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마다 찬바람이 휩쓸고 있었다. 그것은 바뀌는 계절을 따라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상대로 일으키는바람이었다.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듯이 제일먼저 불어닥친 바람이 경찰의 바람이었다. 빨갱이와 부역자 색출이라는 그 바람은 마을을 차례로 휩쓸어갔다. - P364
조사결과 입산자들이300을 넘는다는 사실에 경찰에서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건 진짜알맹이는 다 빠져나가버렸다는 뜻인 동시에 자기네들의 적이 전쟁전보다 그만큼 늘어나 있다는 뜻이었다. - P364
그들이 뒤늦게 놀란 것은어떤 마을에서는 남자들이 절반이나 입산한 일이었다. 그 대표적인 마을이 들몰이었다. 들몰이 그렇게 된 것은 김종연과 서인의영향 탓이었다. 농지개혁을 앞두고 지주들이 자행하는 파렴치 행위를 막기 위해 집단시위를 벌였던 그들은 그때의 주동자 김종연과 서인의 언행을 계속 믿고 따랐던 것이다. - P365
경찰들이 다음으로놀란 것은 여자 입산자들이 상상외로 많았던 것이다. 누구보다도놀란 것은 염상구였다.외서댁의 입산 때문이었다. - P365
마을마다 두 번째로 불어닥친 바람은 지주들이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지주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농지개혁에서 빼돌린 자기네들 논을 일삼아돌면서 헛기침을 해대고, 가래를 돋우어 내뱉고는 했다. 논에 나선 사람들은 그 속이 뻔한 시위를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그들의 헛기침이나 가래 돋우는 소리가 ‘이놈들아 빨갱이들이 한 농지개혁은 다 무효야!‘ 하는 뜻인 것을 사람들은 다 알아들었던 것이다. - P365
마을마다 세 번째로 불어닥친 바람은 역시 경찰의 바람이었다입산자 가족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부역자 색출에 거의 효과를보지 못한 경찰은 그 조사대상을 각 마을사람들로 바꾼 것이다. - P366
가는 것이야 총부리 들이대면 별문제 아니었지만 머릿수를 채워야하는 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가 징집종류는 전투병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병력을 뒷바라지할 노무자들도 뽑아내야 했다. - P376
"아이고메, 징허고 징헌 놈에 시상, 일정 때 일정 때라고 끌어가고, 인공 때넌 인공 때라고 끌어가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라고 끌어가고, 나라라고 생긴 것은 해주는 것 암것도 없음시로 - P376
"아덜만 끌어가면 되제 워째 남정네꺼지 끌어가는 거여. 한 집서 둘씩이나, 안 뒤여, 안 뒤여!" 회정리 3구의 왕주댁이 눈을 흡뜬 채 경찰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앞뒤를 잘 가리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평소의 그녀 모습이아니었다. - P377
지상에 끌어가도 좋고 잡아가도 존께 타작이나 끝나면 가게 혀주씨요. 아무리하품 나오는 농새라도 여자 혼자 심으로는 될 일이 아닌께라." 노덕보의 아내 조성댁이 경찰을 붙들고 늘어졌다. 김복동·마삼수가 강동기와 함께 입산을 할 때 못 본 척해버렸던 노덕보였다. - P377
"자다가 봉창 뚜딜기지 말어. 9,900이여, 9,900! 도망갈 놈들은도망을 가고도 그새끼덜이 그리 남아 있었으니 서울은 온통 빨갱이새끼덜 세상이었다 그것이여. 그새끼덜언 싹 다 싹 다 총살시켜뿌러야 혀." - P379
"여자가 다 전차운전을 한다는 것하고요, 저런 젊은 여자가 이런위험스런 상태에서도 자기가 맡은바 책무를 유유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 P382
율리에 있는 로동신문사에 도착되었다. 신문사는 폭격의 피해를당하지 않고 있었다. 시멘트 3층건물인 신문사의 규모와 시설을 둘러본 이학송은 자못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쪽의 그 어느 신문사 시설보다 나았던 것이다. 제작시설뿐만 아니라 2층에 자리 잡은각 부서의 사무용품이나 소파 같은 것도 고급스러웠고, 3층에는기자들의 휴식을 위한 넓은 댄스홀도 갖추어져 - P384
있었다. ‘신문은 조직자이며 선동자이다. 그런 시설들을 살펴보며 이학송은 마르크스의 말을 상기하고 있었다. - P384
