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의 반대로 정승의 임명을 철회한 것은 연산군 초반 정치 세력의 권력관계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 P114

며칠 뒤 장령 이수공은 좀더 직설적인 표현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삼공은 음양을 섭리하고 그 아래인 찬성은 교화를 넓혀야 하는데, 지금은 모두 사람답지 않기때문에 재변이 나타난 것입니다.
(8.1.25 정묘)"61"사람답지 않다"는 신랄한 표현이 담긴 이 상소의 여파는.매우 컸다.  - P114

직접 지목된 삼정승과 좌·우찬성 이극돈. 성준은 물론 좌참찬 유지, 예판박안성병판 노공필盧公弼, 형판 박건, 공판 신준호판 이세좌 등 의정부와 육조의 거의 모든 대신들이 장령 한 사람의 탄핵으로 즉각 사직한 것이었다(3.1.25 정묘.26무진 · 27기사), - P114

능력부족과 남용 등의 다양한 혐의로 탄핵되었다. 이 상소에 대해 연산군은 마치 털을 불어가며 흠집을 찾는 것과 같으며 국왕을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진노했지만, 지목된 대신들은 이번에도 즉각 사직했다(3.2.14병술~16무자 · 19신료), - P116

가장 중요한 권력의 하나인 인사권을 계속 문제 삼는 삼사의 언론에국왕은 강경하게 맞섰다. 그는 "대간의 말 때문에 육경을 모두 바꾸다면 권세가 대간에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대들을 삼공에 제수해야하느냐"고 반문하면서 "너희는 자질구레한 문서 업무나 처리하는 관리라고 질타했다(3.2.19신묘). - P116

영의정 노사신은 본관이 경기도 교하로 명망 있는 가문의 추세였다. 그의 조부는 세종 때 우의정을 역임한 노한이고, 아버지는 역시 세종 때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물재였다영의정이라는 관직
이 보여주듯이, 노사신의 이력은 이런 훌륭한 선조들을 능가했다.  - P118

그는단종 1년(1453) 급제한 뒤 집현전 박사를 거쳐 세조대에는 부수찬·용교 · 지평 · 도승지 · 직제학 · 호조판서 등 삼사와 승정원·육조의 요직을 섭렵했으며, 성종대에는 좌·우찬성을 역임하고 정승좌의정의 반열에 올랐다. 그동안 공신에도 두 번이나 책봉되었다(익대3등 · 좌리2등).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그는 성종 때의 관직을 그대로 유지해 좌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 P118

그는 삼사를 누구보다도 직설적으로 비판했고, 당연히 삼사의 격렬하고 집요한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그와 삼사의 발언과 행동은 무오사화라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의 원인과 본질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이므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P119

결국 연산군은 대간을 하옥하라고 명령했는데,
를노사신은 그런 지시를 위엄 있는 결단칭송한 것이었다.
요즘 대간은 작은 일이라도 이기는 데 힘써 몇 달 동안 주상과 논쟁을 벌이니, 자신들이 이긴 뒤라야 그만둘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 폐단은 점차주상의 위엄이 떨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므로 신은 그것을 항상 근심했지만 폐단을 고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최근 대간이 왕명을 거역했으니하옥하라는 주상의 하교를 받고 신은 마음속으로 "이것은 참으로 영주의위엄 있는 결단"이라고 생각해 기뻐 경하할 겨를도 부족했는데,  - P122

삼사는 당연히 노사신을 강력하게 탄핵했다. 노사신은 즉각 사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좀더 자세하고 명확하게 피력했다.
생각건대 선유께서는 "정권은 하루라도 조정에 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조정에 있지 않으면 대각에 있고, 대각에 있지 않으면 궁위宮에 있게된다. 정권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대간에 있으면 어지러워지며, 궁위에 있으면 멸망하게 된다. 국가의 치란과 흥망은 모두 여기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P123

대간이 말하면 홍문관이 뒤를 잇고, 홍문관이 말하면 태학생이 뒤를 이어서로 화답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흠 없는 데서 흠을 찾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만들어내어 남이 혹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면 그때마다논박해 갖은 수단으로 비판하니 공경대부가 그들의 입을 두려워해 감히가부의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융성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며 조정의 큰 체통이라고 하겠습니까. - P124

이런 습속은 예전에도 없었고 우리 조정에서도 없었습니다. 이런 습속이그치지 않아 권력이 대각으로 돌아가 대신들이 입을 다물게 된다면 조정의일이 어찌 한심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노신은 최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를까 항상 걱정해 "이 폐단은 신하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현명한 군주가 뜻을 둔 뒤에라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1.7.19경자)  - P124

