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 양자는 그동안 고구려를 몇 차례 다녀왔다. 사신으로갈 때마다 중원 각지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챙겨 가서 고구리에 비싼 값에 팔고, 또한 올 때는 고구려의 특산품을 가져와장안의 시장에 내다 팔아 쏠쏠한 재미를 보곤 했다. 역관들이개인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 P100

"조 행수에게서 석정 스님에 대해 전해 들은 바 있습니다만.
저희 부모님도 오래전 연나라 모용황 군대의 포로가 되어 용성까지 끌려온 고구려 유민입니다. 저는 용성에서 태어났습니다." - P100

"흐음,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빈도는 고구려 유민으로 모용황 군대의 포로가 되어 용성으로 끌려올 때 열 살이었지요. 나무관세음보살!" - P100

"허허헛! 빈도라니요? 석정 대사의 명성이 지금 장안에 크게떨치고 있는데요."
진유량도 따라서 웃었다. 빈도란 덕이 부족한 승려를 일컫는말로, 석정이 자기를 낮추어 그렇게 표현했다. - P101

조 행수는 이곳 장안과 서역을 오가며 우리 상단을 이끌게 될것입니다. 또한 고구려와도 연계하여 서역과 장안, 그리고 장안과 국내성을 잇는 무역로를 개척해 나갈 생각입니다. 이번 사신단에 우리 상단을 동행케 해주시는 일은 전적으로 석정 대사와 양통사께 달려 있습니다." - P103

"이번에 우리 상단이 사신단을 따라 고구려에 갈 수 있게 된다면 고급 비단을 많이 가져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고구려에서귀국할 때는 인삼을 바꾸어 가져오도록 하면 좋겠고."
진유량은 오래전부터 고구려 인삼의 효능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었다. - P103

대인 어른! 고구려의 특산품이 인삼인 것은 사실이나, 지금인삼 생산지인 부소갑(개성)을 백제에게 빼앗겨 교역이 어려울것 같습니다. 하루빨리 부소감을 되찾게 되면 고구려와의 인삼교역이 가능해지겠지요."
- P104

"오, 그래요? 인삼 교역을 강남의 동진에 빼앗기면 안 될 터인데 어서 빨리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부소감을 되찾기만 빌어야하겠군." - P104

조환은 그날 밤 두 통의 서찰을 썼다. 하나는 대사자 우신게 다른 하나는 동부욕살 하대곤에게 보내는 서찰이었다.
동부욕살 하대곤에게 글을 쓸 때 조환은 감회가 새로웠다.
아마도 그는 백제와의 수곡성 전투에서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 P105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 칡을 캐러 다녔는데, 칡뿌리를 말려녹말가루를 내서 만든 칡술이오. 귀리도 조금 섞어 맛이 좀 색다르지만, 아쉬운 대로 마실 만은 합니다."
"고맙습니다. 올핸 보리농사가 아주 잘됐군요." - P110

군량미를 거둬가는 바람에 숨겨둔 나락으로 씨를 뿌리기도 수월치 않았으니까요. 굶어죽을 순 없고, 씨앗으로 남겨둔 나락까지 절구에 찧어 멀건 죽이라도 끓여먹는 집들이 많았지요.  - P111

전쟁이 없어야 젊은이들이 싸우러 나가 죽지 않고, 우리 같은 농사꾼도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작년에 평양성 전투에서 대왕이 죽고나서 태자가 새로왕이 되더니, 올해는 농부들에게 세도 감면해주고 농업도 장려하여 그럭저럭 어려운 고비는 넘기고 있습니다. 전쟁 없는 나라 만드는 대왕이성군이지요.  - P111

그는 다름 아닌, 평양성 전투에서 대왕 사유를 호위하다 화살을 맞아 왼쪽 눈을 잃은 추수였다. - P113

치명적인 독입니다. 독이라고, 저중원 남방의 광동성에 사는 짐조라는 맹독을 가진 새에게서 얻는 것이지요.
백제가 구하기도 힘든 짐독을 화살촉에 묻혀 쏘았다는 것은아예 작정을 하고 저지른 일이라 생각되옵니다. 그 점이 괘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123

대왕 구부는 화살촉을 바라보며 당시 어의가 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곱씹었다.
부왕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국내성으로 돌아온 대왕 구부는 백제를 쳐서 원수를 갚는 일보다 앞서 개혁의 기치부터 올렸다.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잦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 P123

구부는 백성들의 군역과 부역을 줄이고, 세를 낮추어주었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죄수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일을 돕게했다. 뿐만 아니라 부여신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유화부인의신당을 새롭게 증축하고, 자주 찾아가 제사를 지내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 P123

추모왕이 부여를 탈출할 때 유화부인은 보리씨를 보내 고구려에서 보리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함으로써 농사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 P123

