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탕탕! 총소리가 느닷없이 터졌다. 그녀는 푹 고꾸라졌다. 그녀의 가슴에서는 피가 솟구쳐올랐다. 낡고 때에 전 솜옷을 타고 내린 피는눈 위에 새빨갛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큰 눈을 번히 뜬 채 숨이 끊어졌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그녀의 몸을 군홧발들이 에워쌌다. 그 다리는 모두 18개였다. - P179
굴속의 아늑하고 편안함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안 된다. 돼지가 되고, 도깨비빨치산이 되겠단 말이냐. 너는 당원이야. 당원이 될 때 각오한 바가 있지 않았더냐 가자, 비상선을 찾아가자 동지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는 단호하게유혹을 뿌리쳤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 P179
제1비상선은 이제 선이 끊어졌고, 제2비상선은 오늘 안으로 꼭 찾아가야 하는데… 꼭 찾아가야 하는데……. 그는 개털모자 쓴 머리를 눈에 박은 채 잠으로 묻혀들었다. - P180
따꿍! 따꿍! 따꿍! 그는 총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한낮이었다. 따꿍! 따꿍! 따꿍! 따꿍! 따꿍! 따꿍! 총소리는 세 방씩 간격을 두고 울리고 있었다. 손승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토벌대끼리 보내고 있는 무슨 신호라는 것을 알았다. - P180
전우에 시체를 넘고 넘어앞으로 앞으로…...…. 그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마른 억새줄기들 사이로 줄을 선군인들이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 맞다! 정말 작전이 끝났구나! - P181
눈에는 건빵 하나가 목침덩이만큼 크게 보이고 있었다. 그는 넘어지며 건빵 두 개를 덮쳤다. 눈과 함께 건빵을 잡은 그의 손이 잽싸게 입으로 옮겨졌다. 그는 눈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건빵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의 삐쩍 마른 얼굴에는 더없이 흐뭇한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 P182
"그날 밤 마지막 보초가 둘이었는데 바로 그놈들이 개들한테 넘어가서 한 짓이오." 제2비상선에 도착해 중대장에게 들은 말이었다. - P182
손승호는 어지러운 눈길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모여든 대원은 여섯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지만 더는 오지 않았다. 열아홉에서 투항자둘을 빼면, 열한 명이 죽었다는 결론이었다. 손승호는 속으로 박난희를 수없이 부르고 있었다. - P182
날이 밝으면서 도당사령부의 병력들이 다 모이기 시작했다. 전부모인 병력은 3분의 1로 줄어 있었다. 대원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아니었다. 그 속에서 박두병의 무사를 확인하며 손승호는 잠깐이나마 박난희를 잃은 쓰라림을 잊을 수 있었다. - P182
그러나 대원들이 받은 또 하나의 충격은 도당정치부장인 오원식의 투항이었다. 그는 25명의 부대원들을 데리고 고스란히 적진으로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 P183
중앙민청 부위원장을 거친 경력과 도당정치부 책임자라는 그의 직책 때문에 대원들이 받은 충격은 그만큼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급간부들의 당성은 철통같고, 투쟁력은강철 같다는 것을 일반대원들은 언제나 굳게 믿어왔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들을 자신들에게 되풀이해 학습시킨 사람들이 그들이었던 것이다. - P183
"참 기가 막히고 수치스러운 일이오. 그게 이북 출신 이론가들의중대한 문제점이오. 투쟁의 바탕이 없이 자란 온실 사상가들의 작태가 그것 아니겠소. 이건 두고두고 비판·검토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오. 그러나 말이오. - P183
당적 입장에서 떠나서 볼 때 그건 어느 사회에서나 문제가 되는 지식인들의 위선과 기회주의가 발동시킨 추악함 아니겠소?" - P183
빨치산들은 보투를 열심히 하는 한편으로 토벌대들이 버리고간 물건들을 확보하기에 시간을 보냈다. 능선과 능선을 잇느라고온산에 거미줄을 치듯 깔아놓은 야전용 전화선은 말할 것이 없었고, 더 중요한 것은 총알줍기였다. - P184
이총알줍기를 하다 보면 총알이 가득 든 탄대를 줍는 대원들도적지 않았다. 무거워서 그런 것인지 싸움을 하기가 싫어서 그런 것인지, 군인들은 탄대를 송두리째 버리고 간 것이었다. - P185
"이왕에 선심 쓸 바에 총도 한 자리 내고 가제 그랬으까이" - P185
옷을 까내리자마자 쌔애 오줌발이 거세게 뻗어나갔다. 빨치산들은누구나 대소변을 오래 참았다가 누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오줌발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 P185
빨치산에서는 대소변 보는 시간이 따로 없었고, 특히 행군 중에는 소변도 자주 볼 수가 없었다. 또 아무데서나 대소변을 볼 수도 없었다. 적정이 불안한 지역에서 잘못 엉덩이를 까고 앉았다가 총알밥이 된 빨치산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소변을 오래 참는 것은 습관이 되지 않을 수가없었다. - P185
