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성종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적 관계인 왕비는 폐출뿐만 아니라 사사까지 집행했다. 최고의 공적 존재인 국왕의사적인 생활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공식적인 업무로 변화하는 경우가많다. "종사의 대의를 생각해 처결한다"는 표현이 잘 상징하듯이, 윤씨의사사는 부부의 사적인 갈등으로 출발했지만 종국에는 국정 운영의일부로 집행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 P62
해당 사안이 번져가는 과정은 이런 성격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윤씨 문제를 관통하는 죄목은 투기와 음모였다. 성종 8년 3월 폐비와 별거를 지시했을 때 그 투기와 음모는 후궁에 국한되어 있었다. - P62
그러나 성종 10년 6월의 사건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때 윤씨의 실행과 저주는 국왕을 직접 겨냥했고, 국왕과 대비들은 그것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판단했다. 즉 그것은 이제 가장 중대한 국가적 범죄인 국왕의 살해, 즉 역모로 규정할 만한 공적 사안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 P63
그러므로 이때 폐서인과 출궁을 단행함으로써 신분과 거처를 근본적으로 격하하고, 무엇보다도 곧계비를 확정함으로써 윤씨가 복위할 가능성을 봉쇄하는 등 그녀에 대한 대응이 크게 달라진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요컨대윤씨의 운명은 이 시점에서 질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다. - P63
그러나 성종과 대비들이 그 뒤 윤씨의 사사까지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뛰어난 성실함과 인내로 수행되어온 성종의 통치방식은 그런 극단적 결과를 자제할 가능성이 컸으며, 특히 왕자의 존재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처리 방법인 사형은 지대한부담을 후세에 이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P63
정동이 황제께 "폐비는 독한 질병이 있었다"고 아뢰었는데, 이것은 나를위해 숨긴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황제를 속일 수 있겠는가. 정동이 그렇게말했다고 해도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 (・・・) (황제가-인용자) 무슨 부덕함이있었느냐고 물으면 "주상을 억눌러 이기려는 술책을 썼으며 순종치 않았다"고 대답하라 (성종11.12.25경오). - P64
성종 14년 1월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임무로 중국에 파견되면서 한명회는 국왕의 의견을 물었다. "중국 조정에서 폐비 윤씨의 일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러자 성종은 사사했다는 사실은 숨기도록 했다. "폐출해 사가에 있다고 대답하라. 끝까지 물을 경우는 근심에 시달려 파리해져서 죽었다고 대답하라." 아무리 정당한 사유가 있었더라도결국 사사는 분명히 부담스러운 결과였던 것이다(성종14.1.4정유 · 8신축), " - P64
요컨대 윤씨는 투기와 불순종, 국왕에 대한 음모와 집권의 가능성때문에 폐출되고 사사까지 된 것이었다. 이런 죄목들은 당초 후궁들에게 국한되었지만 점차 국왕과 대비들을 직접 겨냥하면서 처벌의 수위또한 높아졌다. 즉 그것은 사적인 갈등으로 출발했지만 최고의 공적인존재들과 관련되면서 국가적 범죄로 처벌된 것이었다. - P64
연산군의 정치가 거대한 폭정과 파탄으로 귀결된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그가 본질적인 사안과 비본질적인 문제를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중대한 판단 착오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런 측면은 이 사건을 소급해처벌하는 과정인 갑자사화에서 가장 또렷하고 기이하게 드러났다. - P65
어쨌든 성종은 다른 측면에서 보여준 자신의 인내와 절제를 가장 민감한 사적 관계에서는 견지하기 못했다. 그것이 실수였는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를 판단하는 데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이 여느 사건들과 달랐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런 차이는 그 뒤 거대한폭력의 핵심적인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 P65
