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요. 내일부턴 주사가 좀 아파질 게고, 요모조모로 공격이 가해져올 텐데요. 어떤 싸움에서나최후의 승리가 문젠데, 병원에서 환자야 별수 있나요."
아주 느릿한 세 번째의 목소리였다. - P86

"어쨌거나 양 대위는 전선에서나 병원에서나 여자들과 싸울 복이 터진 모양이오. 그게 대체 여복인 거요, 여난인 거요?"
- P86

"예, 허리가 좀 아픈데, 이거야 이따가 간호장교가 오면 주물러달라고 할 겁니다."
양효석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거야 기술껏 하세요." 군의관이 따라 웃고는, "그런데 축하할일이 생겼습니다" 하고 말했다.
"축하요? ……………."
"예, 지난번 전투의 무공으로 소령 특진이 결정됐다는 전통이 내려왔습니다." - P91

그런데 제석산 앞산자락을 살짝 깔고 앉은 상고에 어젯밤 빨치산들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부잣집들을 골라 곡식을 털어갔는데, 어찌나 감쪽같이 그 일을 하고 떠났던지 그들이 다녀간 것을 아는 사람들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많을 지경이었다.  - P93

"그나저나 밤손님덜이 한분 걸음 트기 시작혔응께 자꼬 오는 것이 아닐랑가? 그리 되면 우리만 새중간에 찡게서 홀태질 당허니라고 피 보틀 일이여.  - P95

우리친정동네넌 밤손님덜헌테 곡식 털리고, 순사덜헌테 홀태질당하고 험시로 사람덜이 이중으로 고초 겪음서 다미쳐라고 해요." - P95

"바랠 것이 머시가 있겄소. 이놈에 난리나 싸게 끝나기럴 바래제"
"그러제, 이짝으로나 저짝으로나 난리가 싸게 끝나야제 요래갖고넌 죽도 밥도 아니시.해방되고 이날 이때꺼정 요리 징허게 체질얼당헌께 인자 입에서 씬물이 나고 징글징글허구마." - P95

참말로, 은제나 사람 사는 시상이 올란지, 지대로 묵지도 못험시로 요리 가심 통게통게허고 사는 것도 인자 징상시럽구마."
"근디 말이여, 어지께 밤에 혹여 외서댁이 안 왔을랑가?"
"뜸금없이 무신 소리여?" - P95

"하면, 하면, 입산헌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봤어도 안 본 것으로 혀야 써 입산현 사람덜이야 입산헌 사람덜이고, 남치기 식구이나 살어야 쓴께 입으로 죄짓지 말어야 써요런 시상은 그저 새댁 시집살이 허대끼봉사 3년, 귀먹쟁이 3년, 벙어리 3년으로 사는것이 질이시" - P96

동네사람들의 눈을 피해 세 여자가 모여앉아 있었다. 김복동의아내 장흥댁,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 마삼수의 아내 목골댁이었다. - P96

"나가 말이여 이 시상에서 질로 부런 사람이 딱 한나여. 고것이우리 동선디, 나도길자만 없었음사동서맹키로 입산혔을 것이여. 요리 피보틈서 사느니 남편 옆에서 하로라도 맘 편하게 살다죽는 것이 낫제, 항, 고것이 훨씬 낫제." - P99

"봇씨요, 강동기, 김복동이, 마삼수가 워찌
"강동기, 마 머시기넌 몰르겠고, 김복동이 죽었소."
누군가의 대꾸였다.
"야아? 김복동, 복동이가! 고것이 은제요?"
한 노인은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을 따라붙으며 물었다.
"몇 달 되았소." - P100

빨치산의 달라진 전술에 따라 10월 한 달 동안 전남북 일대의후방교란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특히 철도 파괴와 열차 기습, 교량파괴가 두드러졌다.  - P101

11월 2일에 전라북도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진것은 바로 그러한 상황변화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전라북도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고 하지만 그 영향은 전라남도에도 똑같이 미치고 있었다. 그건 전라남 · 북도당의 빨치산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 P101

보성 경찰서장과 벌교 경찰서장이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하고있는 시간에 회정리 3구에서는 한 여자가 그 동네를 떠나고 있었다. 구빨치로 투쟁하다 죽은 유서방의 아내 샘골댁이었다. - P103

샘골댁이 목골댁을 보며 혀를 차댔다. 목골댁의 눈밑 얼굴에는검누르푸리한 멍이 큼직하게 잡혀 있었다. 며칠 전에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주먹다짐을 당한 자리였다.
"냅두씨요, 빨갱이 마누래란 표식잉께."
목골댁이 쓰고도 쓸쓸하게 웃었다. - P104

유서방 죽었단 소식 듣고 난 담부텀 사지에 맥아리가 탁 풀어짐스로 그짱짱허든맴도 허물허물 녹아내레뿌렀소, 나럴 쫄쫄이 고상만 시킨 그 남정네가 멋이간디 그리도 심이 탁 풀어지는지, 알다가도 몰를 일입니다. 지집헌테넌남정네 믿는 맴이 따로 있고, 새끼덜 믿는 맴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사 알었소.  - P105

