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거침없이 
‘내 이라고 한 말이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주인이 바뀐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깨달음이었고, 그럼 우리 논에도 짠물이 찰 것이 아닌가! 이것이두 번째 깨달음이었다. - P47

"야이 씨부랄 놈아. 니만 사람이냐아!"
한 농부가 쥐어뜯듯이 소리 지르며 앞으로 내닫고 있었다. 그의 치켜올린 손에는 낫이 들려 있었다. 말리고 어쩌고 할 틈이 없었다. 낫이 정현동의 목덜미를 찍었고, 가슴을 찍었고, 쓰러지자 배를 찍었다.
"워메에, 살인났네!" - P49

발동기가 숨 잦아드는 소리를 한참 내다가 멈추었다. 발동기소리가 멎어버리자 들녘에는 생경할 만큼 진한 적막이 밀려들었다. 열두명의 농부들은 그 적막 속에 정물처럼 한동안 서 있었다.
"가야제." - P49

누군가가 말했고, 그들은 휘청거리듯 비틀거리듯 하는 걸음걸이들로 논두렁을 따라줄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정현동의 피투성이가 된 시체는 눈을 번히 뜬 채 10월 하순의깊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발치에 피를 머금은낫이 버려져 있었다. - P49

감골댁은 경찰서에서 이틀 동안 닦달을 받고 풀려난 다음 며느리가 율어에서 나올 듯한 그 임시가 가까워지자 남모르는 고생을겪어야 했다. 며느리가 멋모르고 집으로 찾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 길목을 지켰던 것이다.  - P51

"며느리가 애를 배가지고 나오면 그 길로 당장 데려오란 말이오.
내 말 어기면 어찌 되는지 알지요!"
군인 대장인가 백 뭣인가 하는 놈의 그 표독스러운 말을 감골댁은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온냐, 이 백가놈아, 니놈이 독새눈깔해갖고 - P51

 감골댁이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염 대장이라는 그 고마운 사람이, 약속을 안 지키는 나쁜 사람으로 취급될 때였다. - P54

 그러나 심 사령관에 비하면 염 대장한테 가지는 죄스러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사령관이란 분이 자기네 일로 빨갱이로 몰려 잡혀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골댁은 아무 데서나 합장을 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 전 비나이다. 심사령관님 시상에 둘도 없이 존 사람입네다.
그 몸 안 다치게 그 일 잘 풀리게, 보살펴주십소사, 보살펴주십소사  - P54

감골댁은 며느리에게도 심 사령관과 염 대장의 은혜는 평생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동안 얼마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심 사령관님이 순천이나 광주로만 잡혀갔더라도 씨암탉 한 마리 진하게 과가지고 면회를 갈 수 있으련만, 서울로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감골댁은 가슴 아린 속울음만 울었다. - P54

그녀는 자기 자신이 정서적으로 얼마나세련되고 문화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영화를 보러 가면 어떨까요, 제가 오늘 영화구경시켜드릴께요. 하면 충분할 걸 가지고, 제가 오늘 미스터 정을 영화에초대하겠어요, 하는 식이었다.  - P69

그리고 커피는 블랙으로 마셔야 제맛이 난다느니, 마늘냄새가 지독한 우리 음식은 역시 야만적이라는니, 하는 식의 말을 무척 뽐내는 듯한 기분으로 쓰기를 즐겼다.  - P70

시를 쓰겠다는 여자가미국 것이나 서양 것은 무조건 최고로 섬기는 사고방식도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토지분배를 왜 해야 하나요. 왜 남의 땅을 무조건나눠갖자는 거예요. 그런 강도 같은 도둑놈 심보가 세상에 어딨어요. 수확을 반반씩 나눴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예요. 억울하면누가 소작질하랬어요."  - P70

그녀는 구제할 길 없는 부르주아 근성의 소유자였고, 서양사대주의에 빠져 있는 썩은 영혼이었다. 그 결론과함께 그녀와의 만남을 단절하고 말았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고향 후배로서의 반가움이 전부였고, 그 다음부터는 조직에 끌어들일 수 있는가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만나는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그 감정의 색깔을 현격하게 변화시켜 갔다.  - P70

"그놈들 방법이야 얼마나 잔인하고 악랄하겠어요. 일본놈들한테전수받은 온갖 고문을 총동원할 텐데요."
"고문만이 아니라는 소문입니다. 고문을 해대면서 돈으로 매수를 하고, 좋은 자리를 놓고 회유도 하고 그러는 모양입니다.  - P75

그는 아버지가 입원했다는전보를 받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전보는 으레 좋은 일보다는 궂은일에 사용되는 빈도수가 많았고, 그럴 경우 그것은 터무니없이 냉정하고 거만하게 마련이었다. 그가 받아든 전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부친급입원급래요망모‘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골격만으로 된 인체도와 같은 열 개의 글자.  - P84

그 생략될 대로 생략되어 버린열개의 글자 중에 두개나 들어 있는 ‘급‘자는 사람을 턱없이 허둥거리게 만들어 기차로 떠밀어넣었고, 아홉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기차는 전보 내용을 곱씹고 곱씹으며 온갖 불길한 생각을 지칠 때까지 할 수 있도록 지겹게 긴 시간을 제공했던 것이다. - P85

"그 사람, 죽을 짓을 했군요. 죽음을 자초했어요."
"내 생각에도 그분이 너무 과욕을 부렸던 것 같아요. 그나저나세상이 이렇게 반으로 갈라져 다투다간 무슨 큰일이 벌어지게 생겼어요. 농지개혁법을 새로 바꾸든지, 지주들의 그런 행동을 법으로 단속하든지 해야지, 소작인들을 나쁘다고 할 수가 없는 형편 아닙니까."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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