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다시 오겠다던 민기홍은 더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관절과 그 부위를 재수술받았다. 그러느라고 20여 일을 더 병원에 머물렀다. 그래도 민기홍은 다시 만나지 못한 채 거제도로 떠나게 되었다. 재수술도 민기홍의 힘이었다는 것을 김범우는 잊지 않았다.
재수술까지 했지만 다리는 끝내 완치되지 않았다.  - P299

자유로워지고 당당해져야 해, 의식이 멀쩡한데 절름발이 정도가문제야 절름발이의 상처가 의식을 병들게 하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 그건 자포자기의 허약일 뿐이다 ……. - P300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개울둑 위에 불쑥 나타난 것은 총을 겨눈 미군들이었다.
"잠깐! 쏘지마, 쏘지마! 난 인민군이 아냐. 대한민국 국민이야.
인민군에게 강제로 끌려나간 대한민국 국민이란 말야!"
김범우는 두 팔을 들어올린 채 기를 쓰며 외쳐대고 있었다.
- P301

응급처치만을 받아가며 부산의 수용소까지 도착하는 데 나흘이 걸렸다. 그동안에 파편들이 박힌 상처부위는 염증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릎 가까운 상처에서 일어난 염증이 관절에까지 퍼지기시작했던 것이다. - P301

고향이 남쪽이고, 의용군으로 분류된 김범우는 ‘6‘자가 앞에 붙어 두 자릿수의 일련번호를 이루고 있는 ‘62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북쪽 출신 포로들은 ‘ㄱ‘자가 앞에 붙어 일련번호를 이루고 있는 수용소에 분리시키고 있었다. - P302

김범우는 자신이 부상을 당하고도 포로로 살아나게 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말보다는 그 말을 ‘영어‘로 외쳐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총을 겨눈 미군들이 즉각적으로 나타낸 반응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고, 조사과정에서도 그들은 영어를 잘하는 것에대해 꽤나 호감을 보였던 것이다. 김범우는 그들에 대한 오랜 불신을 안은 채 영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는 사실에 쓰디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P302

거제도라는 섬 자체가 수용소나 마찬가지였고, 그 수천 개를헤아리는 시멘트 막사들은 섬을 뒤덮고 있는 형국이었다. 단위수용소는 거제도만이 아니라 한산도 아래쪽에 있는 봉암도와 용초도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15만 명을 헤아리는 포로들과 그들을 경비하는 2만의 경비병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 P303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알아낸 일인데, 미군들은 거제도에 철조망을 치면서 250만평에 이르는 농토와 임야에 쇠말뚝을 박았고, 자그만치 3천여 채의 집들을 강제로허물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미리 통고한 일도 없었고, 단 한 푼의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 P304

그러한 모든 행위는 ‘공산당을 무찌르기 위해서‘ 정당화되었고, ‘작전권 이양에 따른 징발‘로 합법화되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농토를 빼앗긴 수많은 양민들은얼어죽고 굶어죽어도 어디 가서 배상을 요구하기는커녕 하소연할데 한 곳 없었다.  - P304

정하섭을 만나게 된 것은 수용소생활 20여일이 넘어가고 있는6월 하순이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정하섭 쪽에서 일부러찾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놀라움과 반가움에 비해서 정하섭에게는 놀라움이 없었다.
- P305

"성함을 보고 선생님인 것을 직감했습니다. 명단에 출생지 기록이 없어서 약간 불안하긴 했습니다만, 역시 선생님이 맞았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선생님." - P305

정하섭은 간부양성교육을 받으려고 북으로 떠난 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논리훈련이 잘된 정하섭은 이야기의 뼈대를 잘 엮어나갔고, 김범우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군관학교에서 이학송이란 기자분을 만나 선생님 얘기도 나눴습니다." - P308

정하섭은 열흘 간격 정도로 찾아왔다. 예상했던대로 그는 ‘62수용소의 조직부책이었다. 그런데 그는 안부만을 확인하고 갈 뿐 자신을 조직의 일에 연결시키지 않았다. 김범우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짐작하고 있었다. ‘선생‘이라는 것과 ‘건강‘이라는 것이었다. - P309

사단장은 정 중령이 미군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갈긴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사단장은 인접한 미군부대를 직접 찾아갔다고 한다. 가서 보니 미군 부대장은 이미 그
‘구타사건‘을 접수했고, 수사기관에 넘겨 조사를 하게 할 작정이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 사소한 일이 ‘사건‘으로 둔갑한 사실에사단장은 당황하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 P317

입을 꾹 다문 조원제는 눈으로는 몰려오고 있는 토벌대들을 보면서, 귀로는 대원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적들은 해방구 안에 있는 마을들을 적성마을이라고 했고, 마을사람들을 적성분자라고 해서 빨치산과 똑같이 취급했다.  - P324

해방구에 가깝거나 빨치산의 영향력이 미치는 마을들을 통비마을이라고 했고, 그 마을사람들을 통비분자라고 부르며 불온시하고불신했다. 적성마을 사람들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히면살해되었고, 통비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의심받고 걸핏하면 잡혀가혼쭐이 났다.  - P325

중대원들을 재배치시키고조원제가 막 돌아서려는데 강경애가 다른 남자대원들과 함께지나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강경애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조원제도 웃어 보였다. 강경애는 조원제에게 은근히 누나 노릇을 하려 들었다.  - P327

조원제는 원칙에 위배되는 일은 스스로도 하지 않았고, 다른 대원들에게도 엄했다. 그는자신에게 붙여진 ‘대꼬챙이‘란 별명을 영광스럽게 알았으면 알았지조금도 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P328