갈수록 시상이 변혀 빨갱이집구석으로 몰아치는 사람덜이 마실에 늘어간께 새끼덜이 기가 죽어워디 더 키울수가 있어야제라 못 입히고, 못 믹에 키우는 것도 서러운디 기할라죽어 옆걸음침서 살어야 허는 그 서러움이 을매겄소. 긍께로 우리내력 몰르는 디로 떠야제라" - P105

"금메말이요, 날이 갈수록 시상인심이 험허게 변허요. 왕주댁맹키로 그리 경우 발르고, 무신 일이나 공평허니 생각허든 사람도 빨갱이야 허먼 눈에 불얼 키고, 신짝얼 벗어붙이고 뎀비니  - P105

우람하고 골이 많은 산 명산의 산신령들은 다남자 형상인데 어찌하필 지리산만 여자일까. 천왕봉 다음으로 높으면서 100리가 넘는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반야봉이 바로 그 여신령을 상징하고 있다. ‘반야‘라는 말에는 불교적 의미 말고도 귀녀(鬼女)라는 뜻도 - P108

그래서 그런지 반야봉은 흡사 여자의 봉긋하게솟은 두 개의 젖무덤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전설대로 하자면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은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P109

 글쎄, 빨치산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너무 추상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이다. 어쨌든 지리산은 역사 위에서 투쟁하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산이었고, 죽음을 맡긴 산이었다. 결국 지리산은 역사의 무덤이었다. 그 지리산을 이제떠나려 하고 있었다. - P109

"국방군이 투입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건 1949년 겨울처럼 동계공세를 하자는 것일 거요. 그때에도 적들은 효과를 봤으니까요" - P115

"날 염려하는 두 동지 마음 고맙소. 그러나 간부보존을 따지자면세 동지들도 정찰에 나서면 안 되는 것이오. 해당행위가 아닌 한위기상황 앞에서 원칙은 옆으로 밀쳐지게 돼 있소. 이건 대원들 수천명의 생사가 달려 있는 중대사요. 더재론하지 말고 내 의사를접수해 주기 바라오." - P117

지리산 밑자락을 구불구불 감돌아 흐르고 있는 섬진강은 전남도당의 빨치산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장애였다. - P118

김범준은 남쪽방향인 마산면 쪽을 맡았다. 매복을 피해 계속 산자락을 밟으며 남쪽으로 이동했다. 산세가 약해지면서 어둠 속 저편으로 서시천 들판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그런데 별로 멀지 않은 거리에 밝은 불빛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20여 개의 그 불빛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P118

지난 10월 25일에 휴전회담 장소를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겼고, 그 한 달 뒤인 11월 27일에는 30일간의 잠정적 군사경계선 획정을 합의했다.  - P121

모든 전선에 걸쳐서 30일 동안 쌍방이 공격을 중지하기로 한 소강상태를 이용해서 11월25일에 먼저 남원에 백선엽야전군사령부가 설치되었다.  - P121

그리고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수도사단과 8사단이 지리산 일대로 급히 이동했다. 따라서 기존하고있던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경찰병력과 군병력도 거기에 발을 맞추게 되었다. - P121

12월 1일 마침내 부산·대구를 제외한 각 지역에 비상계엄령이선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2월 2일 서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이개시되었다.
눈 덮인 지리산 골짜기마다 박격포탄들이 작렬해 대기 시작했다. - P122

그런데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느닷없이 비명소리들이 찢어지며 폭음에 휘감기기도 했다. 그건 비트에 포탄이 떨어진 것이었다. 포탄이 쉴 새 없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장을 하지 않은 그들은 몇 명씩 조를짜서 비트에 숨어 있다가 포탄공격의 위협을 더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이었다.  - P122

그들을 향해서도 포탄은 사정없이 떨어졌고, 폭음에비명이 섞이면서 그들의 몸은 솟구치는 빛살과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몸뚱어리는 터지고 갈라지고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흰 눈 위에는 시뻘건 피가 낭자하게 뿌려졌고, 몸에서 떨어져나간 팔다리들은 눈을 핏물로 적시며 한참씩 푸들거리는 경련을 일으켰다.  - P123

그리고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폭음을 이겨내며 허공을 쥐어뜯다가 끊어지고는 했다. 배가 터져 내장이 다 흘러나온사람, 가슴이 파헤쳐진 사람, 얼굴 반쪽이 날아가버린 사람 머리통이 떨어져나가버린 사람, 팔다리가 없어져버린 사람, 박격포탄을맞은 사람들의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고, 곧 숨들이 끊어지고 말았다. - P123