실록의 정확하고 방대한 내용과 엄격하고 객관적인 편찬 방식 등이 될 것이다. 그결과 조선의 각 왕대를 구성한 여러 역사상은 해당 시기의 실록을 가장기본적인 자료로 삼아 재구성되어 왔으며(인조대부터는 실록보다 훨씬 방대한약 4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남아 있어 좀더 자세한 1차 사료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실록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 P69
적어도 연산군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즉각 명확하게 내려졌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은 그에게 국왕에게 부여되는 ‘조‘나 ‘종宗‘이아니라 ‘군‘의 칭호를 붙인 조처일 것이다. 이미 형식에서 천명된 이런 격하는 다른 측면들에도 연쇄적으로 적용되었다. 연산군일기」라는이름도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다. - P69
우선 그 편찬이 순조롭지 않았다. 기록과 발언에 대한 연산군의 편집증적인 추적과 소급 처벌을 경험한 관원들이 중종의 치세가 시작된 뒤에도 편수에 참여하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중종 2년(1507) 6월 17일(기축) 사초史草를 누설할 경우 엄벌하겠다는 하교를 내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킨 뒤, 동왕 4년부터 편찬을 시작해 같은 해 9월에 완성했다. - P70
역시 비슷한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여겨지는데, 권말에 편찬 날짜와 편찬자들의 명단이 붙어 있는 다른 실록과는 달리 『연산군일기」에는 그것이 빠져 있다. 그러나 편찬을 완료한 직후인 중종 4년 9월 19일(무신) 차일암에서 세초하는 광경을 그린 「일기세초지도에 편찬자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어 그 전모를 알 수 있다. - P70
중종4년(150) 9월 19일 연산군일기의 편찬을 마친 뒤 세검정 차일암에서 세초하는 광경과 수찬에참여한 관원의 명단을 기록한 자료다. 맨 위에는 ‘ 제목이 씌어져 있고 상단에는 ‘라는희미하게 그림이 남아 있으며, 그 아래 두단으로 66명의 관직과 이름을 적었다. 본문에서 설명했듯1. 연산군일기」에는 누락된 수찬관의 면모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보물 제901호로 충재 권벌(1478-1548)의 생가(경북 봉화군 내성면 유곡리)에 건립된 충재선생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94.2cmx 59,2cm. - P71
조사 결과 가장 자세한 자료는 『세종실록』이었으며, 그 반대는『성종실록』이었다. 「세종실록』의 방대함은 다른 왕대를 압도한다. 흥미로운 흐름은 세종대 이후는, 세조대를 빼면 모두 개월당 1만 자 이상이었으며, 그 격차도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은 세종대부터는실록의 편찬이 그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하나의 방증이 될 것이다. - P72
우선 소설에서 연산군과 그의 시대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월탄 박종화朴鍾和(1901~1981)의 「금삼의 피」일 것이다. - P76
『연려실기술』의 내용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이는 그 제목은 그 뒤 연산군과 폐비 윤씨를 가리키는 대중적 상징의 하나가 되었다. 장르의 특성상 그 소설은 연산군과 그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국왕의 불행한 경험과 거기서 연유한 심리적 고독과 파탄에 초점을 맞추어 궁중의 사건들을 위주로 서술했다고 평가되었다. - P76
정비석도 소설 연산군(1956)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박종화와 비슷하게 연산군 개인과 궁중의 갈등을 서술의 중심에 두었다. 소설에서는 작가의 역량이나 작품의 수준, 대중적인 성공 등을 고려할 때 이 두 작품이 가장 대표적인 성과였던 - P77
연산군 이융은 성종 7년(1476) 11월 7일(정미) 적장자로 태어나 18년 뒤 부왕이 재위 25년 만에 붕어하자(성종25.12.24기묘) 닷새 뒤 창덕궁에서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0.12.29갑신) 19 그 뒤 그는 12년 동안 조선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다가 왕조 최초의 반정으로 폐위되었으며(12.9.2기묘), 그날로 강화도에 유배되어 두 달 만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는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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