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서도 느낄 수 있지만, 실제로 김일손의 사초는 단종 · 사육신·소릉 같은 중대한 정치적 사안부터 홀로 된 며느리를 취하려는 패륜에가까운 세조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대단히 민감한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었다. 연산군은 그 까닭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 P147

김일손은 자신이 반심을 품은 것은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문제된 내용은 이런저런 사람들에게서 들었거나 자신의 소박한 판단에 따라 작성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정보를 제공했다고 김일손이 지목한 인물들은 그런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자신들의 말을김일손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켰다고 반박했다(1.7.12병오 13정미). 사실은 쉽게 확인되지 않았고, 책임의 소재는 혼미해졌다.
- P148

그동안 거의 모든 논란의 핵심에 서왔던 삼사가 등장한 시점은 이때였다. 이번에도 그들의 논점은 국왕의 판단과 상당히 어긋났다. 홍문관과 예문관은 사초의 내용보다는 국왕이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 된다는원칙을 좀더 중시한 것이었다.  - P148

사화는 김일손의 사초에 담긴 불온한 내용의 출처를 규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확대되었다(이하의 내용은 4.7.14 무신), 국왕과 주요 대신들은 사초에 연루된 인물들의 집을 수색해 증거를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이목의 집에서 나왔다.  - P149

그것은 임사홍의 넷째 아들 임희재가 이목에게 보낸 편지였다. 방금 보았듯이 이목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성중엄이 당황하자 그것을 실록에서 누락해서는 안된다고 엄중히 경고한, 그러니까 김일손에게 매우 공감하는 자세를 보인 인물이었다. 또한 앞서도 서술했듯이 그는 성종 23년 12월 영의정윤필상을 간귀라고 지목하고 연산군 1년에는 노사신을 국왕을 우롱하는대신으로 비판한 인물이었다. - P149

 "이제 군소배가 붕당을 만들어 재상과 국를 비판하니 통렬히 징계해 그 풍습을 개혁하라." 즉 국왕은 이 사건이 김일손이라는 개인의 사초에서 발원한 고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와 교유한 일군의 집단이 붕당을 결성해 국사와 재상을 비판한 조직적인 범죄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연관의 혐의를 그동안 자신의 가장 큰 정치적 걸림돌이었던 삼사까지 확장했다. " - P150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붕당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지적하지만, 사화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삼사가 붕당에 관련되었다는 의심도 점차 짙어지고 있다는 이런 측면은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 P150

이때 유일하게 반대한 대신은 노사신이었다. 그는 "송대에소동파의 시에 풍자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축출하니가 비판했다"면서 처벌을 확대하는 데 반대했다. 그 뒤에도 동일하게견지되지만, 노사신의 이런 태도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는 사초에서 발단된 사화가 전개되면서 그 숙청 대상 또한 서서히 확대되거나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거기에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 P150

그들은 이 사건을 일군의 집단이 붕당을 결성해 국사와 재상을 비난한 범죄로 파악했다. 나아가 더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되는데, 거기에 삼사가 관련되어 있다는 판단도조금씩 구체화되어갔다. 이제 조선 최초의 사화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그 계기는 유명한 조의제문의 발견과 해석이었다. - P151

그 임무를 수행한 사람은 유자광이었다. 그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발견한 뒤 구절마다 풀이해 이런 부도 한 말을 한 사람을 법에 따라 처벌하고 그 문집과 판본을 소각하며 간행한 사람까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P151

연산군일기는 유자광의 동기와 역할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일찍이 성종 때 유자광은 김종직과 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된문제를 상의하자 그 사건의 함의를 누구보다도 민첩하게 감지해 사건의확대를 주도했다는 것이었다. - P154

유자광은 "지금은 조정을 개혁하는 시기니 크게 처벌해야지 심상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의 의지를 요약하면서 사건의 확대와 엄벌을 주도했다. 그는 국왕의 전교를 직접 작성하려고 나섰으며 의금부보다 옥사를 힘써 주장했다 4.7.15기유 · 18일자).6그러나 사건은 자신의 의도대로 전개되지 않았고, 유자광은 매우 답답해했다. 그때 그가 발견한 돌파구가 바로 「조의제문」이었던 것이다. - P154

이로써 그동안 다소 혼미했던 사건의 진상은 분명해졌다. 이 사건은김종직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일군의 집단이 스승의 불온한 생각을 이어받아 그들 내부에서 교류하고 확대함으로써 역사와 현실을 부정한 범죄로 규정된 것이었다. 이제 필요한 일은 그 교유의 범위, 즉 붕당의 구성원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 P155

문제였다. 「조의제문이 발견되어 그 함의가 해석된 뒤 정문형 · 한치례 · 이극균등 거의 모든 신하들은 김종직이 지극히 부도하므로 부관참시의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 P157

이것은 이 사화에서 삼사가 직접 처벌된 최초의 사례라는 측면에서매우 주목할 만하다. 나흘전 실록의 열람에 반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이때도 대간은 이미 사망한 사람이므로 극한의 추죄罪는 불필요하다는원칙론적인 입장을 제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바로 그런 태도를 삼사가 김종직 일파와 붕당으로 연결되어 비호하려는 확증으로 파악했다. - P158

이 사건을 계기로 사화의 주요한 처벌 대상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부류로 좁혀졌다.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서로 붕당을 맺어 그릇된발언과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 P159

나아가 국왕은 국무에 관련된 발언과 기록 전체를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동안 그가 가장 불만스러워했고, 따라서 가장 이루고 싶어한 목표는 아마도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연산군은 승정원에서 출납하는공사를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승지들에게 하교했으며, 기록을 맡은주서청에는 조정 관원들이 번잡하게 출입해 모든 공사를 알게 되니앞으로는 출입을 금지시키라고 지시했다.  - P159

사관은 이 조처가 나랏일을비판한 김일손의 행태를 연산군이 대단히 싫어했고, 외부인들이 김일손에 관련된 일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4.7.26경신).
- P159

요컨대 김일손과 김종직의 불온한 문서에서 촉발된 사화에는 삼사도 적지 않게 연루된 것이었다. 전자의 죄목은 사제관계를 매개로 현실과 역사에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고, 후자는 그런 그들과 붕당을맺어 비호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붕당과 능상이었다.  - P160

국왕은 이 사화를 계기로 삼사의 행동을 교정하고 새로운 선발지침을 하교함으로써 그동안 가장 불만스러웠던 집단을 자신의 의도와부합되게 바꾸려고 시도했다. 이런 측면은 사화의 마지막 단계인 연루자들의 처벌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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