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중요한 첫 번째 공식 경력은 성종 14년(1483) 2월 6일(기사7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가 세계로서 지닌 객관적인 조건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거장자였고, 11년 동안 세자로서 국정에 필요한 여러 사항을 충분히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 P83

유일하지만 중요한 결격 사항은, 앞서 보았듯이, 어디니가 사사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강제로 사망시켰다는것은 아들에게 분명히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근대 세계각국의 왕실이 수많은 암투와 치정으로 얼룩졌음을 감안하면, 그것은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리고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이었다.  - P83

국왕과 세자는 지엄한 공인으로 자처하고 존중받은 존재였기에 그럴 필요성이 더욱 컸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두 사람 모두 자제력이 부족했다. - P83

전체적으로 볼 때 세자시절 연산군의 학문적 능력은 큰 흠결은 없었지만, 성종 후반으로 갈수록 학습 태도가 다소 방만해졌으며 이해력도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했던것으로 판단된다.
- P83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제도에 따라서 연산군도 세자에 책봉된직후부터 서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성종14.2.20계미).  - P83

첫 교재는 일반적인 관례대로 소학이었다. 세자는 그 책을 1년 반에 걸쳐 완독한 뒤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순서로 사세*를 공부했다. 그 뒤 즉위할 때까지 그는 「시경詩經」, 「상서尙書」, 「춘추」, 「소미통감」, 「십구사략 등을 읽었다.  - P84

기간을 따져보면 연산군은 소학을 1년 반 동안 읽었고, 사서에서 어까지 마치는데는 2년 3개월이 걸렸으며, 그 뒤 가장 분량이 많은 『맹자』를 1년 9개월에 걸쳐 뗐다.
그가 서연에서 공부한 책의 수준과 완독 기간이라는 객관적인 수치는 다른 국왕들과 견줄 때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판단은 현재 관련사항이 연구되어 있는 국왕인 효종이나 영조와 비교해보면 쉽게납득된다.  - P84

연산군의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그의 시작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적 재능과 문학 서적의 이해는 고도의 지적 능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100여 수가 넘는 시를 남길정도로 연산군의 문학적인 소양은 매우 풍부했다.  - P86

그런 기사들이 지적한 연산군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문리의 불통이었다. - P86

세자 시절을 겪지는 못했지만, 성종은 매우 성실한 호화의 군주였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증거는 그가 치세 내내 거의 매일 경연에 참석해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 P87

나아가성종은 경연에서의 학문적인 논의를 국정 현안으로 확장시킴으로써 경연정치‘ 라는 독특하고 효율적인 정치 운영을 이뤄냈다. 이런 사실로미뤄볼 때 정희왕후가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성종이 독서에 몰두했다는 기록은 큰 과장이 아닐 것이다 - P87

신하들은 분리를 쉽게 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역사서를 읽을 것을제안했다. 동부승지 조위는 역사서를 읽으면 문리가 쉽게 통하니「소미통감』과 『십구사략을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으며(성종23.1.23갑오) 우승지 권경희의견을 아뢰었다. "세자께서는비슷한경서만 읽으시기 때문에 금년에 벌써 17세인데도 아직 문리를 해득하지못하셨습니다. 더욱이 고금의 치란의 자취를 세자께서 모르셔서는 더욱안 되니 먼저 역사서를 읽으면 문리가 쉽게 통할 것입니다. (・・・)  - P89

‘문리의 불통‘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역사서의 학습을 제시한 것을 볼 때, 독해 능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고 판단된다시경』을 다 읽은 뒤 춘추」를 읽도록 하라는 성종의 발언에서도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 P89

고금의 사변과 흥망.치란의 자취를 몰라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부분으로 추론할 때 그것은 역사적(또는 거기서 유추할 수 있는 현실적) 문제의 인과관계나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연산군은 어떤 책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기보다는 개별적사실들의 인과관계나 맥락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에 결함을 보여던 것이다. - P90

전체적으로 세자 시절 연산군의 학습 능력이나 태도는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그가 서연에서 공부한 책의 수준이나 완독 기간은 다른 국왕들과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  - P92

또한 그가 지은 다수의 시들을 볼 때 그가 독해 작문에 결함을 보였다고 판단되지는 않으며, 중국 사신에게 상찬받을 정도로 외교 전례도 익숙하게 알고있었다(물론 그가 불성실한 학습 태도를 지적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 P92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점이라고 부왕과 신하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핵심은 문리의 불통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역사서를 공부하도록 한처방을 볼 때, 그것은 역사적 현실적 사안들의 인과관계나 맥락을 종합적으로 이해해 판단하는 능력의 결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ā이런 판단은 이후 연산군의 실패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P93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의 치세가 유례없는 폭정으로 전락한 가장중요한 원인은 본질적인 문제와 비본질적인 사안을 혼동하거나 우선순위를 뒤바꿨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중대한 판단 착오의 단초는 세자 시절의 학습 태도에서 이미 드러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P93

어쨌든 재위 25년 12월 24일(기묘) 성종이 37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함으로써 연산군의 시대는 개막되었다. 그것은 익숙히 알듯이 그야말로격동과 폭압의 기간이었다.  - P93

삼사는 새로운 치세가 시작된 직후부터 국왕과 대신에게 강력한 간언과탄핵을 제기했다. 국왕과 대신들은 그런 삼사의 행동을 ‘상으로규정하면서 첨예한 대립관계를 형성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윗사람을능멸한다‘는 의미의 이 능상이라는 단어는 연산군대의 거의 모든 사안을 관통한 핵심적인 판단 기준이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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