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은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우선 김종직의 문집과 그 판본을 전국에서 수거해 소각했다(4.7.17 신해). 특히 중앙에서는 조정 관원들이 갖고있던 김종직의 문집을 모두 압수해 궁궐의 뜰에 죄수들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의식‘이 거행됐다(4.7.22병진 · 23정사) - P160

연루자들의 형량은 곧 결정되었다(4.7.26경신), 대상은 모두 52명이었는데, 사형 6명(11.5퍼센트), 유배 31명(59.6퍼센트), 파직.좌천 등이 15명(28.8퍼센트)으로 분류되었다. - P160

앞서 말한 대로, 이 사화가 상당히 제한적인 숙청을 통해 배후의 전체에게상징적인 경고를 보내려는 심층적 의도를 지닌 사건이었다는 판단의 중요한 논거가 될 것이다. - P161

피화인들의 구성 또한 유의할 만하다. 그들 중에서 김종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은 24명(46.2퍼센트)으로 절반에 약간 못 미쳤으며,
나머지는 언관(9명, 17.3퍼센트)이나 실록의 편찬에 관련된 부류(8명, 15.4퍼센트), 또는 대신과 종친들이었다(11명, 21.2퍼센트, 대신에는 안침 · 어세겸 · 유순 · 윤효손·이극돈 · 홍귀달 등이 포함되었다. 이 사화의 주요한 기화자로 평가되는 이극돈도 파직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 P161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연산군은 자신의 치세에 발생한 첫 옥사를엄중한 경고의 표시로 삼으려고 했다. 그는 이런 죄악은 발설하기조차어려우니 통렬히 다스려 뒷사람들이 경계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김일손등을 벨 때는 모든 신하들이 가서 보게 하되, 보기를 꺼려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을 가리거나 불참하는 자는 적발해 엄중히 다스리겠다고 밝혔다(4.7.26 경신). - P161

즉위 직후부터 삼사와 끊임없이 충돌해온 연산군은 재위 4년에 접어들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강하게 토로했다. "대간의 의견만 따르면 권력이 그들에게 귀속되어 나라의 위망이 즉시 이를 것이다(4.2.11정축)." 이런 인식의 결과 국왕은 "신하가 임금을 이기려는 풍조가 이미 이뤄졌다"고 판단하게 되었고(4.6.1병인), 꼭 한 달 뒤 주요 대신들과 함께 옥사를 일으킨 것이었다. - P165

개괄하면 대체로 전근대에는 붕당을 결성해 역사와 현실에 역모적불만을 공유하고 표출했던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국왕과 주요 대신들이숙청한 사건으로 파악되었다. ‘사화라는 명명이 보여주듯, 그때 지적된 옥사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온한 사초였다. - P165

현대의 심화된 연구들은 이 사건의 내면을 좀더 깊이 있게 분석했다. 한국사의 중요한 통설을 형성하고 있는 그 이론은 기화의 주역들을
‘훈구 세력‘으로 파악하고 김종직 일파를 그들과 정치·경제·사회·사상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상반된 배경을 갖고 새로이 대두한 사림 세력‘으로 평가하면서, 이 사건의 본질은 그런 상반된 두 정치 세력의 충돌이었다고 해석했다." - P165

이런 전통적 견해와 현대적 해석은 모두 경청할 만하며, 사건의 본질에 다가간 측면도 많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사건의 좀더 근본적인요인과 결과는 언론기관의 활동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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