그래서 특히 대왕 구부는 보리농사를 적극 장려했다. 조기장·수수 등 대부분의 작물은 가을에 추수하는 데 반하여, 보리는 초겨울로 접어들 때 파종하여초여름에 추수하였다. 특히 춘궁기인 늦봄 무렵을 보릿고개라 부를 만큼 끼니 때우기도어려울 때 추수를 하니, 보리는 고구려 농민들에게는 주식이면서 또한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라 할 수 있었다.
- P124

이처럼 민심 수습으로 나라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대왕 구부는 같이 정사를 논할 인재들을 널리 구하였다. 뿐만 아니라인재 양성을 위하여 기존의 지방 사설 교육기관인 경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국상에게 명하여 왕실과 귀족의 자제들이 체계적으로 유학을 배울 수 있게 태학을 설립토록 했다. - P124

대왕 구부는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의 체질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왕권강화의 한 방법으로 강구한 것은 불교를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승려 석정은 그에게 왕이 곧부처‘라는 왕즉불사상을 역설하면서, 불교를 공인하게 되면자연스럽게 왕권도 강화될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 P124

지금의 대왕은 선왕 고국원왕과 달랐다. 선왕은 대신들과 맞서다가 자기주장이 먹히지 않으면 강압적으로 뜻을 관철해 나갔는데, 구부는 대신들을 충분히 설득하여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 주력했다. 그것은 대왕으로서 매사에 확신을 갖고 일을 추진하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 P129

유교는 태학에서 인재를 양성해 유능한대신들을 뽑는데 활용하고, 불교는 왕즉불 사상을 내세워 왕권을 강화하고 고구려를 불국정토의 나라로 만드는 데 필요했던 것이다. - P130

"그것이 바로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사상이고, 불심으로세계를 통일하는 불국정토의 사상 아니겠사옵니까?" - P133

왕후 명림씨는 몰래 동궁전에 보냈던 시녀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이 보내준 약첩을 달여 마셨다면 분명 동궁빈의 몸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야 하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44

 너, 다시 성 밖의 의원에게 다녀오너라. 지난번지어준 약첨이 별 효험이 없더라고 말이다. 한마디라도 거짓이있을 시에는 더 이상 처방전을 쓸 수 없도록 만들겠다고 일러라." - P145

"이 몸이 석녀라면, 하가촌의 미천한 딸도 석녀가 돼야지요.
만약 저 하가촌 장사꾼의 여식이 왕손을 낳아보세요. 우리 연나는 그 즉시 몰락하고 말 거예요. 아버님도 그때를 생각해보세요. 마음을 단단히 다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궁빈을 석녀로 만들고 나서, 다시 연나부 출신을 이런 왕태제의 후궁으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연나부에서 대대로 아들을 많이 둔 가계의 내력을 알아보고, 그 집안의 딸 중 영특하고건강한 남자를 물색해 두도록 하세요." - P147

몸에 안 좋은 독초를 한꺼번에 많이 쓰면 탕약을 드는 당사자가 금세 알아차릴 것 같아 조금씩 넣었다 하옵니다. 그래도그 약첩을 다 달여 마셨다면 반드시 효험이 있을 것이라 하니. - P150

"만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 민간의 명의라는 자에게단단히 입막음을 해두었느냐?"
"가지고 간 금덩어리를 건네주었더니, 무덤에까지 비밀을 가지고 가겠다고 하더이다."
- P151

"너도 단단히 입을 봉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래도 내가 이번일을 섣불리 결행한 것 같다. 후회막급이로구나 동궁빈은 예사 인물이 아니야. 총기도 있어 보이고 학문도 깊다 들었다. 거기에 무술까지 뛰어나다 하니, 가볍게 다루었다가는 역효과를가져올 위험이 있다. 그러니 너도 동궁전을 살필 때 특히 그 점을 유념토록 해라." - P151

추수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왕태제나 동궁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평양성 전투에서 죽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패수에서 발견한 아기를 떠맡게 되면서 그는 새로운생명을 얻었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추수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 P153

며칠 전 왕태제 이련이 보낸 사자가 다녀갔다. 두미에게 태학의 유생들을 가르칠 박사로 와달라고 초청한 것이었다. 그는사자에게 묵묵부답인 채 답서도 써주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동안 몇 번 번민을 거듭했지만, 번잡한 삶을 싫어하는 그로서는국내성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쩌면 조만간 왕태제가직접 그를 찾아올지도 몰랐다.
- P153

"사부님, 어찌 왕태제 전하의 초청을 거부하십니까?"
"추수야, 너는 내가 아귀들의 세상에 나가는 것이 좋으냐?"
"왜 그곳이 아귀들의 세상입니까?"
"허허, 너는 한쪽 눈을 잃고도 그 세상이 어떤 도가니 속인지 모르겠느냐? 선왕이 그 도가니에 불을 지펴 끓게 했고, 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지 않았더냐?  - P154

