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으로 알려드릴 것은, 당조직을 회복하는 대로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이승만도당이 악질적으로 자행한 농지개혁을전면 무효화하고, 공화국의 법에 따라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전면새로 실시할 것임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 P8

그러나 자신들이 읍내로 들어오기 전에 벌써 보복행위가 한바탕회오리를 일으키고 지나갔다는 것을 안창민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건 보도연맹의 예비검속에서 피해를 입은 가족들이 뭉쳐 경찰 가족이나 청년단 가족들에게 자행한 보복이었다. 하루의 치안공백이 생기면서 발생한 어찌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 P9

그들은 시체를 파냈던 연장들을 손에 손에 들고 읍내로 몰려갔다.
그리고 네댓 명씩 갈라져 경찰들의 집과 청년단원들의 집을 덮쳤다.
눈에 파란 불이 돋은 그들은 곡괭이로 찍고, 삽으로 내리쳤다. 그들이 연장을 휘두를 때마다 사람이 고꾸라지고, 피가 튕겨올랐다. 더죽일 사람이 없어지면 그들은 살림살이를 산산이 때려부쉈다.
- P11

그때까지 미적거리고 있던 경찰 가족은 물론이고 아예 피신할생각을 하지 않았던 청년단원 가족들은 꼼짝없이 맞아죽고 말았다. 염상구의 어머니 호산댁이 그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모면한 것은 아들이 집을 떠나버려 마음 놓고 쌀을 퍼가지고 큰아들네로 갔기 때문이었다.
- P11

안창민은 그 끔찍한 보복행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난감해져있었다. 보성과 조성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예비검속이란 학살이 자행됐던 곳마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거나, 벌어지리라는 것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괴로운 악순환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급한 것은 앞으로라도 그런 무법행위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단속하는 것이었다.
- P11

거의 모든 소작인들은 새로운 기대감으로 푸르러가고 있는 논들을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변화와는 다르게 안창민네가 들어오게 되어 벌교에서, 아니 보성군 안에서 머리꼭지가 하늘에 닿도록 펄펄 뛸 만큼제일 기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이었다. 그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 한 조각 없던 남편이 돌아왔던 것이다. - P12

"유서방ㆍㆍㆍㆍㆍㆍ 죽었네."
담배쌈지를 꺼내는 강동기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워메, 으짤끄나! 고것이 은제요?"
남편을 그리도 원망해 쌓던 샘골댁의 생각에 남양댁은 그만 절로 낙담이 되었다. 샘골댁은 그 누구보다 좋은 끝을 보았어야 했을 - P14

길남아 종남아 아부지가 왔다 인민공화국 만세다 河大治,
그는 씨익 웃고 있었다. 비로소 제대로 꽉 짜인 기분이었던 것이다. 이름을 써야 할 일이 별로 없었지만 어쩌다 쓰게 되면 그는 꼭꼭 한자로 썼다. 한자로 쓰면서 큰 大다스릴의 뜻을 가슴에 새기고는 했다. - P17

그 가족들에게 남겨진슬픔을 생각하면, 승리의 기쁨이란 승리의 울음이라고 했던 안창민의 말이 맞았다.  - P18

 읍면별로 구분해서 줄을 서 있었는데, 벌교읍 조직원들 속에는 안창민네의 소작인이었던 다섯 사람은 물론이었고, 들몰의 김종연·서인출· 유동수가 들어 있었고, 회정리 3구의 김복동·마삼수 그리고 지삼봉도 눈에 띄었다. - P19

혁명이 인간생존을 위한 미덕이라면, 효도는 인간윤리를 위한 미덕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당연한도리지 어찌 유교만의 잔재겠습니까.  - P26

손승호는 시를 쓰고자 했던능력과 남보다 책을 많이 읽은 박식을 동원해서 날마다 선전문 쓰기에 열성이었다. 그는 스물여섯 살 시퍼런 나이에 지리산에서 투쟁을 하다가 총살당해 죽어간 시인 유진오를 흠모하고 있었다.  - P29

"책임을 따지는 비판이라니, 좀 단순한 것 같군요. 작전차질을안 일으켜 부산까지 다 점령했다고 해서 전쟁에 완전히 이긴 걸까요? 그렇다고 일단 개입하기 시작한 미군이 전쟁을 포기했을까요?
그들은 거점을 제주도로 옮겨 반격을 가할 것이고, 제주도를 뺏기면 오끼나와로 옮겨 반격을 가할 겁니다.  - P31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보도록 합시다. 참김형, 김팔봉의 인민재판이 있고 며칠 뒤에 서울 이남에서는 인민재판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당중앙이 내렸소." - P38

