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투쟁을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혹한과 싸우고, 굶주림과 싸우고, 적의 총구를 피하는 세 가지가 한꺼번에 걸친 싸움이었던 것이다 - P134

"동무들, 다 같이 힘냅시다. 지금부터 보투 나갈 부대를 편성하도록 하겠소!"
이해룡은 목청을 돋우며 몸을 일으켰다. - P135

군토벌대는 순천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광양·구례·곡성을 잇고, 왼쪽으로는 벌교·장흥·화순을 잇는 공격선을 구축했다. 그 동그라미 안에 전남도당의 살아 있는 유격지구는 다 포함되었다. 백.
운산지구·백아산지구 조계산지구 · 유치지구가 그것이었다. - P136

그러나 박격포공격은 지리산에서처럼 그렇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빨치산들이 미리 대비하고 있었는 데다, 그들은 전투경험이 많은 무장병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격이 끝난 다음에는 토벌대와 빨치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 P137

염상진은 군토벌대가 1차로 화력전을, 2차로 병력전을 전개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처음부터 모든 대원들을 소조로 나눠분산시켰다. 최소단위 두 명씩으로 나눠지고 그때그때의 상황에따라 네 명으로, 여섯 명으로 뭉치는 식으로 기동성을 살리고, 또상황이 변하면 일시에 흩어져 두 명씩 분산되는 산개전을 벌이기위해서였다.  - P137

그건 적의 화력전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면서, 병력전을 교란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런 기본전술은 이미 각 지구에도 전달되어 있었다.  - P137

빨치산들이 군토벌대보다 낫다는 것은 지리를 잘아는 것과 산을 빨리 타는 것뿐이었다. 그 두 가지를 십분 활용해서 곤경에서 벗어나는 길은 산개전뿐이었던 것이다. - P137

"부, 부사령 동지・・・・・ 지난 어, 엄니도 아부지도 없어서………… 부사령 동지럴...... 부모맹키로 생각했는디요………."
한대진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염상진은 그뜻밖의 말에 가슴이 컥 막혔다. - P140

"배 동무넌 빨치산이 첨에 될 적에 머시라고 배왔소?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 맞어 죽을 각오허라고 안 그럽디여? 배 동무넌 그적에 그러겠다고 안 혔소. 인자 그 각오를 실천헐 때가 온 것이요.  - P156

등잔 하나가 굴 안의 어둠을 가까스로 밝히고 있었다. 재생총알을 한쪽에 수북이 쌓아놓은 그들은일손을 놓고 있었다. 탄피가 더 공급되지 않아 일거리가 없었던것이다. - P157

그들은 바깥에서 진짜 총알을 주워서 싸우고 있다는 것도, 양식이 바닥나 모두 굶으며 싸우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P157

손승호는 얼어죽고, 굶어죽은 두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얼어죽은 사람은 사흘 전에 잠든 채로 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하필이면 자신이 그 죽음을 제일 먼저 확인했던 것이다.  - P163

손승호는 핏기 없는 그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며, 그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무슨 생각을 했길래 저런 얼굴로 죽을 수 있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 P164

 어쨌거나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웃음을 띠고 죽어간 그 동지는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는 투쟁의 현실을 불만스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던 것만은 그웃음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든 간에 그렇게 웃음 띤 얼굴로 죽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 P164

손승호는 보초 첫 번째 조가 되었다. 지정된 자리로 옮겨간 그는바지주머니에서 삐라뭉치를 꺼냈다. 손이 곱아 마음처럼 빨리 꺼내지지 않았다. 여러장의 삐라를 펴서 양쪽 발밑에 놓았다. 눈이녹고, 발이 시린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방법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 P165

삐라는 워낙 종이가 두껍고 질이 좋아서 서너 장씩을 발밑에 깔면 눈이 녹으면서 발이 얼어드는 것을 막는 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매일같이 뿌려지고 있는 삐라는 그동안 엉뚱한 쓰임새로 바뀌어 있었다. 담배말이 종이로, 밑씻개 뒤지로, 간부들의 잡기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담배말이나 뒤지로는 약간 두꺼웠지만 요령 좋게 비벼대서 부드럽게 만들어 쓰는 솜씨들을 발휘했다.  - P165

그런데 남자대원들 모르게 여자대원들만이은밀하게 삐라를 사용하는 데가 있었다. 그것은 몇 장씩 겹쳐 접으면 그럴듯한 1회용 생리대가 되었던 것이다. 남자대원들이 솜씨를부리듯 여자대원들도 종이를 보들보들하게 손질해서 천보다 편리한 생리대로 써먹고 있었다. - P166