비무장대원들은 골짜기의 양쪽비탈을 타고 위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고무신이나 짚신이 대부분인 그들의 발에 눈덮인 비탈이 얼마나 미끄러울 것인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 데다 그들의 뒤를 박격포탄이 쫓고 있었다. 그들은 미끄러지고 넘어지고구르면서도 사생결단 비탈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 P125

이렇게 전체가 움직이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비무장들을 부대별로 분산시키고 거기다가 무장대 몇 명씩을 붙이는 것이 옳을까.  - P125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무엇인가 적을무찌르는 것인가 아니다. 비무장대원들을 보존시키는 것이다.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생명을 지키게 해 그들을 무장대로 바꾸는 것이 내가 할 임무이다. 그렇다면 소조로 분산시켜야 한다. 그것이 희생을 줄이는 유일한 길이다.  - P126

이해룡은 그때서야 국방군들이 지리산을 완전히 둘러싸고 일시에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걸령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구례 쪽에서 시작된 부분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지리산 전체를 둘러싸고 골짜기마다 적들이 파고들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P127

그때 동쪽에서 비행기가 날아왔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흩어지며엎드렸다. 그러나 비행기는 폭격기가 아니었다. 비행기는 눈가루를뿌려대듯 하얀 것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하얗게 반짝거리면서무수하게 흩날리는 것들이 삐라라는 것을 그들 모두는 금방 알아보았다. - P128

이해룡이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삐라들이 여기저기 떨어져내렸다. 그는 한 장을 집어들었다.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독 안에 든 쥐를 국방군이 총으로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글씨가씌어져 있었다. ‘너희들은 독 안에 든 쥐다. 빨리 투항하면 살 수 있다. 그 밑에 적힌 것이 ‘야전군사령관 백선엽‘이었다. - P129

군인의 작전법은 경찰과는 정반대였다. 경찰은 골짜기의 아래서부터 위로 밀어올리는 데 비해 군인은 능선을 따라 산으로 올라와서는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아래로 밀어내리는 작전을 썼다.  - P129

그건 화력으로나 병력으로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입장에서 나오는 작전이었다. 그건 공격을 우선으로 하는 일종의 포위작전이었다. - P129

 그렇다고 산죽밭이 안전한 은신처도 아니었다.
적들은 산죽밭만 보면 난사를 해댔던 것이다. 그러면 느닷없는 비명이 터져나오기도 했고, 그 속에 숨었던 대원들이 도주하기도 했다. 이해룡은 그 넓고 넓은 지리산이 갑자기 손바닥만 하게 좁아져버린 것을 느꼈다. - P130

가끔 군인의 시체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시체들은 거의가맨발에 속옷바람이었다. 그 경황 중에서도 앞서간 대원들이 ‘무장획득‘과 ‘월동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는 것에 이해룡은 어떤 처절감을 느끼고는 했다.  - P131

비행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삐라를 뿌려대고 있었다. 그 삐라들은 눈 위에 떨어져 바람을타고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날이 갈수록 날씨는 혹독하게 추워지고 있었다.  - P131

눈은 자꾸 내리고, 눈이 그치고 나면 살을 후벼파는 것같은 강풍이 휘몰아쳤다. 밤이되면 날씨가 더욱 추워졌지만 불을피우지 못한 채 군인들이 피워대는 능선의 불길만 바라보며 꽁꽁얼어야 했다.  - P131

추위는 어찌어찌 견딘다 하더라도 문제는 비상식량이다 떨어진 것이었다. 이해룡의 소조에 식량이 동이 난 것은 닷새째였다. 그동안에 생쌀을 씹어오면서도 절약을 할 만큼 했던 것이다. - P131

 네 사람씩 몸을 바짝바짝 붙이고 생솔가지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네 사람이 담요 한 장으로 몸을 둘렀다. 나머지 두 사람은 보초였다.  - P132

그렇게 하고 앉으면 서로서로의 체온이통하고, 또 담요가 다소나마 바람을 막아주어 어느 사이엔가 모르게 잠이 들고는 했다. 발은 아려빠지다못해 감각이 없어진 지오래였고, 바람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피로와 허기는잠을 불러들였다. - P132

 염상진·안창민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 답답해라. 직위가 높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아니다. 무슨 일을 의논할 사람도, 물어볼 사람도 점점 줄어들면서이렇게 외롭기만 하니까. - P133

"우리는 역사를 믿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 죽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내일로 확정된 역사의 승리를 위해서다. 우리는 비록 죽더라도 우리의 투쟁은 역사 위에서 반드시 되살아난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그런 확고한 역사의 신뢰 없이 진정한 투쟁은 나올 수 없고,
현실적 성공만을 바라면서 투쟁에 나섰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파렴치한 기회주의다."
염상진 선배의 말이 바람 속에서 쟁쟁히 울려오는 것을 이해룡은 듣고 있었다.그말은 일찍이 1949년 겨울, 투쟁이 최악의 상태로 몰릴때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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