부대는 야산 옆을 지나고 있었다. 산에는 나무가 꽤 많았다. 최서학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총을 내던지며 산으로 뛰기 시작했다.
"도망간다, 도망!"
"저기, 저놈 잡아라!"
이런 외침이 어둠 속에 퍼졌고, 웅성거림이 일어나며 대열이 흔들렸다. - P44

 여러 개의 총소리가 산속에서 울려왔다. 난사하는 총소리였다. 메아리가 겹메아리가 되면서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 네 개의 그림자가 산속에서 나타났다.
"어드케 돼서?"
"사살했습니다." - P45

진주 시내가 불타고 있었다. 8월의 지글지글 끓어대는 폭염 속에진주 시내는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시민 소개령이 내려지면서비행기들은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검은 연기를 토하며 불길은제멋대로 타오르면서, 다시 그 연기를 타고 너울거리며 아무 데로나 번져나가고 있었다. 
- P45

그 무차별 폭격은 하동 쪽에서 진격해 오는 인민군을 저지하고,
국군의 퇴로를 열기 위한 이중목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 P45

마음에 들면 엿이 한 가락이었고, 안 들면 담배통으로 맞는 꿀밤이 한 대였다.
"인나, 쪼깐만, 쪼깐만 더 눌르그라."
갑작스러운 말에 김범준은 문득 손놀림을 멈추었다. 그건 분명어렸을 적의 할아버지 음성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내려감은채 물부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할아버지였다. - P58

"예, 남자 한평생을 거는 일이라서 제 나름대로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것입니다. 사상의 선택이라는 것은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과달라서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가 없고, 입장과 관점에 따라 그가치가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더 인간을 위해정의로운 것인지, 어떤 것이 더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개혁하는 힘인 것인지, 어떤 것이 더 인간의 역사발전을 도모하는 필연법칙인것인지는 자명하게 판가름나 있습니다. 제가 택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님께서 납득이 곤란하시더라도 그 점만큼은 접어주셨으면 합니다." - P59

"그래, 맡은 일은 무엇이냐?"
"전남 서남지구 사령관입니다."
"그래, 누가 더 옳은지는 세월이 지내가봐야 알 일이고, 지금은서로 총을 맞댄 어지러운 세상이다. 사람이 권세를 지녔을 적에 그것을 여러 사람을 위해 쓰면 겸손해지고, 자기를 위해 쓰면 교만해지는 법이니라 실인심하지 않도록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 P60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박영발 위원장은 어떤 분인가요."
안창민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물었다.
"고향이 경상도로, 일제 때부터 철도노조를 기반으로 투쟁한 분이오. 불법화 이후 월북해서 모스크바 대학 단기 2년을 졸업했소.
이번에 전북도당위원장을 맡은 방준표 동무와고향부터 모스크바대학 졸업까지 그 경력이 똑같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박영발 위원장이 일제 때 고문을 당해 보행에 지장이 될 정도로 두 다리가 불편하다는 점이오." - P61

지하조직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야산대 활동을 병행했던 광주나 목포 같은 큰 도시에서는 인사조직이 삼중으로 겹치는 결과가 됐소, 야산대는 야산대대로 조직을 짧고, 지하조직은 지하조직대로 그랬고,
당중앙은 당중앙대로 조직을 짰던 것이오. 이건 우리의 전체적인조직이 파괴되면서 야기될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 P61

"그건 염려 마세요. 내가 이지숙 동무한테 부탁할 테니 소화 동무는 광주에 가서도 여맹에 가입해 여기서처럼 활동하면 당사업에는 아무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다."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 P63

그러다가 세상이 바뀌고 민청에 가입한 그는 머슴살이를 때려치우기로 작심했다. 그는 주인에게 그 뜻을 알리고, 그동안 장리변으로불려나가기로 해서 묵혀두었던 새경을 모두 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주인은 쌀이 다장리로나가 있다는 이유로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주인이춘삼의 태도는 독 오른 종기 꼬집는 격이었고, 성난 개 꼬리 밟는 격이었다. 성질이 폭발한 지삼봉은 마루로 뛰어올라 주인을 쌀가마니 내던지듯 멱살을 틀어잡고 허리치기를 해버렸던 것이다. 마루에서 마당으로 패대기쳐진 이춘삼은 괴상한 소리를 꽥 질러대고는 그만이었다. 목뼈가 부러져 죽어버린것이었다. - P65