을두미는 자신의 직계 조상인 을파소가 국상을 지낸 고국천왕 시절의 역사를 떠올렸다. 당시 고구려 왕실은 연나부의 우씨 세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고, 당시 대왕은 연나부 세력을견제하기 위해 서압록곡에 은거한 을파소를 전격 기용했다.
- P155

을파소는 국상으로, 파격적인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그중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국가의 창고를 헐어 곡식을 내주는진대법, 을파소가 고안해 낸 획기적인 구휼정책이었다.
- P155

그러나 그런 을파소도 연나부 세력을 배후에 둔 우씨가 두 번씩이나 왕후 노릇을 하면서 허수아비 왕 대신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행태를 막지 못했다. 결국 을파소는 연나부 세력에 밀려크게 개혁정치를 펴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 P155

그런데 그때로부터 2백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연나부 세력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왕권보다 신권이 강화된 것이 마침내는 국가기강을 해이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결국 모용씨의 연나라나 백제로 하여금 호시탐탐 고구려 국경을넘보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 P155

추수의 마음은 아직도 동궁빈 하씨, 아니 연화가 있는 국내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왕태제나동궁빈 앞에나타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는 선왕을 전사케 한 것이 자신의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 P156

그러므로 스승 을두미가 국내성에 가는 것이 왕태제나 동궁빈의안전을 도모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 P156

"호랑이 굴 아닐까요? 잠자는데 호랑이라도 들어오면 어쩌죠?"
하가촌 무술도장에서부터 함께 따라온 동자 명선은 산속이무척 낯설었으므로 겁부터 잔뜩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허허헛! 호랑이가 무섭냐, 사람이 무섭냐?"
을두미가 명선에게 물었다.
"그야 물론 호랑이지요." - P158

"그래, 추수 네 생각은 어떠하냐?"
"호랑이는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 않지만, 사람은 전쟁터에서함부로 상대를 죽입니다. 배가 부르면 호랑이는 오히려 사람을피하지만,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 P158

"인위는 썩었어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은 변함이 없구나"
을두미가 초당 마당에서 폭포수 줄기를 바라다보며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 P160

"허헛, 그 아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네 업이다. ‘업‘이가 어떠하냐? ‘업이 오히려 복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사부님, 고맙습니다."
추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변했다. - P162

그런데 사내의 기척이 사라진 후, 죽은 줄 알았던 노인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컥, 커억, 소리와 함께 칼이 지나간 목에서 핏덩어리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핏덩어리를 손으로 찍어안간힘을 쓰며 흰 광목천으로 된 이불 위에 무슨 글자인가를쓰다가 끝내는 절명하고 말았다. - P165

"흐음, 이불 위에 피로 쓴 글씨가 있군!"
기찰포교의 눈에도 그 글자는 확연하게 왕자와 궁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중대한 사안임을 직감했다.
"며칠 전에 궁궐에서 시녀가 한 명 다녀갔다 들었는데, 아무래도 궁궐과 무슨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 P165

기찰포교는 혼잣소리처럼 지껄였다. 그것은 애써 피해자의가족들을 비롯하여 현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들으라고 하는소리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수하인 포졸들에게도 과장된 말과 몸짓으로 위장하여, 될 수 있으면 사건의 핵심을 숨기려고애썼다. - P166

"아버님은 아무 말씀 없이 처방전을 내주며, 반드시 그대로약첨을 지으라고 해서 그대로 했습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약 봉지마다 약간씩 비소 성분이 가미되어 있었습니다. 하루두 첩씩 스무 첩으로 된 한 재분량을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명의 노인 아들의 설명이었다. - P167

비소 성분이 들어간 약을 달여 먹으면 죽지 않습니까?"
기찰포교가 물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소량이므로 약을 달여 마시는 사람이크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소 성분이 들어간첩약은 특별한 병이 아닌 사람이 장복을 할 경우 위험할 수도있습니다." - P167

죽는 시늉을 하던 방추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국상 명림수부였다. 그 순간 기찰포교는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자신의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죽은 자가 혈서로 쓴 글자의 암시도 그렇거니와, 이사건이 국상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기포는 더럭 겁부터났다. 더 이상 신문을 했다가는 만천하에 비밀이 드러날 것 같아 일단 방추를 다시 하옥시켰다. - P169

국상 명림수부가 관련되어 있다면 필시 궁궐의 왕후와 직결되는 사건임을 기찰포교는 모르지 않았다. 임신이 되지 않는약첩이라면 그것의 용처가 어디인지도 짐작이 갔다. 동빈의왕손 출산 문제를 두고 연나부 세력이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분명했던 것이다.  - P170

그러나 그는 국상과 왕후가 연계된 살인사건을 다룰 자신이 없었다. 그가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기엔 혐의자들의 직급이나 권력이 너무 벅차서,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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