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이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형을 대신하는 존재로 등장하게 된 것은 세종대 말엽 아버지와 형 모두 건강이악화하면서였다. - P36
왕비의 쾌차를 빌기 위한 불교 행사가 진행되면서 사헌부·사간원과의 갈등 또한 증폭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448년(세종30) 8월 수양과 안평의 주도로 건립된 궁 안의 불당 문제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 P37
당시 수양은 항상 궁 안에 있었다. 오래도록 투병하던 아버지가 매사를 반드시 자신에게 맡겨 처리하게 했기 때문이다. 수양은 5일간 음식을 먹지 않다가 세종이 회복되고 나서야 비로소 먹을 정도로 지극 정성을 다했다. - P37
명나라 사신에 대한 모든 연회를 아버지 세종을 대신해 주관한 수양은 1450년(세종 32) 윤1월 20일 모화관에서 사신단을 전송했다. 이날예겸 등은 세자의 병을 의심하면서 자신들이 머무는 동안 모화관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음은 교만하고 오만한 태도라 불평했다. 그러자 수양은 형의 건강 상태를 자세히 변론하여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었다. 수양이 명나라 사신에게 일약 신뢰의 아이콘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 P38
이 우여곡절이 지나고 1450년(세종 32) 2월 4일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으로 옮겨 가서 2월 17일 그곳 동쪽별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 P38
자신을 가상하다 여겼던 아버지가 돌아간 후, 남들로부터 성인聖人‘이라는 평을 들었던 수양은 형과의 공생을 위한 또 다른 길을 모색해야했다. - P38
아버지세종은 생전에 맏이인 세자에게 "국가의 편안함과 위급함이 네 한 몸에 달려 있다"고 말하며 책무를 강조했다. 동시에 바로 아래 동생 수양에게는 "국가에 재난이 많을 때는 너희들이 함께 도와야 한다. 너는 보통 여러 아들의 예가 아니고 나라의 안위와 관계있는 존재다"라고 했다. - P39
당시 금성대군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세종은 유교를 전했다. 그 첫 번째는 ‘형제를 대함에 있어서 사랑을 위주로 하되 반드시 법도를 엄히 하여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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