그러니까 노사신은 대간을 하옥시키라는 왕명을 "영주의 위엄 있는 결단"이라고 상찬하는 강경한 발언을 천명한 지 다섯 달 만에 거의 모든공직에서 물러난 것이었다.
자신들을 정면으로 비판한 최고의 대신을 끈질긴 탄핵 끝에 체직시킨 이 사건은 연산군 초반의 정치적 갈등에서 삼사가 거둔 중요한 승리였다. 이로써 정치적 정립 구도에서 삼사의 영향력은 더욱 팽창했다. 반면 국왕과 대신의 입지는 그만큼 축소되었지만 삼사에 대한 위구심또한 그만큼 더욱 커졌다. 이런 정황은 무오사화의 원인과 본질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 P126

사안은 앞서 서술한 폐비의 추숭 문제였다. 이번에도 노사신은 생모의 추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연산군의 의도에 찬성했다. 삼사는두 달 넘게 노사신의 국문을 요청했으며, 거부되자 사직했다(2.6.10을유~19갑오 · 29갑진: 2.7.1병오~21병인; 2.8.3정축·5기묘. 8임오. 19계사 · 20갑오. 22병신) 노사신도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2.8.25기), 이 문제는 어느 한쪽의 의견이관철되지 않은 채 일단락되었다. - P127

그 뒤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인사와 관련된 문제가 몇 차례불거졌다. 우선 아들 노공필과의 상피 문제였다.  - P127

연산군 2년 후반 노사신은 사복시와 군기시 제조를 겸직했는데(이런 사실도 노사신의 위상과그에 대한 국왕의 신뢰를 보여준다), 노공필이 병조판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삼사는 부자가 서로 관련 있는 관서에 재직하고 있으므로 어느 한 사람이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타당성이 일부 인정되어 노사신은군기시 제조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11.20계해 · 23병인 · 24 정묘.26기사). 삼사는 사복시 제조에서도 퇴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연산군은 선례가 없다면서 윤허하지 않았다(2.11.27 경오 28 신미: 2.12.8 신사. 9임오. 11갑신 ㆍ12월유). - P127

이처럼 연산군이 즉위한 직후부터 거의 4년 동안 노사신과 삼사는여러 사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한 것이었다. 그 결과 서로의 감정이 매우악화된 것은 당연했다. 삼사는 국왕이 자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모두 노사신이 그렇게 이끈 결과라고 지목했다(3.7.18정사),  - P128

삼사의 이런 판단은 극단적인 증오로 격화되었다. 그것을 가장 섬뜩하게보여주는 사례는 연산군 3년 7월 21일(경신) 정언조순舜(1467~1529)의 발언일 것이다. 그는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말했다. - P128

30세의 정언(정품)이 70세의 전직 영의정에게 투사한 이 표현은 그런 의지의 진실성이나 수사의 적절성을 떠나 대신과 삼사의 관계가 거의 치유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연산군 4년 7월의 무오사화를 꼭 1년 남겨둔 시점에서 대신과 삼사의 관계가 이런 상태였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 P128

노사신과 관련해서 추가로 언급하고 싶은 사항이 두 가지 있다. 모두 삼사의 기능에 관련된 것인데, 우선 지금까지 노사신은 삼사의 월권적 언론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판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정당한 활동을 말살하거나 탄압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삼사의정당한 활동과 월권적 언론의 경계 자체가 모호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 P129

직제학 표연말이 인정했듯이 노사신은 성종이 대간을 처벌하라고명령하면 항상 힘써 그들을 구원해왔다(1.7.20신축). 또한 이후 무오사화와관련해서 좀더 자세하게 서술하겠지만, 그는 그 사건을 기화로 ‘청의하는 선비‘ 들을 붕당으로 몰아 완전히 제압하려던 일부 대신들의 의도에 반대해 그들을 구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9.6신축). - P129

즉 노사신은 성종 때만 해도 삼사의 언론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으며, 무오사화가 김종직·김일손 일파를 넘어 삼사와 동일시될 수 있는 ‘청의하는 선비‘ 들을 숙청하려는 사건으로 번지자 그런 흐름을 가장 앞장서서 방어한 대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칙에 입각한 균형적 태도를 지녔던 그가 연산군 초반 삼사와 전면적으로 충돌한 데는 삼사의 언론권이 과도하게 팽창함으로써 정치적 정립 구도를 훼손한 상황에 좀더많은 원인이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P129

노사신을 둘러싼 논쟁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례는 이런 판단을 보강해주는 흥미로운 논거로 생각된다. 삼사가 노사신을 격렬히 탄핵하던재위 1년 8월 9일(기미) 연산군은 대간을 전면적으로 교체했다. 이 인사이동의 의도는 자명했다. 즉 대간을 대폭 교체해 노사신을 탄핵하는 국면을 바꿔보려는 것이었다.  - P130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좌찬성 한치형과 특진관 이집을 각각 겸대사헌과 겸대사간이라는 이례적인 관직에 제수한 것이다. 이 조처의 목적 또한 명확했다. 국왕은 그동안 자신과 노사신에게 협조적이었던 대신들을 대간의 수장에 임명함으로써 대간을 통제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 P130