"잉, 맞소. 그 오짐발 참말로 씨기도 씨요. 좌우당간 쌀가마니럴찾어낸 오짐발잉께 장허고 또 장허요." "그 장헌 오짐발 임자가 뉘기여?" - P186
"호로자석덜, 즈그덜끼리넌 꾀지게 한다고 했는디, 아나 요놈덜아 우리가 먼첨 입맛 다셔분다" "히히, 요리 쌀가마니 캐묵는 맛이 꼬시기가 무신 맛이까?" "꼬시기로야 깨소금맛이고, 달기로야 조청맛 아니겠소?" - P187
모두는 무거워했다. 그 이유는 곧 판명되었다. 가마니에 든 것은 쌀이 아니라 총알이었던 것이다. 총알들은 탄창에 여덟 발씩 끼워진채 가마니 속에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두 몇천발이 될지 모를 엄청난 양이었다. - P188
남녀대원들은 그 뜻밖의 일에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쳐댔다. 그들에게 총알은 쌀과 똑같이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던 것이다. - P188
처음 총알을 찾아냈던 남자가 나섰다. 그는 탄창 사이에 끼워진종이쪽지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러나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승리의 그날까지 용감히 싸우시오. 종이쪽지에 적힌 글이었다. 그것은 어느 동조자가 남기고 간 짧은 편지였다. - P190
"그 많은 적의 병력에 둘러싸이고, 그 엄청난 화력에 당해가면서, 춥기는 얼마나 추웠고, 굶기는 또 얼마나 굶었소. 그러면서도이만큼들 살아남았다는 건 기적이 아닐 수 없소. 그래요, 분명 기적이오, 중국공산당이 대장정을 하면서도 이런 식의 악조건 속에고립된 적은 별로 없었소. - P191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빨치산들이 북풍 매몰차고 눈이 깊은 북쪽 골짜기들을 피해 남쪽 골짜기들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북쪽 골짜기에는 고작해야 남원군당이 달궁골과 뱀사골에 산재해 있는 정도였다. 국방군의 그런 정확한 정보파악에 간부들은적이 놀랐던 것이다. - P193
야간전투는 야간전투일 수가 없었다. 이 능선저능선에서 쉴 새없이 쏘아올리는 조명탄으로 눈 덮인 골짜기는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빨치산들의 모습은 푸른빛 품은 싸늘한 조명탄 불빛 아래 송두리째 드러났다. 어둠의 보호를 받고 있던 빨치산들에게 그 갑작스러운 불빛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였고, 대항할 방법이 없는 무기였다. - P194
빨치산들의 대열은 금방 헝클어지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몸 숨긴 데를 찾아 우왕좌왕하였다. 그런데 토벌대들은 박격포를 쏘아대고, 기관총을 갈겨대고, 수류탄을 던져댔다. 화력이 비교가 안 되는 데다 토벌대는 이미 능선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 P194
어둠에 묻힌 눈 쌓인 골짜기를 그들은 자를 그려가며 올라붙고 있었다.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올라서는 순간 그들을맞이한 것은 무섭게 몰아치는 강풍과 함께 얼굴을 후려갈기는 모래알들이었다. - P195
그들은 하나같이 숨이 막히는 충격을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야 했다. 매섭게 휘몰아치는 북풍에 섞여 그들의 얼굴을 후려때리고 있는 것은 모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북쪽 비탈에있는 수많은 나뭇가지들과 풀잎들에 얹혔던 눈이 낮에 녹으면서자디잔 고드름으로 맺히게 된 얼음이었다. 그것들이 거칠게 불어대는 강풍에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쪽 골짜기에 비해 북쪽 골짜기가 얼마나 더 추운가를 그들은 실감하지않을 수 없었다. - P195
비행기는 지난번처럼 날마다 삐라를 뿌리고 다녔다. 그뿐만 아니라 골짜기 골짜기를 저공비행으로 날아다니며 귀순권고 방송을 해댔다. - P197
"금메, 오살헐 년이요. 동지덜내고 도망질헌 것도 워디 헌디저리 뻔뻔시럽게 주딩이 까서 인자 우리덜 맘할라 심숭생숭하게맹글고 있으니." - P198
"저 개자석덜 한두 분 겪어봤다고 실답잖은 소리 그리 허고 그요? 해방되고 지금꺼정 빨갱이야 허먼 그리 악독허고 몰악시럽게때려죽이고 쳐죽이고 현 것 다 까묵어뿌렀소? 인공 만세 한 분 불렀다고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놈덜인디, 우리로 치자면 빨갱이중에 빨갱인디, 으쩌요, 살레줄상불르요?" - P199
"그 말이 맞소, 전분 참에 헌 일만 봐도 저놈덜 속이 씨커먼 것이야 화경 딜에다보디끼 훤허요. 우리 동지덜얼 그 씨커먼 전홧줄로칭칭 묶어 벌집얼 맹글어 죽인 것이야 우리덜 눈으로 똑똑허니 본것이고, - P199
거머시냐, 천왕봉 아래 경남도당 쪽에서 경찰놈덜이 여자대원덜얼 잡아 쇠꼬챙이럴 불에 달과갖고 양쪽 볼기짝에다가 한문으로 공비라고 쓰고 나서 총살시킨 일은 동무덜도 다 아는 이약아니오. 삐라럴 뿌리덜 말든지, 잡은 사람덜얼 그리 몰악시럽게 죽이덜 말든지, 고런 숭악한 놈덜얼 믿기럴 워디럴 믿겠소." - P199
지난번과 또 달라진 것은 비행기들의 본격적인 공격이었다. 이해룡의 부대는 뱀사골로 옮겨오자마자 비행기의 공격을 받았다. - P200
