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화와 연관된 부분으로 논의를 좁히면, 우선 ‘사림 세력‘의 종장으로 평가되는 김종직의 정치적 행보와 경제적 상황, 사상적 지향,
문학적 태도 등 여러 실질적인 면모가 ‘훈구 세력‘ 과 더욱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김종직의 문집이 처음 간행되었을 때는 한명회 등 훈구대신들을 칭송하는글들이 실려 있었지만 후대에는 그것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이다.  - P172

이처럼 치밀하고 정교한 정치적 고려와 행동을 구사한 기화 세력은이 사화를 전면적인 숙청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제한적이며 상징적인 경고로 마무리했다. 물론 그런 경고의 궁극적인 대상은 이 사건의 심층적이며 본질적인 원인인 삼사였다.  - P173

삼사의 그릇되고 과도한 언론활동을교정해야 한다는 공통된 목표 아래 서로 제휴한 국왕과 대신들은 이로써 의미 있는 일차적 성과를 거두었다.  - P173

그러나 국왕과 신하라는 본질적차이상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삼사를일단 제압한 연산군이 개인의 성향을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그 괴리는 더욱 커졌고, 정치 세력의 상호관계와 정국의 전개 양상도 크게 변화했다. 이런 과정의 최종 결과는 갑자사화라는 더 큰 파국이었다. - P173

무오사화 이후 중앙 정치 세력의 위상과 관계가 변화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는 삼사가 상당히 위축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국왕과 대신의 권력이 그만큼 팽창하고 자유로워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 P176

‘ 사화 직후 "지금 관대한 은혜를 베푼 조처에 대해감히 그르다고 하는 자는 가만두지 않고 반드시 처벌하겠다"고 연산군이 호언하자 지평 정인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갔다거나 (4.7.29계해), 이처럼 국왕이 대간을 날로 심하게 제압하자 모두 그 관서에 임명되기를 꺼려 결국 유순하고 나약한 성품을 가진 김영정金永貞이 대사헌에 발탁되었다는 기사(4.11.10임인)는 그런 정황을 잘 보여준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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