손승호는 휘몰아쳐오는 북풍을 가슴 뻐근하도록 들이켜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현기증이 일어나며 귓속이 찡울리는 이명이 길게 꼬리를 끌었다. 수시로 일어나는 허기증상이었다. 그는 총을 움켜잡으며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레 동안곡식은 한 톨도 입에 넣지 못하고, 먹은 것이라고는 눈덩이밖에 없었다.  - P167

언제부터인가 속이쓰리고 아리던 것도 점차로 가셔지게 되었다.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밥을 굶기 시작해서 사흘째가 고비였다. 첫날은 배가 고프다는 느낌만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속을 긁어내리는 것처럼 쓰리쓰리하고, 뱃속 여기저기가 비비 꼬이면서, 이빨 사이사이에서 신 침이 지르르 흘러나오고는 했다.  - P167

사흘째가 되자 속을 후벼파는 것처럼 쓰리고 도려내는 것처럼 아리면서, 허리가 휘청휘청 꺾였다. 그리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고 어지럽기까지 해 몸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입 안이 타들면서 목에서는비위를 틀리게 하는 역한 냄새가 넘어왔다. 그저 정신없이 눈을 뭉쳐서 씹어대는 수밖에 없었다.  - P168

손승호는 밀려드는 졸음을 막아가며 발가락들을 꼼지락거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간부들이입이 닳도록 되풀이하는 유일한 동상예방법이 그것이었다.  - P168

손승호는 혀끝을 깨물며 눈을 부릅떴다. 보초교대처럼 반가운 것이 없었고, 한편으로 잠을 깨워야 하는 상대방에게 그처럼 미안한 일도 없었다.
손승호는 그런 엇갈리는 감정으로 보초교대를 하고 방금 상대방이빠져나온 자리로 파고들었다. 눈 위에 솔가지를 꺾어다 깔고, 그 위에 담요 한 장을 펴고, 또 한 장을 덮은 잠자리였다.  - P169

포위다! 아래로 뛰어서는 안 된다. 비탈을 타야 한다. 옆으로 빠져야 한다. 손승호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리는 아래를향해 뛰고 있었다. 주위는 좀더 밝아지고 있었다. 총소리는 더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 P170

옆으로, 옆으로 비탈을 타! 내려가면 죽어! 손승호는 아래로만내닫고 있는 다리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생각은 멀쩡한데도 마음대로 방향이 바꿔지지 않았다. - P170

산죽밭은 안 된다, 산죽밭은 안 된다. 그는걸으면서 자신에게 환기시키고 있었다. 겨울산에서 빨치산들이 제일 숨기 좋은 곳이 산죽밭이었고, 토벌대들이 제일 먼저 수색하는곳이 산죽밭이었던 것이다.  - P173

포위를 당해 산 아래쪽으로 뛰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뒤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급한 상황 속에서 방향을 바꾸기가 어렵듯이 마땅히 몸을 숨길 데가 없는 눈 덮인 산에서 푸른 잎들을 매달고 촘촘히 서 있는 넓은 산죽밭으로 숨어들고 싶은 유혹을 떼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P173

"보초병 어디 있나, 보초!"
중대장의 외침이었다.
중대장은 왜 보초를 찾았을까? 그때 보초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인가?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면, 어디로 간 것인가? 혹시 그들이!
- P175

여자의 몸으로 무슨 일은 당하지 않았을까………… 무사해야할 텐데…………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그녀를 챙기지 못하고 혼자서 내뛴 것이 뒤늦게 죄의식으로 느껴지며 몸을 비틀리게 했다.
- P176

지리산을 떠나오며 손을 맞잡은 뒤로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한 그루 꽃나무였다. 그녀는 산에서 발견한 산생활의 또 하나의 의미가 되어 있었다.  - P176

한편, 박난희는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고 있는 산속을 혼자 걷고있었다. 총을 갖지 않은 그녀는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리고 있었다. 모두 산산이 흩어질 때 그녀도 발이 내딛는 대로 정신없이뛰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졌던 것이다. 그때 칼빈총도 잃어버렸고, 무릎도 삐게 되었다. 심하게 다친 것이 무릎이었고, 결리고아픈 데는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 P177

결리고 아픈 데를 주물러가며 몇 시간을 보낸 그녀는 오후가 되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비상선을 찾아나섰다. 그녀의 의식 속에는 부대에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모든빨치산들의 생각이 그렇듯 그녀도 부대에서 떨어져 ‘돼지‘가 되면곧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 P177

그녀는 마침내 울부짖고 말았다.그목청껏뽑아대는 소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녀는 이미 판단력을 잃고 있었다. 무대가수인 그녀의 유달리 크고 탄력적인 목소리는 눈발 속에 긴 메아리로파문을 짓고 있었다.
"손 동무우! 손 동무우!"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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