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기찰포교는 만일을 몰라 명의 노인이 혈서로 쓴이불 홑청을 둘둘 말아 일단 집으로 가져다 숨겼다. 갑자기 증거물이 사라질 염려도 있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글자를알아볼 경우 자칫 사건이 미궁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P170
기찰포교는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후 고민 끝에 단단히 결심을 굳혔다. 사건 진상을 글로 써서 증거물과 함께 비밀장소에 갈무리해 둔 후, 그는 새벽같이 말을 타고 성안으로 달려가 국상 명림수부를 만나보기로 했다. - P171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국상의 입을 통하여 사건의 내막이나 알고 싶다는 직업적 유혹을 그는 뿌리칠 수 없었다. 더구나 그것만이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 P171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오. 내가 모르는 일이니, 국상 어른께옵서도 그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오. 그리 알고 물러가시오" 집사는 기찰포교를 거칠게 문밖으로 밀어내고 대문을 소리나게 쾅 닫아버렸다. 문전박대를 당한 기찰포교는 머리끝이 쭈뻣해졌다. - P171
기찰포교는 간밤에 잠 한숨 자지 않고 사건의 내막을 글로정리해 갈무리한 두루마리와 증거물로 챙겨둔 둘둘 만 이불홑청을 찾아 보자기에 쌌다. 그는 보자기를 들고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말을 달려 동생이 무술 공부를 하는 깊은 산속의 도장을 찾아갔다. " - P172
너 똑똑히 들어라! 나는 이제 죽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죽거든 너는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왕태제 전하께 전해야 한다. 이것은 이런 왕태제만이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만약을 모르니 너도 이것을 숨겨 가지고 당분간 안전한곳으로 피신해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 P172
며칠이 지난 후 까마귀들이 몰려들어 시체 하나를 가지고 서로 다투는 것을 한 어부가 발견하고 관아에 신고했다. 까마귀들이 눈과 얼굴을 파먹어 누구의 시신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나, 옷을 보고서야 며칠전에 어디론가 사라진 기찰포교임이밝혀졌다. - P173
한편 감옥에 갇혀 있던 방추는 기찰포교가 죽던 날 저녁에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다가 그대로 즉사했다. 의원이 와서 시신을 살폈으나, 급체라고만 할 뿐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곧바로 매장되었다. - P173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 이런이 그동안 스승을 모시러 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게 된 것은 바로 왕후가 동궁전으로 보낸 약첩 때문이었다. - P174
동궁빈은 왕태제 이련에게 왕후가 보낸 약첩에 대해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동궁전 뜰에서 매일 탕약 달이는 냄새가 났고, 어느 날 그가 불쑥 동궁빈 처소에 들어섰더니 그렇게 정성 들인 탕약을 마시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길례가몰래 호리병에 담아 다시 밖에 내다 쏟아버리는 것이었다. - P174
약철에 미미하지만 독이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련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분노보다 앞선 것은 두려움이었다. 왕후를 둘러싼 연나부 세력의 무서운 음모가 거기 숨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 P174
바로 그때 대왕 구부가 왕후전으로 들어섰다. 이련은 일어서서 예를 갖추며 방금왕후에게 말한 내용을 그대로 다시 한번반복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표했다. 대왕은 왕후의 너그러운마음씨에 감동한 나머지, 내명부의 어른으로서 아주 잘한 일이라고 칭찬을 아끼지않았다. 그 소리까지 듣자왕후의 얼굴이 진홍색으로 달아올랐다. 이련은 그 모든 기미를 놓치지 않고 보았다. - P175
보따리에서 서찰이 나왔다. 그것을 펴서 읽어본 이련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이럴수가? 국상조차 ‘ 바로 서찰은 기찰포교가 죽기 전날 밤에 쓴 사건 기록으로, 강변 마을 명의 노인의 의문사를 추적한 내용이 상세하게 담겨져 있었다. - P178
서찰을 쥔 이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문득 수레 안으로들어와 서찰을 펴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떨리는손으로 보자기에 싼 물건을 풀어보았는데, 피범벅이 되어 말라붙은 이불 홑청에는 기찰포교의 서찰 내용처럼‘왕자와 ‘궁‘자가 확실하게 쓰여 있었다. 아니, 그려져 있다고 해야 할 만큼 그글씨들은 서툴렀다. - P178
"저, 그것이・・・・・・ 사실은, 사부님 친구들은 다름이 아니오라삼·더덕·버섯·개복숭아·머루다래 들을…" 명선이 한참 읊어대고 있는데, 군관이 다시 호통을 쳤다. "이놈이 그래도? 어서 똑바로 대지 못할까?" 다시 명선이 겁에 질려 입을 다물었다. "됐다. 충분히 사부께서 친구로 삼을 만한 생물들이 아니더냐?" - P181
때마침 을두미는 석정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유교와 불교로 각기 다른 길을 가고 있으나 마음만은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처음 만나자마자 오랜 지기처럼 가까워졌다. 물론 을두미가 석정보다 열 살이 많았지만, 그래도 학문을 논하는 자리에서 나이 차이가 벽이 될수없었다. 학문이나 종교는 출발이 다르지만 궁극에 가서는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 P188