연대장 이태식마저도 단둘이있게 되면, "아이고, 자네넌 다 존디 그놈에 원칙 너무 따지는 것이탈이여, 시상 몰르고 젊어논께 그런갑다, 그리 딱딱하게 허덜 말고 헹펜 바감스로 살살 혀, 살살" 하고 충고했다. "허먼, 나보고 수정주의자가 되라 그것이요?" 조원제의 정색을 한 대꾸에 이태식은그만 쥐어박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 P328

강경애의 호의는 좋았지만, 그호의가 어디까지나 대원간의 상호존경으로 건재하기를 조원제는바라고 있었다. - P328

조원제는그가 자신의 비천했던 과거의 신분을 일부러 드러내는 심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행위는 자신이 천대받고 살아온 저쪽세상에 대한 보복감의 노출이었고, 자기를 멸시했던 자들을 적으로 맞대하게 된 증오감의 표현이었다. - P329

서너 걸음을 옮긴 조원제가 입에 가득 차는 비명을 물며 왼손으로 옆구리를 잡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앞으로 휘청 꺾였다가바로 세워졌다. 그는 옆구리에 불덩이가 닿는 것 같은 화끈함과 동시에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 P333

조원제는 그때서야 자신이 오른손에 총을 들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갑자기 팔이 처져내리도록 총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총은 곧 생명이라는 인식으로 입산 이후 단 한 번도 몸에서 뗀 일이 없었던 총을 자신도 모르게 그때까지 들고 있었던 것이다. 잠을자면서도 품고 잤고, 밥을 먹으면서도 어깨에 걸치고 먹었고, 똥을누면서도 앞에 세워 잡았던 총이었다. - P334

조원제는 통증으로 몸을 비비꼬았다.
"아 이게 말이오, 총알이 옆구리를 한 뼘가량이나 뚫고 지나갔는데, 글쎄 늑막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갔단 말이오. 이건 천에 하나,
만에 하나도 보기 힘든 일이오. 그러니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뭣이오." - P335

외서댁은 ‘비밀‘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들었다. 몰라야 될 것을아는 것도 병이었다. 남모르는 것을 알고 있으면 입이 놀리고 싶어지고, 입을 놀리면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런 것을 일찍이 생활 속에서 터득한 그녀는 당이 비밀에 부치고자 하는 일을 알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 P341

사실 굴을 파고 있는 후방부대원들조차도 그 위치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어두워져서 작업장으로 왔고, 어둠 속에서 작업장을떠났던 것이다. 모든 비트들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그렇게 철저하게 보안이 지켜졌다. - P341

 "와따! 인자 봉께로니 말이 딱 맞어뿌렀다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몰르든 니럴 술술 책얼 읽게 갤차놓다니, 그 좌익허는 사람덜 겁나게 장허고 기맥히시!
나가 나이 묵어 나슬 수 없고, 니가 나몫아치꺼정 싹 다 혀뿌러라. 고런 사람덜이 허는 일이먼 나가 인자 딱 믿어뿔란다." 전쟁이일어나고 하산해서 아버지 이름 석 자를 써 보이고, 옆집에서 빌려온 책을 읽어내자 아버지가 무릎을 쳐가며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아버지는 염상진 대장에게 생간을 대접하기로 했던 것이다.
- P343

천점바구는 당원이 되었다는 사실도, 중대장 노릇을 하는 것도,
그리고……… 여중학교 나온 여자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까지 아버지에게 다 알리고 싶었다.  - P343

"천점바구 동무, 당은 동무의 입당을 결정했소. 동무가 당원이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심사과정에서 다 검토하고 확인된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요약하겠소.  - P343

당원은 권리를 주장하는 자격이 아니라 의무를 수행하는 자격이오. 당원은 특권을 누리는 자격이 아니라 의무를 수행하는 자격이오.  - P343

당원은 교만을 부리는 자격이 아니라 겸손을 실천하는 자격이오. 그리고 당원은 인민을 위하여 모든 짐을 지는 자격이며, 당을 위하여 마지막 생명을 바치는 자격이오. 이 점 명심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투쟁하기 바라겠소." - P343

"지금부터 출발허겄소. 제1비상선할메봉, 제2비상선 미륵봉이오."
천점바구는 ‘빨치산의 생명선‘이라고도 하는 비상선 두 군데를지적해 주었다. 돌발사태를 당해 대원들이 산산이 흩어지게 되더라도 - P344

천점바구는 날이 트이기 시작함을 육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동쪽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어둠만 가득했다. 그러나 어둠 그 뒤편 하늘에 어리고 있는 아슴푸레한 빛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 P344

어둠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어둠은 방향에 따라, 장소에따라 다 달랐다. 다만 그 정확한 느낌이 말로만 표현이 안 될 뿐이었다. 오랜 산생활은 그런 것을 다 식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 P344

천점바구는 그 밖에도 은하수와 북두칠성의 기울기를 확인했고, 풀벌레소리들이 그쳐 있음을 알았고, 나뭇잎들이 아래서 위로바람을 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P344

 비상선 설정은 몸에서 총을 떼서는 안 되는 것과 함께 모든 행군에 앞서 내려지는 빨치산의 두 가지 절대수칙이었다. 그건 곧 항일빨치산의 기본전략인 이령화정(以零化整)이었고, 그 흩어져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모여 세력을 형성하는 전법으로 빨치산들은 토벌대의 추격을 쉽게교란시켜 버렸고, 대원들이 부대를 잃는 일이 거의 없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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