"워메 엄니, 워메 뜨거라!" 비명과 아우성이 터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서너 명의 대원이 온몸에 불이 붙어 날뛰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그 일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그때 또 이상스런 폭음과 함께 불길이 팍팍팍 일어났다. 그 불길에 싸인 대원들이 또비명과 아우성을 지르며 불붙은 몸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 P201
숨었던 대원들이 모두 뛰쳐나와 눈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다섯 사람의 몸에 붙은 불을 겨우 껐다. 그러나 세 사람은 이미 숨이끊어진 뒤였다. 그리고 두 사람 중에 하나도 곧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한 사람만이 얼굴이 온통 그을린 채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죽은 네 사람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비행기는 어디로 갔는지 더는 날아오지 않았다. - P202
간신히 목숨을 건진 대원을 트로 옮겼다. 그러나 화상이 심해 그는 혼수상태로 다음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들은 화상을 치료할수 있는 약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 P202
네이팜탄 공격은 그 뒤로도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단단히 경고를 했지만 희생자들은 자꾸 생겼다. 불시에 나타나는 비행기의 공격은 불가항력이었던 것이다. 빨치산들은 네이팜탄을 ‘불탄‘이라고불렀고, 그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 P203
네이팜탄은 빨치산들의 생명 앗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다 때 아닌 산불을 일으켰다. 그러나 산불이 지리산을 온통 다 불태우지 않고 저절로 꺼지고 하는 것은 눈이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 P203
대원들은 앉자마자 담배들을 말기 시작했다. 하대치도 쌈지를꺼냈다. 그러나 쌈지에 든 것은 진짜 담배가 아니었다. 그건 단풍잎을 따서 담은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담배가 귀해지기 시작하는겨울인 데다가 토벌대의 작전마저 길어지다 보니까 담배가 동이나고 말았다. - P203
두 사람이 돌아가자 하대치는 또 강동기에게 죄를 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의 절친했던 동무 김복동이가 재귀열로 죽은 다음지난번의 싸움에서 마삼수마저 죽어버렸던 것이다. - P205
같은 사랑방동무 마삼수까지 죽게되자 강동기는 영 풀이 꺾여 보였다. 다시 원기를 찾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마땅한 묘책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 P205
그것이 겨울에 마을을 통과하는 방법이었다. 겨울에는 다른 계절에 비해 이탈자가 부쩍 늘어났다. 날씨는 땡땡 춥고 배는 고프고, 불은 마음대로 피울 수 없고, 잠은 눈 위에서 자야 하고, 악조건을 다 갖춘 것이 겨울이었다. - P206
그런데, 창호지에 밴 불빛, 거기에비친 아기 어르는 그림자,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즐거운 웃음소리, 아기 우는 소리, 그런 것들에 직면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그때 주저앉아버리면 영락없이 이탈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투도 겨울보투가 제일 어려웠다. - P206
한끼라도 더 벌자고 밥을시켜먹게 되면 그동안에 방에 들어앉게 되고, 방에 들어앉으면 몸만 녹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녹아내려 탈이 생길 위험이 그만큼커졌던 것이다. 그런 일을 미리 피해도 겨울보투에서 이탈자가 한두 명씩 생겨나곤 했다. - P207
역시 우리 대장님이 최고시여. 우리 대장님언 둘도 없는 영웅이시여, 영웅! 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손전등불빛이 어둠을 가르는 순간 천점바구가 위험에빠진 것을 직감하고 대원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 P209
70여명의 대원들은 총을 난사해대며 돌격했다. 그들이 갈겨대는 총소리는 저쪽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천점바구를 구할욕심에다가,총소리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아 돌격으로 밀어부치고 있었다. - P209
장교의 지휘를 받고 있지 않은 경우에사병들 사이에서는 그런일들이 더러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의외로 쉽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기네와 빨치산과의 연관관계를 밝히기에 바빴다. - P213
경찰에 비해서는 군인에 대한 느낌이다소 나은 빨치산들로서는 그런 젊은 군인들의 행동을 ‘순진하고솔직하다‘고 받아들였다. - P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