"구만리장천에서 천둥소리 들리니, 곧 이 땅에도 폭풍우가한바탕 쏟아지겠구나!" 이련과 을두미가 편전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석정은 저 혼자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 P189
"폐하, 장자에 나오는 목계 이야기를 알고 계시는지요?" "어디선가 들은듯하지만, 잘은 모르겠소." - P190
"싸움을 잘하는 닭은, 적수를 만났을 때 벼슬과 털을 곤두세우고 투지에 불타 상대에게 잔뜩 위압감을 주는 닭이 아니옵니다. 나무로 만든 닭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고 태도에도 시종일관 변함이 없어야 하옵니다. 그런 닭 앞에는 어떤 싸움닭도 감히 무서워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지요." 을두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대왕의 반응을 살폈다. - P191
"이번 사건은 폐하가 개혁정치를 펴는 데 있어 큰 걸림돌이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악재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일은 호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재와 호재가 반복되고, 때론중첩되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옵니다. - P191
악재가 있기 때문에 그다음에 호재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재는 호재로 반전되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부디악재를 악재로만 생각해서 더 큰 화를 부르지 마시옵소서. 악재를 기회로 바꾸시옵소서 이미 폐하께서는 평양성 전투의 패배를 고구려가 다시 일어서는 전환의 기회로 삼아 개혁정치를 펼치고 계시옵니딜 - P191
이 세상 어떤 일이든 개혁을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장애물이나타나고 방해자가 생기는 법이옵니다. 장애물이나 방해자는당장 눈앞의 가시 같은 존재이긴 하나, 그 국면을 하나하나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있게 해주는 계기로도 작용하는 것이옵니다. - P192
폐하께서 이번 일을 슬기롭게 극복하면 더욱 강력한 군주로 떠오를 것이며, 왕권을 강화하여 백성들의 지지와 신망을 얻는 대왕으로 거듭나실 것이옵니다. - P192
이 세상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사옵니다. 그러나 형태로만 크기를 재는 것은 대번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나, 형태가 없는 것은 그 크기를 재기가 여간 어렵지 않사옵니다. 소신이 폐하께 목계가 되시라고 하는 진의는 눈으로 잴수 없는 큰 것과 작은 것을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옵니다. - P192
목계는 싸움을 할 상대의 진면목을 바로 읽을 수 있으며, 보통 수탉의 붉은 벼슬과 성난 목덜미의 털이 엄포를 가장한 허튼짓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투지를 내세운싸움닭의 약점입니다. 목계는 그런 싸움닭의 약점을 알고 있기에, 나무와 같은 무표정으로 상대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미 기 싸움에서 져버린 싸움닭은 목계 앞에 바로꼬리를 내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 P192
"대왕 폐하! 이번 사건은 폐하께서 직접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대신들에게 공론화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히도록 하되, 그저 목계처럼 감정의 흔들림 없이 바라보기만 하소서. 형벌은대신들이 내리되, 폐하는 최종으로 선언만 하시면 됩니다. 폐하께서 꿈꾸는 고구려의 개혁정치는 정의구현에 있질 않사옵니까? 부디 이번 사건을 통하여 대신들이 정의 가운데 바로 서는본보기가 되는 계기로 삼으소서." - P193
게 사건을 재조사하도록 하면서 더욱 곤혹스러워졌다. 계루부에서 추구한 것만으로는 미흡하므로 연나부가 자체적으로 진범을 색출하여 사건의 결말을 지으라는 것인데, 이는 범인으로지목된 만수나 시녀가 아니라 그 배후 인물을 밝혀내라는 대왕구부의 암묵적인 주문이었던 것이다. - P198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입니다. 나 때문에 연나부가 결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모든 책임은 나에게있으니, 내가 짐을 지고 가겠소. 이번 사건으로 인해 계루부의고연제가 당한 것처럼 우보께서도 다치면 큰일 아니겠소? 만수에게 사실대로 말하라고 이르시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그래서 나를 잡아넣으면 우보께선 사건 해결의 공을 인정받을 것이오. 연나부의 공중분해를 막는 길은 그 방법밖에 없소이다" - P199
대왕은 그 즉시 국상 명림수부의 관직을 삭탈하고 당장 그를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그 소식을 듣고 왕후가 대왕을 찾아와 애원했다. "폐하! 애초의 잘못은 저에게 있사옵니다. 아버님은 제 잘못을 덮으려고 하다 결과적으로 사건을 더욱 확대시키게 된 것이옵니다. 저를 내치시고, 아버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 P200
"이제야 실토를 하는군. 오늘부로 왕후를 폐서인 시키노라. - P200
"폐하! 왕후 전하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나이다. 전하께오선저에게 아기씨를 잉태할 수 있는 보약을 지어다 주셨사옵니다. 약을 달여 마시고 아무 탈이 없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질 않사옵니까? 왕후 전하께오선 이 나라 왕실을 보존하기 위하여 제게 어서 왕손을 낳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약첩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은 낭설이옵니다." - P201