이 사례는 해당 관직의 고유한 임무가 각 관원의 개별적인 성향이나 배경보다 일차적인 규정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하고 흥미로운 논거라고 생각한다.
- P131

요컨대 노사신과 삼사의 충돌은 연산군대 초반 치열하게 진행된 대신과 삼사의 대립에서 가장 첨예한 국면을 형성했다. 대신을 대표하는영의정으로서 노사신은 삼사를 하옥하라는 국왕의 지시를 "영주의 위엄있는 결단"이라고 칭송했으며, 삼사가 서로 연합해 대신의 사소한 잘못을 집요하게 탄핵하는 행위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와 국왕은 권력이 대간으로 귀속되는 현상이 나라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가장 커다란 폐단이라는 데 공감했다. - P131

더욱 심각하고 본질적이었다. 그는 삼사의 언론활동을 당시의 가장 커다란 폐단인 ‘상‘으로 규정하면서 그 풍조의 뿌리는 성종대에서 뻗어나왔다고 진단했으며, 일부 대신들의 동의와 협력을 얻어 그 현상을 일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런 첫 번째 사건은 바로 무오사화였다.  - P131

성종대의 정치적 변화와 발전은 조선전기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 핵심적인 사항은 삼사의 위상이 크게 제고됨으로써 국왕·대신 · 삼사의 정치적 정립 구도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구동을 시작했다는것이었다.
- P132

그러나 연산군은 바로 이런 현상을 심각한 폐단이자 퇴보로 판단했다. 그런 판단은 그의 지상 목표였던 왕권의 지고한 권위와 자유로운 행사에 삼사가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 P132

왕권의 상징적인 권위와 실제적인 권력을 최대화시키는 것은 모든 국왕들의 공통된 욕망이기도 했지만, 그런 목표에 대한 연산군의 생각과 행동은 특별히 근본적이고 과격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성종대에 증폭된 삼사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매진한 것은 매우논리적인 결과였다. - P132

물론 신하들도 성종을 훌륭한 군주로 칭송했다. 특히 삼사에게 성종은 이상에 가까운 국왕이었고, 그의 시정은 후대의 임금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중요한 모범이었다. 삼사는 연산군에게 모든 일에서 성종을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누차 간언했다(1.7.23갑진; 2.3.4임오; 3.5.23갑자).  - P133

그 핵심적 덕목은, 예상할 수 있듯이, 너그러운 납간이었다. 우선 성종 자신부터 그런 태도를 적극적으로 밝혔다. 삼사의 회고에 따르면 성종은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이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는 상서』의 구절을 읽고 커다란 깨달음과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임금의 도리 중에서 이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 내가 즉위한 이래 간언을 이유로 죄준 신하는 한 명도 없었으니, 그대들은 내 뜻에거슬릴 것을 염려하지 말고 잘못되는 일이 있거든 모두 말해야 한다 - P133

대간이 당시로서는 심야인 밤 2고 (21~23시)까지 간쟁하자 연산군은 수리를 들고 대비들께 문안을 올리는 데 지장이 있으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3.9.11기유: 3.10.13신사)7 - P136

또한 그들은, 본원적인 임무상 자연스러운 측면일 수도 있지만, 절충안에 좀처럼 동의하지 않고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시도했으며 거부될경우 끈질기게 사직했다. 사직은 60~70번에서 100번까지 지속되기도했다(3.6.1신미 · 12혐오), 일부 신하들은 그것을 예전에 없던 현상이라고 지적했으며 (2.2.25유), 연산군도 그 의견에 동의하면서 삼사의 그런 행태는국왕에게 역정을 내는 것 같다고 불만스러워했다(3.6.1신미·18무자). - P136

연산군은 그런 생각을 즉위 직후부터 명확히 밝혔다. 삼사가 자신의82인사행정에 반대하자 그는 조정의 권한이 모두 삼사로 귀속되었다고 비관했으며(1.3.10계사: 1.5.14 병신: 1.6.29 경진; 1.8.9기미), 자신이 즉위한 이래 대간이 늘 대궐에서 논쟁하니 백성들은 사왕에게 큰 과오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개탄했다(1.12.4계축).  - P138

연산군은 삼사가 자신을 어린 국왕으로 여겨 무시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보았다(1.8.2임자 · 9기마2.2.3신해: 2.3.2경전), 요컨대 삼사에 대한 연산군의 문제의식은 정무적政務的판단과 감정적 혐오가 혼재된 것이었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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