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대북 대간들이 이귀와김자점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면서 들고일어났다. 두 사람이 당시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원상회복시키기 위해 역적질을 벌이고 있다고 광해군에게 상소한 것이다.  - P20

이귀와 김자점은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그때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후궁 김개시가 두 사람을 구했다. 김자점이 일찍부터 뇌물을 쓰면서 김개시에게 연줄을 대고 있던덕분이었다. 결국 두 사람에 대한 수사는 흐지부지되었다. - P20

능양군과 주모자들은 억세게 운이 좋았다. 마침 장유의 아우 장신이 훈련대장 이홍립의 사위였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장유가 이흥립을 만나 대의로써 설득하자 이흥립이 즉석에서 내용할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광해군 정권의 몰락을 알리는 결정타였다. - P22

이날 밤 3경 무렵, 1천4백여 명의 반란군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쳤다. 이서 휘하의 장단 군사 7백여 명을 주축으로 김류와 이귀 등이 동원한 병력 또한 6~7백여 명쯤 되었다. 반란군을 진압해야 할 이흥립은 훈련도감의 병력을 단속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 P23

함성이 퍼지고 불길이 치솟는 와중에 광해군은 내시의 부축을 받아 허겁지겁궁궐의 담을 넘었다. 담을 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임금이 아니었다.
광해군은 안국방에 있는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 P23

그를 ‘역적의 괴수라며 죽이겠다고 나섰다. 도승지 이덕형德이, 중종반정 당시 연산군을 살려준 고사를 들어 말리자 인목대비는 폭발했다. "역과는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과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으며, 적모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구비했다. 어찌 연산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며 절규했다. 광해군의 목을 쳐서 원한을 풀고야말겠다며 능양군과 거사 지휘부를 채근했다. 능양군과 신료들이 결사적으로 막아선 뒤에야 대비의 고집이 한풀 꺾였다. - P24

이윽고 능양군의 즉위와 광해군의 폐위를 알리는 인목대비의 교서가 반포되었다. 대비는 ‘광해군의 죄악 열 가지를 열거했다.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를 폐한 ‘폐모살제 가장 먼저 거
‘를론했다.  - P24

이어 ‘궁궐 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것‘, ‘선 왕조의 구신들을 모두 쫓아낸 것‘, ‘뇌물로 인사를 단행하여 혼암자들이 조정에 넘치게 한 것‘ 등이 차례로 거론되었다. - P24

외교 문제도 언급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명이 도와준 ‘재조지을 잊지 못해 죽을 때까지 명이 있는 서쪽을 등지고 앉은적이 없었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심하전투 때에는 전군을 오랑캐에게 투항시켰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조선을 오랑캐와 금수로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 P24

‘재조지은‘이란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망할 뻔했는데 명이 원군을보내줌으로써 다시 살려주었다‘는 ‘공‘을 가리킨다. ‘심하 전투‘
란 1619년 명이 누르하치를 정벌할 때, 조선도 강홍립이 이끄는1만 5천 명의 원군을 보내 후금군과 싸웠던 전투를 가리킨다. 광해군이 오랑캐(후금)와 밀통하여 명이 베푼 재조지은을 배신했기 때문에폐위할 수밖에 없다는 선언이었다.
- P26

광해군 정권의 붕괴를 공식적으로 선포한 이후에도 구정권 인물들에 대한 숙청은 계속되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의 핵심인물들은 처형되거나 조정으로부터 영구히 축출되었다.  - P26

주목되는 것은 인조가 도원수 한준 평안감사 박엽과의주부윤 정에게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점이다. 박엽과 정준은 각각 평양과 의주에 머물며, 광해군의 지시대로 명, 후금과의 외교 교섭을 전담해온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의 처형은 새 정권의 대외 정책의 방향이바뀔 것임을 암시하는 조처였다.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조선과 명,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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