성의 숫자를 늘려갔다. 우선 시녀들의 숫자를 확충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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