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식장총을 들고 어떤 출동에나 몸 사리지 않고 나섰다. 천점바구는 매번 신경이 쓰이는 반면에 그런 외서댁의용맹성이 소대원들의 용기를 고무시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아직까지도 외서댁에게 가벼운 카빈총을 구해주지 못해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P316

 대열의 중간에서 어느 한 사람이 졸며 걷다가 주저앉게 되면 그 다음 사람들은 그저 휴식인줄 알고 따라서 주저앉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열은 영락없이 반토막이 나고 말았다. 산이 겹겹인 어둠 속에서 그런 식으로 몇십 분이 지나버리면 앞서 간 대열에서도, 뒤떨어진 대열에서도 한동안 서로를 찾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 P317

졸음의 위험에 대해서는 군사학교에서는 물론이고매일 두세 시간씩 실시되는 학습을 통해서도 끝없이 강조되고, 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졸면서 걷는 대원은 꽤나 많았다. 그것은사상성의 빈약도, 정신무장의 해이 때문도 아니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언제나 체력의 한계를 넘고 있는 빨치산투쟁 자체에 있었다.
- P317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날마다 산을 타고, 야간투쟁을 주로 해야하는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졸음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비정상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대원들 사이에서는 ‘수면투쟁‘이니
‘졸음투쟁‘이니 하는 우스갯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 P317

그러나 천점바구는 소대장직을 맡고부터 그 맛있는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눈을 붙이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천점바꾸는 비로소 왜 똑같이 투쟁활동을 하면서도 간부들이 지치지않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건 책임감이 만들어내는 힘이었다.  - P318

입산투쟁이 시작되면서 그에게는 여러개의 별명이 붙여졌다. ‘총각대장‘ ‘올빼미‘ ‘불가사리‘가 그것이었다. 구빨치 시절에 군당에서 붙여준 ‘새끼대장‘까지 합하면 넷이나 되었다.  - P318

"난 그 돼지자지같이 긴 팔말은 싫어. 독한 데다 담뱃가루가 입속으로 들어와 양담배야화한 맛에 필터달린이쌀렘이 최고지."
처음의 남자가 제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뽑아들었다.
"자넨 담배엔 아직 시로도야. 그건 여자들이나 피는 담배지." - P362

"쌔끼들, 국회의원이라고 괜히 깝죽대다가 걸려든 거지. 십만 선량님도 좋지만 지금이 어느 때라고 깝죽대, 깝죽대긴, 전시에 눈치껏 설쳐야지 왜 군대문제 가지고 물고 늘어지난 말야. 군대문제 가지고 제멋대로 시비 붙었다간 국회의원 아니라 장관도 골로 가는세상이야."
- P363

"저건 국민방위군사건을 물고 늘어지더니 거창사건이 터지니까왜 또 그것까지 물고 덤비는 거야? 혹시 뒤에 그만큼 든든한 빽이라도 있는 건가?" - P363

"있기는 뭐가 있어. 이 전시하에서 삼광빽(화투에서)이면 신 장관님이시고, 오광빽이면 국부이신 것이야 생쥐새끼들까지 다 아는 판인데, 그 두 가지 문제 물고 늘어지는 것이야 그 두 분한테 박치기하고 덤비는 것 아니냔 말야. 저놈한테 빽이 있다면 빨갱이빽이 있는 거지." - P363

"맞어, 나라 위해 덮어야 할 문제 일일이 긁어 부스럼 만들고 드는 저런 놈들은 다 빨갱이야. 그런데 저놈은 당할 만큼 당하고서도빨갱이가 아니라고 버티니 어쩐 일이야?" - P363

"까짓 빨갱이새끼들 시체 몇 개 밀려들어온 게 어떻게 되긴 뭘어떻게 돼. 처리반놈들이 혼쭐나고 끝났지."
"처리반놈들은 이번 기회에 톡톡히혼이 나야 해. 우리 특무대가 나라 지키는 공은 모르고 대가리삐까닥한 것들이 뒤에 숨어서, 양민을 빨갱이로 모느니, 잔인한 학살집단이니, 하고 악선전을퍼뜨려 민심을 선동하고 있는 판국에 어쩌자고 돌을 션찮게 매달아 시체가 해변으로 밀려들게 만들고, 말썽을 일으키느냐 그거야."
- P364

"미친놈의 새끼들이, 밤마다 수가 너무 많아 실수를 했대나 어쨌대나 좌우간 대장님 특명으로 혼쭐이 날 만큼 났으니 다시는 그런일 없겠지." - P364

은 바로 그 속에 묻어들고 있다 그 말이야. 빨갱이들이 산마다 진을 치고 있는 판에 여기 부산이 엎어져봐. 그땐 대한민국은 끝장난다구. 국부께서 우리 특무댈절대적으로 신임하시는 이유가 다 뭔지 아나?" - P366

"다시 묻겠다. 빨갱이변호사 이덕우와는 언제부터 내통했나!"
네모진 얼굴의 심문이었다.
"아니오, 선후배・・・선후배관계일 뿐이지 내통한 일은…………."
가까스로 얼굴을 들어올린 안창배, 그의 목소리는 쉰 듯이 막힌듯이 힘겹게 밀려나왔고, 그는 끝내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고개를간신히 저어댔다. 보성 벌교지구 국회의원 안창배의 젊은 얼굴은말이 아니게 터지고 으깨지고 피멍이 들어 본래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 P367

