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랏빛 꽃송이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수국이었다. 아아, 곱기도 해라! 소화는 그 복스럽게 생긴 꽃덩이들을 보는 순간 감탄이절로 솟았다. 수국은 자신이 유독 좋아하는 꽃이었다. 야하지 않으면서 고왔으며, 유별나지 않으면서 풍성했고, 별스럽지 않으면서 경건했다. - P456
소화는 앞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포승줄에 끌리며 발을 떼어놓았다. 시야를 벗어나는 수국꽃덩이가 정하섭의 얼굴로, 예쁜 아기의 얼굴로 변화하고 있었다. - P458
그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작전권 일체가 미군으로 넘어가버린 것에 대해 그것이 절대로 부당한 처사라는 생각에변함이 없었고, 그동안 미군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질러온 무법적 작태에 대해서나, 화력의 막강함만을 앞세워 무작정 초토화로만 밀어붙이고 - P459
심재모는 까르르 웃기도 하고, 짝짝짝 손바닥을 치기도 하는 간호원들을 망연히 바라보며 ‘유엔사모님‘이라는 유행어를 실감하고있었다. - P469
‘유엔사모님‘이 되려는 꿈을 꾸다가 실패하면 ‘나이롱처녀‘가되는 또 하나의 길이 거기 있었다. 병동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으면서 왜 저 간호원들이 저쪽에 가 있는 거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그건 물으나마나 지원근무일 터였다. 가시철망으로 병동을 구분해놓고 미군 의사나 간호원들은 국군을 치료하지 않아도 국군간호원들은 미군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 P469
그들은 미국사람이고, 작전권이 그들에게 있으니까. 국군 장성들이 미군 중령이나 대령인고문관들한테 쩔쩔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국군 장성들의 진급은그들의 작전권 행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문제였다. - P469
"그래라 반공일에 너희들만 고생해서 선생님이 사주는 선물이니까." 선생은 토요일을 꼭 반공일이라고 하며 세 아이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 P472
길남이도 입을 있는 대로 쫙 벌리고 부채과자를 밀어넣어 콱 깨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 길남이는 멈칫했다. 동생 종남이의 얼굴이 떠올랐고, ‘서엉, 나도 묵고 잡어‘ 하는 소리까지 들렸던 것이다. 길이는 목이 메어서 과자를 씹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과자를 공평하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 P473
"니가 그리 용감헐 줄을 몰랐다. 니가 느그아부지 탁했는갑다" 그 엉뚱한 말에 길남이는 명순이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두레박을 들고 선 명순이는 그런 겁나는 말을 언제 했느냐 싶게 배시시웃고 있었다. 그 태연함에 안심하며 길남이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니, 아부지가 뭐냐?" 명순이가 물었다. "아녀" 길이는 고개를 젓고는, "우리 둘이라고 고런 말 자꼬 허지 마." 불퉁스럽게 말했다. - P482
길이는 고개를 돌리면서 명순이의 장딴지가 여기저기 긁혀 있는 것을 또 훔쳐보았다. 그놈들한테 얻어맞은 자리가볼이고 가슴팍이고 옆구리고 아직까지 얼얼하고 아팠지만 자신의아픔보다는 명순이가 당한 것이 더 아프게 느껴지고 있었다. - P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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