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는 일단 이 사건이 성종을 가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후궁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판단했지만, "후환이 없도록 하라"면서 윤씨를 폐출하려는 엄벌의 의지를 보였다. 성종도 "이 문제는 투기만이 아니며, 비상은 나를 해치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국모의 의범儀範을 크게 잃은 것"이라면서 강경한 태도를 나타냈다. - P47
그러나 영의정 정창손과예조판서 허등 대신들과 삼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신하들은 "중궁이 실덕했지만 종사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투기에서 나왔으며, 무엇보다도 원자를 생각해서 용서해야 한다"면서 폐출하는 대신 빈으로강등시켜 별궁에 거처시키자고 주청했다. 결국 윤씨의 처벌은 신하들의 반대를 수용해 빈으로 강등시키고 자수궁에 거처시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성종8.3.30 정유). - P47
흥분한 감정이 느껴지는 성종의 전교에서 지적한 윤씨의 죄목은 이번에도 질투였다. 그러나 후궁들에게 겨눠졌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의질투는 성종을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 P49
이제 성종은 윤씨의 투기와 무례 외에도 그녀가 자신을 독살할 가능성을 심각하게 인정한 것이었다. 정희왕후는 성종의 이런 판단에 더욱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녀는 윤씨가 성종을 독살한 뒤 자신이 정치를좌우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판단했다. - P51
성종과 정희왕후의 어조와 결정은 단호했다. 성종은 그동안 윤씨가잘못을 뉘우치기를 기다렸지만 그 기대가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직결된 윤씨의 여러 패행을 직접 경험했으며, 정희왕후 윤씨의행동이 단순한 투기가 아니라 국왕의 독살과 집권이라는 엄청난 정치적음모가 내포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폐서인을 결정한 즉시 그사실을 교서로 발표하고 종묘에 아뢴 조처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나지만, 이제 윤씨에 대한 왕실의 조처는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을 넘어버렸다. - P51
가장 중요한 조처는 계비를 즉시 간택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윤씨의폐위를 확정적인 사실로 만든 것이었다. - P52
인척과 시간의 범위를 넓혀서 조사하면 파평윤씨에서는 조선전기에 왕비를 네 명이나 배출했으며, 정현왕후의 가문은 세조~성종대 영의정까지 역임하고 적개1등. 좌리4등공신에 책봉된 윤필상(윤호의 조카)과 한명회·남효온南孝溫·박원종朴元등 저명한 인물들과도 의미 있는친족관계를 형성했다. 요컨대 그녀는 예외적으로 한미했던 폐비의 객관적 상황과는 달리 왕비에게 어울리는 현실적 조건을 갖췄던 것이다. - P53
연산군성종의 세 번째 왕비가 결정되는 데는, 평소보다 더욱 신중했을 사안의 성격상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 결과 1년여 뒤인 성종 11년 11월 8일(감신), 앞서 폐비 윤씨와 비슷한 시기에 입궁한 파평 윤씨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갖춘 객관적 조건은 폐비 윤씨와는 매우 달랐다. 특히가장 중요한 가문의 배경이 폐비 윤씨보다 월등했다. - P52
계속 중궁으로 호칭하고 별궁에 거처시킨 조처가 상징하듯이, 그동안 성종은 그녀에게 회를 기대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자신이 든 후궁의 거처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과격한 투기를 경험하고, 독살과 집권의 가능성을 믿게 되면서 성종과 대비들은 윤씨에 대한 기대를 단호히 접었다. - P54
그리고 그들은 일반적인 조건에 합당한 계비를 확정함으로써 폐비와 관련된 소요를 사실상마무리했다. 그때까지 유일했던 왕자를 고려하면, 성종과 대비들은 사사까지는 고려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윤씨의 운명은 결국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달았고, 28년 뒤 그 상처는 유례없는 참극으로터졌다. - P54
성종의 이 대답에는 격앙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성종이 "백년 뒤라도 내가 거처하던 곳에 살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냉정하고 단호한 결별을 선언한 가장 큰 이유는 앞서도 지적한 바 있듯이, 자신의 안위에 대한 윤씨의 저주와 위협을 이전보다 더욱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 P56