그러나 나중에 다시 평양을 거치면서 알게 된 일인데, 바로 그들이 국방군과 미군이 평양으로 밀려들었을 때 가장 먼저 태극기를흔들며 길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또 장사를하고, 기관의 끄나풀 노릇까지 하다가 남쪽으로 짐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학송은 그때서야 비로소 상인들이 갖는 기회주의적 속성이무엇인지를 실감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 P386
공산주의가 노동자·농민은 믿되 왜 그들을 믿지 않는가도 구체적으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생산물의 이윤추구만을 일삼는 중간착취자일 뿐만 아니라, 그 목적달성을 위해 끝없이 거짓말을 하는 속에서 기회주의가 골수에 박혀버린 구제불능의 부류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내세운 남쪽으로 짐을 챙겨 떠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 P386
아무 거칠 것 없이 멋대로 날아다니며 도시에는 폭탄을퍼부어대고, 사람에게는 기총소사를 해대는 비행기들을 이학송은망연히 올려다본채, 저리도 끝없이 폭탄을 퍼부어댈 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어마어마한 화력으로 무차별공격을 가해 한 민족을 살해하고 그 땅을 황폐화시키면서 그 민족이 가고자 하는 역사를 가로막고 나선 저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비감한 마음으로 같은 생각을 되씹어 삼키고 있었다. - P387
"순천은 20리밖에 안 돼요. 이러고 있다가는 꼼짝없이 포위당합니다. 빨리 떠야 해요." 이 말에 모두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투어 산등성이를 내려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성급한 행동이 그런 전쟁의 경험이 없는사람들이 저지르는 무모함이라는 것을 그 다음에야 깨달았다. - P389
낙하산부대가 투하되기 전에는 만일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그 예정지역에 반드시 맹폭이 가해지고, 낙하산부대가 투하되면서는 외곽지역에서 가해오는 공격을 차단시켜 주기 위해 또 그 주변지역에맹폭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 P389
그냥 못 본 척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아니 그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수백 번도 더 엎었다 뒤집었다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CIC의 통역을 해야 한다고 결정이 나버리자 그때의 일이 엄청난 후회로 고정되어 버리고, 자신의 행동이 더없이 경솔했던 것으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두 여자의 정조의 가치와 정보통역으로저질러야 하는 잘못과・・・・・・ 그 일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 알았더라면 두 여자가 추행당하는 것을 단호히 외면했을 것이다. - P392
김범우가 막 통역을 마쳤을 때였다. 그 사람이 침을 뱉었다. 김범우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을 때는 이미 침이 얼굴에 달라붙은다음이었다. "이 개만도 못한 놈! 민족을 팔아먹는 똥만도 못한 놈!" - P393
선우진은 순천경찰서에 사흘째 머무르고 있었다. 계급장 없는군복을 입고 있는 그는 선생을 할 때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그변모는 군복과 평상복의 차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 P395
옷에 어울리도록 그의 말이나 행동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예사로 욕이 섞이는 말을 내뱉었고, 행동도 그에 걸맞게 거칠었다. 그리고 얼굴에찬 기운이 서린 가운데, 흰창이 많은 눈에 독기를 품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여자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하야말쑥한 피부색이었다. 어쩌면 피부색깔 때문에 찬 기운이 서리는 그의 얼굴은 더 잔인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 P395
"난 특무대다!" "야아!" 학생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트, 특, 특……" 흡뜬 눈으로 선우진을 바라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 P398