깡마른 얼굴이 양쪽 손바닥에 침을 튀겨 맞부비고는 책상 옆에세워둔 몽둥이를 집어들었다. 몽둥이는 절반쯤이 미군용 담요로감겨져 있었다. 그건 살이 찢어지는 것을 막고, 타박상을 줄이기위한 것이었다.
"이새끼, 빨리 불어!" - P368

안창배는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는 의식 속에서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이덕우 변호사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덕우 변호사는 좌익도, 공산주의자도, 빨갱이도 아니었다. 그는 양심적인 민족주의자일 뿐이었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농민들의 편에 서서 변호를 했고, 해방이 되자 그 태도는 더욱 확실해졌다.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광주고법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의 변호를 도맡다시피 했다.  - P369

로운 싸움은 지칠 줄을 몰랐다. 그는 제주도사람들을 꽤나 죽음에서 건져내기는 했지만, 그가 얻은 것은 좌익 · 용공 혐의였다. 그는보도연맹에 강제로 밀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고, 끝내는 예비검속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나갔던 것이다. - P369

고문을 못 견디고 허위자백을 했다가는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 그 진상을 밝히려고 했던 행위가 꼼짝없이 빨갱이의 행위로 둔갑하게 되어 있었다. 그건 혼자서만 죽어가는 누명이 아니었다. 그 두 가지 사건의 진상규명에 적극성을 띠었던 다른 소장파 의원들까지도 한 올가미에 끌어들이는 위험스런행위였다.  - P370

허위자백을 하고 일단 손도장을 눌러버리면 그때는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전시재판은 피고의 자백번복을 받아들이거나 고려할 만큼 관대하거나 공정하지 않았다. 전시재판은 사상범의 처단을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상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을 수없는 민간인들은 빨갱이라는 의심만으로 특무대에 끌려와 고문조사를 당하다가 재판 절차도 없이 부산 앞바다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수장당해 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 P370

국민당과 비밀스런 관계를 맺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버림을받아 당의 이름까지 바꿔야 했던 한민당은 이미 정치판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차기 국회의원이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안창배의 정치적 제거였고, 2차적으로는 정치판의 실세인 대한국민당과의 결속이었다. - P371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부산을떠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부산만큼 돈벌이가 쉽고, 안전한땅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통통선도한척 은밀하게 구해놓은 마당에 대한민국땅 전부가 빨갱이들 손에 넘어간다 해도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 발판 또한 부산이었던 것이다. - P372

"그렇다마다요. 국민방위군사건이니 거창양민학살사건이니 ㅎ떠들어대는 국회의원들은 국부님께 불충을 저지르는 반역도들이고, 빨갱이들입니다. 그런 놈들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잡들여 총살시켜 버려야 합니다."
최익승은 술기운과 함께 결기를 세웠다. - P372

신 의원은 거창군 신원면에서 자행된 양민학살을 낱낱이 폭로하기 시작했다. 부산극장에 자리 잡은 피난국회 제54차 본회의를통해 그동안 무성한 소문으로만 떠돌고 있었던 사건이 마침내 공식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1951년 3월29일에 이승만 정권의 존립을위협하는 두 개의 커다란 파도가 국회에서 한꺼번에 일어났던 것이다. - P374

염상구의 말에 윤옥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얼른 내렸다. 눈물이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두려움에 차 있었다.
"그 방도가 멋이냐 허먼 말이여, 니가 나 각시가 되야는 것이여!" - P378

다음날로 염상구가솥공장집사위가 된다는 소문이 읍내 안통을 휘돌았다. 그집 딸과 벌써 몸을 섞은 사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염상구가 손쉽게 목적달성을 해버린 데 비해 양효석은 고전을면치 못하고 있었다. 양효석은 벌교에 주둔할 때부터 송경희를 짓밟아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P381

염상진은 조계산지구에서 온 선원을 통해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건 안창민이 일부러 보내온 소식이었다. - P383

김사용은 일제치하의 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서거나, 해방 후의사회개혁운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을 수용하고 따르려는기본자세만은 갖춘 드문 지주였다. 그는 새로운 나라가 바르게 서기를 바라 짧게나마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위원장을 맡는 정치행위를 보이기도 했고, 농지개혁을 앞두고는 논밭의 명의변경을 하거나강매행위를 하는 따위의 추잡한 짓을 하지 않은 읍내의 유일한 지주이기도 했다.  - P384

무장된 400여 명의 막강한 병력이몰려다니면서도 남해여단은 도무지 싸우지를 않았다. 싸우지도 않고 이 산골 저산골로 옮겨다니기만 하면서도 도당이나 군당에요구하는 것은 많았다.  - P385

 남해여단이 야기시키는 문제는 그런 무위도식만이 아니었다. 대부대가 싸움은 하지 않고 피해다니기만 하니까 그 부대 뒤에는 으레 그만한 규모의 토벌대가 따라붙게 마련이었다. 인민군 부대가 거쳐간 지역에 토벌대가 밀려들면 그 지역 인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 P386

‘놀고먹자부대‘ ‘지화자부대‘라는 호칭에서는 대원들이 혹시 그 부대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경계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당의 수뇌부에서는 벌써부터 남해여단장의 행위가 패배주의 · 인정주의 · 감상주의 기회주의 등으로 지탄의 대상이되어오고 있었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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