동궁빈 하씨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절히 호소했다. 대왕은 눈을 감은 채 오래도록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마음씨고운 동궁빈이 애써 왕후를 감싸기 위해 거짓을 아뢰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질투와 욕망의 화신인 왕후와 확연하게비교가 되었다. - P201
마음이 아팠다. 십수년을 같이 살아온 왕후였다. 그런데 아기씨를 생산하지 못했다는 한이 그런 엉뚱한 시샘으로 변하여, 악독하게도 무서운 마음까지 먹게 만들었다. - P201
왕태제 이련도 울면서 호소했다. 그때서야 대왕 구부는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번쩍 눈을 뜨고 내관에게 일렀다. "폐서인의 명을 거두어들이겠다. 그 대신 왕후를 후원 별궁에 유폐시키도록 하고, 그 누구의 접근도 엄히 금하라" - P202
반역이라면 마땅히 주모자와 그 동조자는 효수형에 처하여성 밖에 목을 내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대왕 구부는 이 사건을 반역으로까지 보지는 않았다. 그는 죄인이 자백을 한 마당에 더 이상 사건을 확대하지 않고 최종 결론을 지으리라 이미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 P203
명림수부가 동해안 고도로 귀양을 떠나고 나서 보름쯤지났을 때, 왕후 명림씨는 후원 별궁에서 늘 품속에 간직하고있던 은장도로 손목을 끊어 자진했다. - P203
"오래도록 국상의 자리를 공석으로 놔두었습니다. 이번 동맹제때 신임 국상을 천거하여 국가의 기틀을 새롭게 잡아나갈까 합니다. 을두미선생께서 국상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대왕이 을두미를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 P205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가섭만이 미소를지었다고 해서 ‘염화시중의미소‘라 하질 않사옵니까? - P207
"마지막 죄인의 처리 방법에 있어서 완벽하게 꼬리를 자르지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을두미 선생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소. 국상을동해 고도에 위리안치한 일을 두고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 P209
그러나 죄인은 사사롭게는 부원군으로 짐의 장인이 됩니다. 사건의 주범이므로 효수가 마땅하나 차마 왕후를 보아서도 그리할수 없었소이다. 그런데도 후원 별궁에 유폐된 왕후가 그 소식을 접하고 유명을 달리했지않습니까? 사실 어제 왕후 생각이나서 내전에서 백팔배를 하며 고인의 극락왕생을 빌었던 것이외다." - P209
대왕은 내심 왕후에게 너무 가혹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폐하의 상심이 크신 것, 소신도 잘 아옵니다. 하오나 강력한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때로 뼈를 깎는 마음으로 과감한 결단을 해야 할 때도 있사옵니다." - P209
규범이라는 것도 주로 관습법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보편성을 갖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제도적 정비를 통하여 불편부당한 형벌 규정을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을두미 개인 의견이 아니라 대신들과 일반 백성들의 합의를도출해 내는 과정이 꽤나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 P211
이처럼 1년여의 시간 동안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을 거쳐, 고구려는 373년 10월동맹제를 기하여 정식으로 율령을 반포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으며, 비로소 대왕 구부는 개혁 군주로 우뚝 서게 되었다. - P211
"그래서 궁금한 것을 스님께 묻고 싶었어요. 지극정성으로기도를 드리면 왕후 전하의 영혼도 극락에 갈수 있는지요?" 동궁빈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 P215
"허허, 동빈 전하께옵서왕후전하의 극락왕생을 비느라그렇게 열심히 불공을 드리셨군요. 동빈 전하의 마음씨에 하늘도 감복할 것이옵니다. 부처님의 미소가 이미 그 뜻을 받아들이셨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나무관세음보살!" - P215
석정의 말에 동궁빈은 문득 고개를 돌려 금불상을 바라보았다. 언제 바라보아도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상이었지만, 그순간 정말 불상의 입가에서 미소가 연꽃처럼 피어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 P215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리는 동빈전하의 기원을 이미 부처님은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동궁빈전하의 기도 덕분에 왕후 전하께옵서는 극락에 가셨습니다. - P216
이미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서로 화해가 된 것입니다. 영혼의 세계에선 이승과 저승이 서로 통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둘이아닌 하나의 길입니다. 부처님은 만인에게 두루 공평하게 말씀으로 응답을 주십니다. 이 역시 세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에 그러합니다." - P216
"우리 고구려의 시조이신 추모(주몽)대왕께서는 천신의아들 해모수와 수신인 하백의 딸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므로, 천손이시옵니다. - P216
신화에 보면 천신의 아들 해모수는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그 뒤를 따르는 1백여 인은 고니를 타고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채색구름 사이로 이 땅에 내려옵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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