이놈들아, 내가 네놈들이 놓은칼침이나 맞아가면서 죽으나 사나 선생질만 해먹을줄 알았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 때려쳐라. 내가 네놈들칼침 맞아 죽었을라면 애당초 삼팔선을 넘어오지 않았다. - P398
네놈 빨갱이들, 씨를 말리고 말 거다! 그는 학생들이 질겁을 하고 놀랄 때마다 그모습을내리깔아보면서 자신의 선택에 만족을 느낌과 동시에 꿈틀꿈틀살아올라오는 보복감정에 전신이 뻐근해지는 통쾌감을 느끼고는했다. - P398
"지, 지난...... 지난 아는 것이・・・・・・ 구만이라지가, 지가 잘못헌 것은 공화국 만세 불르고, 노래 갤치고, 글고・・・・・… 의용군에 지원혔다가 안직 어리다고 퇴짜맞은 것뿐이구만이라..." 묽은 침을 질질 흘려대며 학생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 P404
온몸을 칼질당한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알몸으로 삼팔선을 쫓겨 넘어와서도 그런 꼴을 당했다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북공산당에게는 집안을 파괴당하고 재산을 탈취당했는데, 이남공산당에게는 마지막 남은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것이다. 삼팔선을 넘으며 품었던 원통함과 분함이 절망과 낙담으로 바뀌었다. - P406
내가 살 수 있는 땅은 도대체 어디인가・・・・・・ 그어디에도 어둠뿐인참담한 절망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에대한 원한과 증오는 깊어질 뿐이었다. 그놈들에게 원수를 갚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문제였다. - P406
김범우는 아주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이었다. 공산주의 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사고방식은 영락없이 공산주의자였다. 자본주의를 부정했으며, 지주계급의 몰락을 당연시했고, 월남민들의 행동방식을 비판했다. - P406
경찰과 군대 투신자들은 일제치하의 근무경력을 가진 민족반역자들이고, 서청은 개인적 감정 때문에 역사판단을 잘못한 채 미군정의 사병(私兵) 노릇이나 하는 반민족적 감정주의자들의 집단이라고 했다. - P407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교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미군정의 특혜 아래 교회를무상으로 받거나, 자금지원으로 교회를 지어가며 친미주의를 확대생산하는 동시에 반공주의를 찬양해서 민족주의를 해체시키며 민족분단을 거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 P407
김범우의 논리대로 하자면 남쪽에서는 반공만 내세우면 안될 일이 없고, 월남자의 태반은 거기에 편승한 감정적 이기주의자들이요, 반민족적 기회주의자들이 되는 셈이었다. - P407
"근데, 그것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요. 군대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 요게 뒤를 밀어야 해요, 요게." 백남식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손을 흔들었다. 그동그라미를 보는 송씨의 얼굴이 사르르 변했다. 백남식은 그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장모님 얼굴색이 왜 변하지요? 내가 잘되는 것이 싫으시요?" - P424
종남이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길남이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삐쩍 마르고 희게 버짐이 핀 얼굴이 가엾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떠나버린 다음부터 동생은부쩍 마르기 시작했다. - P427
길남이는 고구마를 옷에다 씩씩 문지르며 동생에게 눈을 흘겼다. 종남이는 형을 따라 앉았고, 길이는 대못칼을 꺼내서 고구마한가운데에 금을 그었다. 대못칼은 소화 아주머니네에 살 때 철길위에 대못을 놓아 기차가 서너 번갈고 지나가게 해서 납짝하게 한다음, 숫돌에 갈아날을 세운 칼이었다. - P428
"아짐씨, 우리가 한 고랑씩얼 맡어 캐디릴 팅께 고구마 한 개씩만 주실라요?" 그건 분명 동생의 목소리였다. 길이는 후딱 뒤돌아섰다. "잉, 니가 고구매가 묵고 잡은 모냥인디, 쪼깐한 것이 공짜 안 바래고 고런 이견 내는 것이 똑똑타."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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