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수양은 문종의 재위 동안 아버지의 우려대로 관료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비판의 첫째 이유는 부처를 숭상하는 성향 때문이었다. 수양은 세종 대 후반부터 드러내 놓고 불교를 믿었다. - P40
마음 둘 곳을 몰랐던 아버지를 위해 수양은 동생 안평과 함께궁궐 내 불당 건립을 주도했다. 세종의 재위 말엽 불교행사의 중심에는 늘 수양과 안평이 있었다. - P40
이들은 대군의 허물을 헤집고 파헤쳤다. 수양은 언론과전면전을 치러야 했다. 결국 1450년(문종 즉위) 3월 3일 수양은 사헌부헌납 황효원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직접 올렸다. 그가 "불상·불경 · 사찰을 모두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과격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수양은 《춘추》, 《서경》, 《논어》, 《역경>의 예를 들어 그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 P41
형 문종의 비호가 아니었다면, 수양은 탄핵의 칼끝을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때에는 수양이 왕위를 넘본다는 어떤 징조도 없었다. 혈육보다 언론의 촉이 더 예리했던 것이었을까? 수양의 조짐을 미리 잘라야 한다는 대간의 주장은 불과 2년 뒤에 옳았음이 드러났다. - P42
이들의 노력은 끝내 허사로 돌아갔다. 1452년(문종 2) 5월 14일 유시(오후 5~7시)에 39세의 문종은 경복궁 강녕전에서 세상을 달리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세자(후의 단종)는 "나는 어려서 어찌할 줄 모르겠다"며허둥지둥했다. - P44
문종은 천성이 너그럽고 신중했다. 아버지 세종을 롤 모델로 삼아 평생 근신하며 살았다. 아버지를 옆에서 모시면서 경사를 강론하고 역경》과 《예기》도 배웠다. 조맹부처럼 글씨도 잘 쓰고, 활도 잘 쏘고, 날씨 예측도 잘했던 문종은 후원에 친히 앵두나무도 심을 정도로 효를 다했다. - P44
세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효를 멈추지 않았다. 문종은 세종의죽음 후 결국 병이 될 정도로 슬퍼하다가 왕이 된 지 2년 3개월 만에 열 두살 아들을 남기고 죽었다. - P44
이날 수양은 집으로 돌아와 기운이 막힐 정도로 슬퍼하며 울었다. 수양은 항상 자신을 인정해 주던 존재로 형 문종을 기억했다. - P45
어린 왕의 시대는 의정부 시대의 개막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의정부가 권력의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된 데에는 할아버지 세종대 중반의권력 구조 개편이 결정적인 단초로 작용했다. - P48
세종은 1436년(세종 18)의정부에서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는 것으로 체제를 바꾸었다. 1414년(태종 14) 이래 사대문서를 관장하거나 중죄인의 형결을제외하고는 모두 6조에서 전적으로 관장했던 6조 직계 체제를 의정부서사제로 전환한 것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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