이런 성종의 판단에 대비들도 적극 동의했다. 대비들은 "주상의 안위를 매우 걱정했다"면서 "주상은 ‘윤씨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다고 불안해하셨으며, 침소에서는 더욱 두려워하셨다"고 확인했다. - P56
주목되는 사실은, 앞서 폐비 • 별거와 폐서인. 출궁을 지시했을 때는 대부분의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이제는 당시 조처의 타당성에 적극 동의했다는 것이었다(이런 측면은 바로 앞선 권경우의 발언에서도 보인다). - P57
윤씨의 죄가 지극하므로 전하께서 종묘와 사직의 만세를 생각한 대의로 이미 단죄하여 처리하셨습니다. 전하의 조처가 옳으셨으므로 지금까지 4년이 되었지만 신하들은 이견이 없었습니다." 신하들의이런 태도 변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동안 지적되었던 윤씨의 패행들이사실로 입증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폐서인과 출궁, 특히 계비가 확정됨으로써 이제 그녀와 관련된 상황이 거의 정리되었다고 판단한 것 - P57
"원자 때문에 어렵기는 하지만 훗날 반드시 발호할 우려가 있으니 대로 결단해 예방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었다. - P58
성종은 그 의견을 즉시 집행했다. 국왕은 좌승지 이세좌에게비상을 가지고 윤씨의 집에 가서 그녀를 사사하게 했다(성종13.8.16일자). 윤씨에 대한 성종의 분노는 이미 여러번 표출된 바 있지만, 이날 이세좌에게 그 집에서 하루를 지내면서 사망을 확인케 하는 엄혹한 철저함에서도 다시 한번 드러났다. - P58
예견할 수 있는 일이듯, 윤씨의 장례는 초라하게 치러졌다. 가지손비장이 보고한 대로 "윤씨의 형제는 모두 멀리 유배되었고노비들도 도망가 염습과 매장하기도 어려울 형편" 일 정도로 그녀의 집안은 풍비박산되었다. 성종과 대비들은 관련 부서에 장지와 날짜를 택정케 하고, 관광을 하사했으며, 여의와 군사를 보내 염습과 매장에 관련된 여러 일을 돕도록 하는 마지막 배려를 했다(성종13.8.17계축) - P59
그러나 천장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1년 뒤 의전만 약간격상되었다. 재위 20년 5월, 성종은 이번에도 "세자의 정리를 생각하면측은하다"면서 일정한 제사를 드려 자식의 심정을 위로하라고 지시했다(성종20.5.16계유), - P60
그런 전교에 따라 ‘윤씨지묘이름하고(그때 ‘라고까지는 이름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묘지기 두 명을 배치했으며, 해당 지역의 수령에게 절기마다 제사를 드리게 했다(성종20.5.20정축). - P60
입궁부터 사사에 이르는 윤씨의 사건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그러나자신이 붕어한 뒤에도 윤씨와 관련된 격식을 영원히 고치지 말라는 성종의 불안 섞인 당부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참담하게 무시되었다. - P61
전근대의 왕정 체제였다는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겠지만, 세자를유지시킨 채 그의 모후를 사사한 것은 분명히 커다란 부담과 불안의 요소를 남겨놓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불씨는 뒤에서 보듯이 반드시윤씨의 비극 때문만은 아니며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였지만, 커다란 폭발과 파괴를 불러왔다. - P61
전근대의 왕정에서 그런 사건의 중심은 최고의 지위인 왕위 계승을 둘러싼 문제들이 형성했다. 조선전기의 역사에서는 태종이 일으킨두 차례의 왕자의 난과 세조의 찬탈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지만, 넓은 의미에서 폐비 사건도 왕위 계승과 관련해 커다란 영향을 남긴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 P61
좀더 정확히 표현해서 그것은 그녀가 낳은 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엄중하게 소급될 수 있는 잠재적인 문제였다. - P61
성종의 치세는, 「경국대전』의 최종적 완성으로 상징되듯이,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발전의 시대였다. 물론 치세 중반부터 삼사의 기능이 제고되면서 대신들과 상당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 뒤 조정과 보완을 거치면서 국왕. 대신 · 삼사가 정립하는 조선의 중요하고독특한 정치 구조를 확립한 순기능적 측면이 더욱 컸다. - P62
25년에 걸친 비교적 긴 성종의 치세에서 하나의 특징적인 사실은, 전근대의 왕정에서 드물지 않았던 물리적 억압이나 폭력적 숙청을 동원한 정치가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다. - P62
이런 결과가 도출된 데에는 그때까지 조선에 착근한 유교정치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대단히 성실한 경연 참석과 집요한 인내로 견지한 납간으로 대표되는 국왕 개인의 철학이나 학문적 수준, 그리고 성품이 핵심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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