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의위상이 제고됨으로써 국왕. 대신 · 삼사의 정치적 정립立 구도가 형성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 성종대의 정치적 유산과 폐비 사건은 이후 연산군대의 여러 사건들이 배양된 지반이었다. - P26
제5대 문종(재위 1451~1452)과 제6대 단종(재위 1453~1455)에 이어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세 번째 국왕인 연산군은 자신에게 주어진 순조로운 조건과는 달리 극도로 혼란스러운 정치를 운영하다가 최초의 반정으로 12년 만에 치세를 강제 종결당했고, 그 직후 30세의 젊은 나이로세상을 떠났다. - P27
조선의 왕권은 그런 절대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뒤에서 보듯이 연산군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의 왕권을 황제의 수준으로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 P30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처음으로 한 세기를 통과한 성종의 치세는 그동안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거듭하면서 구축한 여러 제도가 일단 완결되었다는 중요한 전환을 이룬 기간이었다. 그런 전환의 가장 대표적인상징은 『경국대전經國典』의 최종 완성이었지만(성종 16, 1485), 정치제도의 측면에서 나타난 핵심적인 변화는 삼사의 기능이 급격히 제고되었다는 사실이었다. - P31
삼사는 사헌부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이 세 관서는이다. 관원에 대한 감찰과 국왕에 대한 간언, 그리고 여러 사안에 대한 자문을각각 주요한 임무로 삼았다. - P31
그러나 그들은 점차 서로의 임무를 넘나들면서 활동했고, 그 결과 ‘삼사‘ 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동질성을 인정받게되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임무는 국왕과 신하의 여러 활동, 즉국정 전반에 건의와 비판을 제기하는 언론활동이었다. - P31
성종은 세조대이후 팽창해온 훈구대신영향력을들의제어하기 위해서 그들의 견제 세력으로 삼사를 육성했고, 그런 왕권의작용에 힘입어 성종 중반 이후 삼사의 활동은 매우 활발해졌다. - P31
그 결과조선의 중앙 정치는 기존의 국왕과 대신에 삼사가 참여함으로써 세세력이 견제와 균형의 정립 구도를 이루는 중요한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 P31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유망한 관원들은 대체로 비슷한 경로를 거쳐 고위직으로 승진했다. 그 핵심적 경로는 청요직이라는 이름이 알려주듯이, 삼사였다. 실제로 성종~중종대 의정부 · 육조의 대신 중 50~90퍼센트는 삼사의 장관을 거친 인물들이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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