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고지는 그 무심한 듯한 하루하루를 따라 차츰 농담이 진한 누른색으로 변해갔다. 마치도 화공이 섬세하고 세련된 붓칠을 하는 듯이. - P9

수천년 세월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농경사회에서 추수의 기점을 이루는 추석이 제일 큰 명절이 되고, 농사일을 시작해야 하는정월 대보름이 그와 버금하는 큰 명절로 꼽히는 것은 농경민의 합리성을 나타내는 생활모습의 본보기였다. - P10

 삐라는 단순히 선전·선동만이아니었다. 인민의 의식무장이었고, 인민과의 유대강화였다. 러시아혁명이 성취된 원천적 힘은 끊임없이 배포된 지하 팸플릿이었다는사실을 안창민은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 P22

이틀이 지나 여자들이 앞서고 남자들이 뒤따르는 400여 명의 행렬이 횡계다리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대열은 침묵 속에서 극장 쪽으로 빠르게 움직여갔다. 일체의잡담없이 이동하고 있는 행렬은 지난번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행렬이 1개 분대의군인들에게 앞을 막힌 것은 소화다리 입구인 삼거리에서였다.
"이거 뭐하는 짓이야, 해산하라!" - P32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조건 지주들의 편을 들고,
소작인들을 무더기로 죄인이라는 투망속에 몰아넣으려는 백남식의 의도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 P34

권 서장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불현듯 심재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사하게 석방되었다는 편지를 받은 뒤로 더는 소식이 없었다. 그가 그리웠다. 그와 근무를하면서는 감정 한 올 다친 일이 없었다. 어떤 일이나 올바로 판단하고, 바르게 처리하려고 노력했고, 또 실천한 사람이었다. 나이에 비해 똑똑하고 진중했고, 당당하고 정직한 군인이었다.  - P37

 권 서장은 웃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입성이 남루하고 굶주림에 찌든 얼굴들이었다. 까닭 모를 쓰라림이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 P38

권 서장의 약속대로 다음날 오전에 60여 명이 풀려났다. 그러나주모자로 지목된 김종연과 유동수 등 일곱 명은 풀어주지 않았다.
그들의 죄목은 계엄하의 집단선동 및 질서교란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풀려나기 전에 이미 순천으로 넘겨졌던 것이다. - P39

지주들의 논빼돌리기와 그것을 막으려는 소작인들의 힘모으기싸움은 벌교에서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잇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 P39

 군경은 멀리 있는 좌익과의 싸움보다는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두 계층의 정면충돌을막기 위해 소작인들을 상대로 하여 지주들의 대리싸움을 벌이고있는 형국이었다. 그런 편파성 때문에 군경에 대한 불신과 경원은날이 갈수록 깊어져갔다. - P40

"율어사람덜 살판났구마 천국이 따로 없당께."
"나야 고것보담 이태나 지주놈덜이 쌀 띠믹힌 것을 생각허믄 고것이 을매나 달고 꼬신지, 씨엉쿠 잘되었다, 씨엉쿠 잘되었다. 허는소리가 절로 남스로 궁뎅이춤이 일어나는 것이, 똥구녕할라 웃을라고 헌당께." - P42

그 농토를 그는 염전으로 둔갑시킬 계획으로 사들인 것이다. 그는 박씨와 안씨, 두 지주에게 그들을 사들이면서 값을 모지락스럽게 후려때렸음은 물론이고, 거래도 일체 비밀에 부쳤다.
- P43

논을 사들이기 전에 군청과 도청에까지 은밀하게 선을 대서 염전허가가 나올 수 있도록 뒷손을 쓴 것 또한 물론이었다. 염전이 제대로 되어 술도가처럼 수입이 안정을 이루면 더 말할 것 없고, 만약 민물의 영향으로 소금기가 약해 염전이 제대로 안 될 경우에는합법적으로 농지개혁을 피했다가 그것이 다 끝나고 나면 다시 논으로 바꿀 심산이었다.  - P43

멍텅구리 겉은 자식들, 작인이란 것들이 미친개들맹키로 요리 설레발치는 판에 내가 왜 논을 사들이는지 몰르고 나를 모지래게 봤겄제? 느그가 내 머리를 워찌 따라오겠냐.
다 타고나야 하는 것이다. 타고나야 자기 생각대로 논을 헐값에사들인 정현동은 중도방죽을 걸으며 포만감에 넘치는 기분으로 혼자 웃고 또 웃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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