자네 심뽀라는 것이, 괴기반찬에 쌀밥 배 터지게 묵고 나서 개떡 묵는 작인보고, 고것을무신 맛으로 묵냐고 하는 못된 지주놈 심뽀허고 같으다 그것이네."
"워따, 사람얼 비혀도 워찌 그리 못된 디다가 비허고 긍가? 사람이무참혀서 워찌 고개 들겄능가?" "긍께로 말 씹벅씩벅 허덜 말어." - P80

 재판을 받을 반동분자는 자칭 멸공단 단장이었던 윤태주, 그리고 청년단 단원이었던 오칠성 둘이며, 해당분자로 지삼봉 하나입니다. - P82

 역사상 뛰어나다는명장들의 작전이라는 것도 자기들 편에서 보니까 위대한 거지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속임수가 대부분 아니던가. 전쟁 자체가 지탄되고 부정되는 것도 다 그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속성 때문이 아니겠어?" - P93

"몰르겄이유, 안직도 불질를 공장이 남었는지원. 닥치는 대로폭탄 퍼부서대는 저놈에 색쌔기만 보면 진절머리가 나느먼유.
주인여자는 머리를 왜 저었다.
"저게 미국놈들 비행기란 건 알지요?"
손승호가 끼어들었다.
"고것이야 세 살 묵은 아덜도 아는 일 아닌감유." - P95

그들은 대부분 용산이나 영등포 쪽의 철공장이나 방직공장을 다니던 노동자들이었고, 인쇄공들도 꽤나 끼여 있었다.
그리고 동대문 밖이나 자하문 밖에서 온 농사꾼들도 상당수였다.
- P42

그들이 자원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엉뚱하게 선생이 있는가 하견, 회사원이 있었고, 잡지사 기자도 있었다. 조심스럽게 물어본 그들의 자원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선생은‘양키새끼들 꼴보기싫어서‘였고, 회사원은 ‘이승만과 공무원새끼들 쳐없애기 위해서‘였고, 잡지사 기자는 ‘가망없는 남한사회에 환멸을 느껴서‘였다. 최서학은 그들을 향해 미친 새끼들이라고 속으로 욕을 퍼부어댔다. 그러나 생각보다도 많은 자원자들에 마음이 켕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적이었다. 자신은 적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자원을 한 척하는 일부터 했다. - P42

남다른 선민의식과 우월의식을 가진 그로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논리 자체를 도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거부하고 혐오했다. 겨울이면 으레 머슴이 학교까지 업고 다녔고, 공부는 줄곧 1등만 해온 그로서는 인간은 평등하며, 평등해야한다는 논리가 도대체 허무맹랑하고 가당찮았던 것이다.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바로는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그 종류가 다르고,
그러므로 능력도 달라 절대로 평등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 P40

서울만 보더라도 사대문 밖에 사는 것들이 어디 사람인가. 안국동까지를 경계로 해서 종로로만 나가도 벌써 사람의 격과 질이 달라지는데, 사대문 밖에 사는것들이야 짐승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그런데 그것들이 사대문 안을 감히 넘보고 제놈들 세상을 만들겠다고 설치고 나서서 빨갱이군대에 자원들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괴뢰군놈들이나 내무서놈들도 효자동에서부터 시작해 팔판동 가회동을 거쳐 혜화동까지 집집마다 뒤지고 엎어 사람들을 잡아가고 물건들을 탈취하며쑥밭을 만들지 않았는가. 반동 착취계급들의 동네라고 떠들어대면서 불한당 강도 같은 놈들, 능력 있는 사람들이 능력 있는 만큼 당연히 누리는 것이지 그게 어디 착취란 말이냐.  - P43

이번 전쟁은 귀한피와 천한 피의 싸움이었고, 양반과 상것들과의 싸움이었다. 이번전쟁에서 지면 양반들은 상것들의 발밑에 깔려야 한다. 어찌 그런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 아직도 희망은 있다.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 P43

양반의 나라 미국이 우리 편인것이다. 믿을 건 미국밖에 없다. 제공권은 벌써부터 미국이 장악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우리 편인 한 아직 희망은 있다. 미국이여, 폭탄을 더 많이많이 떨어뜨려라. 공산당 괴뢰군들의 씨를 말려라. 최서학은 아무도 모르게 이를 앙다물며 전율하고, 흥분했다. - P43

