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색의 만장들이 산굽이를 돌아 길 위에 줄을 잇고 있었다. 멀리보이는 만장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건 고인의 생전의 덕과문중의 건재를 알리는 것이었다. 30여개의 만장행렬 뒤에 상여가나타났다.
- P392

"아버님・・・・…….
김범준의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소리였다. 그는 모자를 벗었다. 상여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움직임만 멀게 보일뿐 상여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상여를 향해 두 손을 모은 김범준은 허리를 굽혀 땅에 엎드렸다. 낡은 군복을 입은 그의 어깨가 잘게 들먹이고, 그는 오래도록 일어날 줄을 몰랐다. 두 번 절을 하고난 그는 주먹 쥔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 P392

일본에 첫발을 디딘 유학생들은 누구나 그런 감정에 부딪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차츰 세 부류로 갈라져나갔다. 철저하게 일본적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철저하게조국의 독립을 찾으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하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돈이나 써대는 재미로 사는 축들이었다.  - P393

국제외교를 통해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외교독립론, 우매한 대중을 교육시켜 독립의식을 고취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교육준비론, 일본과현실적인 타협을 하며 이성적으로 독립을 얻어내야 한다는 타협이성론, 그러나 일본은 바로 무기를 들고 나라를 강탈한 강도였다. - P394

 강도는 물리쳐야 하고, 물리치는 방법에는정면대결밖에 없었다. 힘을 믿는 강도가 두려워하는 건 힘밖에 없었다. 무력투쟁을 최우선으로 해서 다른방법들은 차선으로 시행함으로써 복합적 효과를 노려야 하는 것이었다.  - P394

무기를 든 강도를물리치려는 싸움에서 몸 다치고 피 흘리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해서야 그 싸움은 백전백패일 뿐이었다. 일본의 막강한 무기 앞에 당장 무슨 수로 대적하느냐고, 무력투쟁으로 정면대결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잠꼬대고 헛소리라고 비웃는 것이 학식이 들었다는 자들이 보이는 작태였다.  - P394

그건 용기 없는 어설픈 지식인들이 드러내는표본적인 기회주의였고, 도피주의였다. 싸움은 무기로만 하는 것이아니었다.  - P394

그런데 배웠다는 자들이 내세우는 잡다한 독립론으로 그런 민족적 결속을 이루지 못해 식민지지배는 36년에 이르렀고, 결국 그동안에 종의 신세로 죽어간 동포의 수는 300만이 훨씬 넘어버린 것이다. - P395

"애비로서 먼첨 권힐 수는 없는 길이로되 니가 알아 먼 택헌길이니 말기지는 않컸다. 장부로서 나설 만헌 길이다." 아버지의 그말씀이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모른다.  - P396

아버지의 그 말씀을 가슴에담고, 지용의 시를 뇌며 압록강을 건넜던 1924년, 검거 직전에 뿔뿔이 흩어져 일본을 탈출하며 동지들이 재집결을 약속한 장소는상해임시정부였다.  - P396

 2만 5천 리의 실제 거리와는 다르게
‘머나먼 길‘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5만리대장정‘으로 통칭되는그 끝없는 이동은 중국공산당의 대시련인 동시에 대승리일 수밖에 없었다.  - P402

봉건군주 진시황은 절대권력을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모든 봉건·제국주의적 권력의 속박으로부터 인간해방을 실현시키기 위해 혁명가 모택동은 2만 5천 리의 이동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 P402

대장정을 통해서 배우고 감동한 것은, 그 누구나가 혁명실현을 위해서 자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순결한열정과 그 아름다움이었다. 소년전사에서부터 당의 지도자들까지문자 그대로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평등과 신뢰였다.
- P402

숙식에서부터 일체의 차등이 없는 인간존중의 평등실현은 마치기적 같은 신뢰의 힘을 창출해 냈고, 그 기적적인 인간집단은내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끝내는 중국대륙에 혁명의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P402

확신의 어디에 착오가 있었던 것일까. 조선땅은 중국과는 다르게미·쏘가 분할한 해방을 맞은 것부터가 문제였던 것이다. 미국은 주력부대는 철수시켰지만 5년이라는 신탁통치의 잔여기간을 남겨둔채 군사고문단 배치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 고문단은 민족해방전쟁과 때를 같이해서 대병력으로 둔갑하고 말았던 것이다. - P402

4월은 산골산골에 부풀대로부풀다못해 끝내는 터져 낭자하게 물감칠하는 초록의 봄을 현란하고 화사하게 펼쳐놓고있었다. - P404

"보면 몰르요? 봄 따묵고 있소."
"머시여? 봄얼 따묵어? 거 무신 생뚱헌 소리여?"
김복동이 잠이 찬 눈으로 마삼수를 쳐다보았다.
"와, 멋대가리 없는 성님허고는 말이 안 통헌께 그냥 자울기리기나 허씨요." - P405

"나가 인자 물오르는 이팔청춘 가시넨지 아냐? 봄이 왔다고 맘할랑기레 꽃 따묵고 자시고 허게. 염병하고, 봄이 된께 생각나는것은 처자석덜뿐이다." - P406

"성님, 성님이 워째 고것이 안 되는지 아시요? 나하고 달게 비우짱이 없어서 그러요. 요 말얼 써묵다가 틀리먼으쩔끄나, 저 대목에서 무신 말얼 써묵어야 한다냐, 우선에 고런 쭈쭈 생각얼싹 없앴뿌씨요. 틀릴라먼 틀려라, 웃을라면 웃어라, 허는 뱃보로 미친년 널뛰대끼 아무말이나 씨불씨불해대다 보면 늘품이 생긴당께라 괴기도 묵어본 놈이 잘 묵는다는 말 안 있습디여? 말도 체면볼 것 없이 씹떡껍떡 많이 해대는 놈이 결국 잘하게 되는 것 아니겠소?" - P408

