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회 이후 일단 심사가 상당히 순치됨으로써 그동안 그들의 반대로 행동을 제약받아온 국왕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구상을 한결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유례없는 파국인갑자사화였다는 점에서 그런 실천의 과정과 방법은 순조롭지도 정당하지도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국왕의 일탈이었다. - P177

재위 중반 강력해진 왕권을 갖게 된 국왕이 그런 권력을 가장 집중적으로 행사한 분야는 정치나 제도의 개혁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치 · 사냥·연회·음행 같은 비정치적이며 비본질적인 사안들이었다.  - P177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연산군은 후자와 관련된 자신의 욕망을 제한 없이 실현하는 것이 바로 능상의 척결을 통한 전제적인 왕권의 행사라는자신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는 관건이라고 판단했다.  - P177

 지역과 시대를막론하고 대부분 그렇지만, 뛰어난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본질적 사안과 비본질적 사안을 정확히 구분해 인력과 재원을 효과적으로 집중시키는 능력이라고 한다면이런 중대한 판단 착오는 연산군을 폭군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핵심적인 논거가 될 것이다. - P177

관계는 대신과 삼사가 가까워지고 국왕이 고립되는 형태로 변모해갔다.
제한적이며 상징적인 공격이었던 무오사화와 달리 갑자사화가 대신과삼사를 아우른 신하 대부분에 대한 국왕의 무차별적인 숙청으로 귀결된까닭은 이런 정치적 지형의 재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 P178

방금 지적했듯이 치세 중반 이후 연산군은 자신의 왕권을 점차 자의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가 걸었던 길은 유사 이래 대부분의 폭군이 밟았던 경로와 비슷했다. 그는 진상을 증가시켜 사치에 탐닉했고,
사냥 · 연회 · 음행 같은 유희에 몰두했으며, 당연히 정무에는 그만큼 소홀해졌다.  - P178

홀해졌다. 이런 문제들은 대체로 재위 8~9년부터 본격화되었다가 갑자사화 이후는 그야말로 황음의 수준으로 증폭되어 폐위될 때까지 지속되는 흐름을 보였다. 이것들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궁극적으로 국가 경제의 파탄을 가져왔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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