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백 번 이상 읽었던 호학 군주 세종은 유교 정치가진전됨에 따라 시골의 골목 곳곳까지 삼강오상의 윤리가 관철되는 조선을 만들고자 했다. 공맹이 논한 바 하은주 3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권력 구조 역시 그에 근사하게 하려 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총재제, 즉 재상 중심제였다. - P49

의정부 중심의 체제 개편은 필연적으로 재상 권한의 비대를 가져왔다. 세종 재위 후반 의정부에는 황보인이나 김종서 등 국가 중대사에정통한 관료들이 포진해 있었다.  - P49

세종대 후반 이후 문종 대를 거쳐 단종 대의정부에 포진한 이들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이중 좌의정 김종서의위세가 가장 셌다. "황보인은 나약하고 김종서는 권세를 혼자 쥐고 제마음대로 하고 정분은 억눌린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 P50

단종대 의정부 사람으로는 이들 외에 이양 · 정분 · 허후 등이 있었다. - P51

의정부 인사는 아니었지만,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사람으로 분류된인물들이 있었다. 병조판서민신과 이명민 등이다.  - P51

세종은 그 공을 치하해 몇 달 만에 종3품 부정으로 일약 자급을 올려 주었다. 이후 이명민은 재목과 기와 쇠붙이와 석재를 사사로이 빼돌려 잘 나가던 황보인과 정분의 집,
그리고 김종서의 별실을 크게 지어 주었다. - P52

이런 음흉하고 간사한 행동이 지나치다 여긴 병조판서 정인지가 그를 꾸짖었다. 그러자 불만을 품은 이명민은 민신 등과 모의하여 영의정황보인이 직접 도청의 제조를 맡게 했다. 정인지가 다시 반발하자 황보인 등과 사이가 두터운 조극관을 병조판서로 임명하고, 그를 판중추원사로 옮기게 했다. 이 인사는 2품의 판서에서 1품의 판사로 정인지를승직시킨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권한을 빼앗은 것이었다. - P52

문종 대부터 이미 의정부 대신들은 왕을의식하지 않았다. 문종이 세상을 뜨기 직전에도 이들은 본부에 앉아서정5품 사인을 시켜 안부만 물었을 뿐이고, 변변치 못한 의관에 맡겨 놓았을 뿐이었다.
- P53

단종은 즉위한 뒤 교서를 통해 모든 일을 의정부에 맡긴다고 천명했다. 의정부가 주인 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수양과 안평은 단종의 즉위 교서에 나타난바,분경대상범금지주에 자신들이 포함된 것에 반발했다.  - P53

당시 의정부 대신들은 인사권을 독점하고 사사로이 휘둘렀다.  - P54

이들 형제는우의정 김종서의 아들들인데 모친 탈상수일 만에 특지로 임명되었다.
- P54

1453년(단종 1) 1월에는 김종서의 사돈집 사람 김맹헌을 궁중에서 쓰는의약의 공급과 임금이 하사하는 의약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전의감 판사로, 민신의 동서 신전을 수예문관 직제학으로, 김승규를 국가의 대제에 쓸 곡식을 관장하는 전농시 윤으로,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을 사복시 소윤으로 삼았다.  - P54

 함우치가 승지로 임명된 데에는 왕명을 전하는 환관인 김연의 공이 컸다. 당초 함우치는 김종서에게 아부했던 인물이다. 사복시에있을 때 붕어를 좋아하는 김종서를 위해 아침마다 붕어와 메추라기를잡아다 바쳤는데, 그 공으로 첨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가 이때 동부승지로 옮겨 간 것이다. 그런데 이 인사는 김종서가 아니라 환시宦侍에힘입은 결과였다. 오죽하면 김종서조차도 비판할 정도였다. - P54

이보다 앞서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을 대신해 사위 홍원숙이 공조좌랑이 되었고, 다시 그자리에 동서인 강윤이 임명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공조좌랑은 황보인 집안이 교대로 근무하며 녹봉을 받는 체아직"이라며 비웃었다.  - P55