보릿고개 속 아리는 밤마다 지칠 줄을 몰라 풀꾹새는 4월이 다 가도록넓고 넓게 울었다. 그런데, 새 한 마리를 두고 만들어진 두 가지 이야기는 그 내용에서 너무나 차이가 많았다. 하나는 배고파서 죽은사연이고, 하나는 임 그리워 죽은 사연이었다. 배고픈 농민들이 지어낸 이야기와 배부른 양반들이 지어낸 이야기의 차이였다. - P411

"그러겄제라 근디, 군경할라 자꼬 씨게 나온께 투쟁인민덜이나우리나 곱쟁이로 심드는 일이제라"
"그려도 인민델에 비허먼 우리가 훨썩 낫소, 산으로 뒤빠져서적이나 팡팡 쥐잉께."
강동기는 무르춤해졌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 P411

강동기·천점바구가 다 기동대 소속이었고, 기동대의 거의가 벌교사람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동안 지구의 비무장을 무장으로바꾸는 데 하대치가 세운 공은 무척이나 컸다. 그건 말을 바꾸면경찰이나 청년방위대들을 그만큼 많이 죽였다는 뜻이었다. 그래서하대치는 경찰과 청년방위대들 사이에 ‘악질 땅딸보‘로 소문이 나있었다. 잡히기만 하면 회 쳐 먹는다느니, 포를 떠서 죽인다느니, 마디마디 토막을 쳐 죽인다느니, 온갖 악담을 다 들었다.  - P413

골짜기에 산그림자를 덮으며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산어스름은 평지의 어스름과는 달리 빠르게 어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 P417

김복동은 환자트로 옮겨질 새도 없이 발병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펄펄 끓는 열로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였다.
- P429

김복동의 식어버린 몸을 피해 밖으로 도망 나오는 이들이 때 절고 헐어빠진 옷 위에서 깨알을 흩뿌린 것처럼 수없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따뜻한 체온 속에서 생피를 빨며 기생하던이들은 으레껏 그 사람의 숨이 끊어지기가 바쁘게 도망쳐 나오고는 했다. - P429

그대의 이름은 머슴
천하게 살아온 머슴
그대의 계급은 머슴
비굴하게 살아온 머슴
그대에겐 노동뿐
황소처럼 부림당한 노동뿐
배우려 해도 가르쳐주는 자 없고
배움도 죄가 되는 머슴
그대는 머슴 - P435

그녀가 내민 건 밥 한 덩이였다. 물론 잡곡밥이었다. 그는 고개를저었다. 그러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잡았다. 고개를 젓는 바람에 머릿속이 휭휭 돌았던 것이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세게 저었던 것은 그 밥덩이가 어떻게 마련된 것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못해도 두 끼를 굶고 그 밥덩이를 가져온 것이었다.  - P442

4월로 접어들면서 식량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갔다. 보투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인민들마저 곡식이 바닥나 굶주리는 계절이었다. 보리가 타작되는 6월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이 땅의 고질적인 춘궁이었다. 그래서 대원들의 급식은 연명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 P442

방역대책은 다름 아닌 이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그전염병은 재귀열이고, 그것을 전염시키는 것은 이나 벼룩·빈대로밝혀졌던 것이다. 치료약이 없는 상황에서 감염의 주범인 이를 소탕하는 것은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 P445

그런데 방역문제와는 별개로 전남도당의 빨치산지구에는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 재귀열이란 전염병은 미군 비행기가 뿌린 병균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병이발생하게 된 원인규명인 동시에 미군이 세균전을 감행하고 있다는중대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 - P445

무엇 때문에 산골짜기마다 그렇게 낮게 떠서 날아다녔느냐는 것이었다. 빨치산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정찰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빨치산들이 정찰기에 노출될 만큼낮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적들이 먼저 아는 것이고, 정찰기의 비행은 자주 있었지만 그런 식의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은 처음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 P446

그리고 이나 벼룩·빈대가 옮기는 병이, 그것들이 갑자기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날짜의차이도 없이 그 넓은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 P446

 그 병이 세균전에 의한 발병이라는 또 하나의 반중은 그 치료약인 마파상과1606호를 각 지서들이 이미 갖추고 있는 점이라고 했다. 그런 여러가지 사실들이 어쨌든 간에 그 병이 바로 세균전에 의한 발병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빨치산은 아무도 없었다. 빨치산들은 한층더 미군에 대해 증오를 갖게 되었다. - P446

"죽는 것이야 면헐 것잉께 재판이나 잘덜 받도록 허씨요."
벌교를 떠나올 때 염상구가 불쑥 내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소화도 들몰댁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재판을 받아봐야 결국 살아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 P451

그런 그녀들의 처지에서 ‘5년 징역‘이라는 감옥살이가 어떤 것인지 실감될 리가 없었다. 부역자에 대해서는 단심판결로 끝나버리는 재판에서 부역만이 아니라 입산활동까지 한 그녀들이 5년 징역밖에 안 받았다는 것은 역시 기적 같은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전적으로 염상구의 덕이었다. 선심 쓰는김에 푹 쓰기로 작정한 염상구는 그녀들의 조서를 ‘단순동조‘로 꾸미게 했던 것이다.  -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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