"지금도 이장님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래요, 평소에 워낙이 인심을 사고 살아서 인민위원회 사람들까지 다 그렇게 불러요. 마음에 불심을 지니고 살면 세상이 제아무리 바뀌어도 다 아무 탈 없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 P100

"김 선생, 예비검속 소식 들으시었소?"
법일이 비탈길을 다 올라 그의 집을 끼고 돌며 물었다.
"예, 대충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때 순천을 떠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영영 이리 만나지 못할 뻔했지요. 소식을 듣자니까 순천에서는 아이들까지 다 죽였다고 하더군요." - P101

"그렇지만, 스님의 말씀대로 이 선배가 민족적 사회주의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언젠가는 혼란을 겪게 될 겁니다. 공산주의는 민족보다는 계급이 우선 아닙니까. 그 차이는 결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 P103

"너, 비행기가 밉겠구나."
"순사나 서청사람덜맹키로 밉고 싫어요."
"서청사람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다 알지?"
김범우는 너무 놀라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워째 그리 쉬운 것을 몰라라. 우리 아부지럴 죽일라고 헌 사람덜인디라." - P107

떠날 때마다 심재모는 견디기 어려운 죄의식으로 고개를 떨구고는했다. 어린 그들은 한마디로 소모품이었다. 1주일간의 사격훈련을가지고 총을 제대로 다루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 P114

어떤 기술이고 제대로 습득되려면 한 치 길이의 이론에다가 한 자 길이의 실습이 합해져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 치의 이론마저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전쟁터로 떠나가고있었다. 그건 몸뚱이로 적을 막게 하는 무모하고도 무책임한 살인작전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해도 그런 소모전은 있을 수없는 일이었다.  - P114

한 생명을 군인이란 이름을 붙여 전쟁터에 내보낼때는 최소한 자기방어는 할 수 있도록 총기조작기술을 습득시켜주어야 할 책임이 상부에는 있었다. 적이 기습을 감행했으므로 어쩔 수 없다. 그건 책임전가의 변명이고, 책임회피의 기만에 지나지않았다. 적의 기습에 대비하지 못한 것부터 책임으로 따져져야 할일이었다.  - P114

전쟁통이니 여자 값은 당연히 헐값일 것이고, 양주는 뒷거래되는 것일 테니 비쌀것 또한 당연했다.  - P115

땡볕으로 타고 있는 전쟁터에서 현오봉을 제일 먼저 맞은 건적군이 아니라 아군들의 시체가 썩는 냄새였다.
송장 썩는 냄새에 코가 차츰 마비되어 가며 현오봉이 두 번째로충격을 받은 것은 상상외로 궁지에 몰려 있는 전세를 파악하고서였다.  - P115

소화와 정하섭의 주생활은 하루로 끝나게 되었다. 정하섭이평양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 갑작스러움에 소화는 그저 모든 말이 꿈속에서 듣는 것 같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그가 가는 곳이 서울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평양인탓이었다.  - P122

"왜 가느냐고 물어야 할 것 아니요?"
문득 놀라움을 드러냈다가 이내 평온해진 눈으로 고개를 약간수그리고 앉은 소화에게 정하섭이 말했다. - P122

"이제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어야 되지 않소?"
소화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슬픈 기색이 더 진하게 드러났다. - P123

 그가 평생을 옆에머무는 바위이기를 욕심 부리게 되면 그때부터 가슴에 끝없이 깊은 업보의 샘을 파는 것이었다. 욕심은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하고,
어두워진 마음의 눈은 헤어날 길 없는 고통의 수렁을 만드는 법이었다.  - P123

정도많고 눈물도 많은 여자,
그래서 
좌익도 된 여자・・・・・・ 그는 슬픈 정이 가슴을 뒤덮어오는 것을 느꼈다. - P125

그분도 헤어짐을 서운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겸상을 하려 하다니, 서로 지체가 같은 양반집에서도 여자하고 겸상을 하는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같은 여자하고…. 그분은 공산주의를 해서 사람이 다른 것일까, 나 같은 것을 차등 두지 않는 그분은 진짜사람다운 사람이 아닌가. 소화는 전부터 겸상을 권해왔던 정하섭의 마음을 되새기며 세상 사는 의미를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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