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논란은 돌발적인 사건으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 계기는천변이었다. 재위 3년 6월 27일(정유) 밤에 선정전기둥에 벼락이 치자 연산군은 그 연유를 신하들에게 물었고, 경연 참석과 공신 가자 문제가 그 원인이라는 답변을 얻자 즉시 회수하라고 지시한 것이다(3.6.28무술)85 - P141

이처럼 치열한 갈등과 대립을 거치면서 연산군은 삼사를 중심으로한 신하들에게 능상의 폐해가 점차 만연하고 있다는 판단을 굳혀갔다.
앞서 대신들도 삼사를 두려워한다고 비판했지만, 이제 그는 국왕의 직속관서인 승정원도 "대간을 무척 겁내(3.7.22신유)" 그들에게 동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 P141

나아가 연산군은 성종 후반 이후 삼사의 하나로 자리를 굳힌 홍문관의 언론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 P142

 국왕은 삼사의 언론을 계속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강력히 경고했지만, 삼사는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삼사는 대신을 극단적인 표현으로 탄핵했고, 대신들은 점차 위축되어갔다. 연산군대 최초의 커다란 정치적 파국인 무오사화는 이런 상황적 맥락에서 발발한 것이었다. - P143

무오사화는 그 처벌 대상과 지속 기간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매우 제한된 규모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대규모의 전면적인 숙청이 아니었으며, 그런 파국을 감행하기에 앞서일단 소수의 핵심 인물들을 처벌함으로써 그 배후의 전체에게 경고하려는 상징적이며 심층적인 의도를 지닌 정치적인 사건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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