같은 때 가축의 사육과 축산물을 제공하는 일을맡아 보던 전구서승으로 임명된 김자청 역시 김종서의 사위였다. 1453년(단종 1) 9월 종묘서 승으로 임명된 박금손 역시 김종서의 사위였다.
이날 판통례문사가 된 윤삼산은 황보인의 사돈집 사람이었다.
- P54

이처럼 김종서 · 황보인 등은 상피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인사를함부로 했다.  - P55

상피란 일정 범위 내의 친족 간에 같은 관사나 통속 관계에 해당하는 관사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거나 청송관·시관 등이 될 수없게 하는 인사 상규였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아들.
사위 · 아우 · 조카를 서로 바꾸어 천거하며 끌어들였다. 혼인한 집안도특지라 핑계하고 자급을 올려 주고 자리를 옮겨 주었다. 그야말로 원칙없는 인사였다. - P55

의정부 당상 3인은 매일 빈청에 나가서 이조 당상이 올린 사헌부와 사간원·이조와 병조 · 연변 고을의 장수와 수령의 인사안을 살펴보았다. 이때 이들은 임용 예정자 수의 3배수 중에 쓸 만한 자 1인을 취하여 ‘황표‘를 붙여서 단종에게 올렸다. 그러면 단종은 붓으로 그 이름 위에 점을 찍을 뿐이었다.  - P55

이조는 단지 임금의 비답 초안을 쓸 따름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이를 ‘황표정사라고 이죽거렸다.
- P56

이조의 겸판사였던 허후조차 관직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인사에관한 한 모두 의정부에 물어보고 지시를 받았다. 임시로 임명하는 종품 도승과 같은 지위 낮은 관리조차도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임명할수 없었다.  - P56

수양은 조카가 즉위한 후 바로 아래 동생 안평대군 이용과 갈등의 골이 점차 깊어졌다.  - P56

문종은 즉위한 후 동생안평과 연결된 사람을 많이 임용했다. 이용은 내시부와 승직의 인사를 맡았다. 간단한 글을 써 놓은 쪽지를 정청에 보내 관료에게 벼슬을 준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 P57

이용 자신이 딴마음을 품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의정부의 김종서·황보인과 결당한 것은 분명했다. 이는 김종서가 1452년(단종 즉위) 6월 30일 보냈다는 편지를 통해서 확인된다.
이 편지에서 김종서는 인심을 수습하여 반역을 꾀하라고 안평을 재촉했다. - P59

이용은 형이 재위하는 동안 누구보다 특혜를 받았지만 문종이 승하한 뒤로 표변해 정해진 때에 모여서 슬피 우는 곡림에는 한 번도참여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도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 P59

이들 외에 의정부와 6조 등 각 부처에 포진해 있던 이양·민신·조극.
관·조순생·정효강·윤처공·조번·이징옥· 정이한 등도 모두 이용의 우익이 되었다.  - P60

1452년(단종 즉위) 8월에는 성승이 박탈당했던 고신과 과전을 돌려받았다. ‘혹시 변이 있으면 마땅히 나의 말 앞에 설 자‘로 그를 평가한 안평이 힘을 써 구명한 결과였다. 성승은 훗날 죽음에 이르는 사육신 중 한 명이었던 성삼문의 아버지이다. - P60

이용의 사람으로는 황보인도 있었다. 이 둘은 사적 관계로 연결되었다. - P60

수양은 처음에는 안평의 사람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안평 우익의 권세가 안팎을 위협한다며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권람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모두 재물로 사귄 관계이고 용렬한 인재들"이라며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수양의 판단과는 달리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어린 조카 앞에 선 의정부 대신, 그들과 결탁한 동생 안평결국 형 수양은 필연적으로 동생 안평과 최후의 한판을 벌여야만 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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