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장의 추측은 정확했다. 손승호를 그 자리에 앉혀 염상진과 싸움을 붙이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한 엄상구는 권 서장도 거치지 않고 백남식에게 직접 귀띔을 했던 것이다. - P264
문기수의 전향과 지부위원장이라는 감투 아닌 감투를 쓴 것에대해 이지숙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자는 이미 변질돼 있소. 언제 등을 돌리느냐만 남아 있는 자요. 회생시킬 가망도 없고, 우리가 볼 피해도 없으니 방치하시오." 염상진이 읍내 조직을 맡기며 이미 오래전에 한 말이었다. - P269
모내기가 걸판진 한바탕 잔치처럼 지나가 온 들녘을 초록빛으로물들여놓을 즈음,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었다. 그 소식은 신문에 앞서 방송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 P269
그리고 그 대가를 아무 속임 없이 되돌려주었다. 보리가 밭보리에 앞서 타작되었고, 작은 흰 꽃이 표나지 않게 피었다 이울자 감자밑이 실하게 들었다. 이즈음이면 마른버짐이 피고 껍데기만 남았던 아이들의 얼굴도 차츰 핏기 도는 꽃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꽁보리밥이나마 배불리 먹게 되었고, 눈치껏 이런저런 서리를 해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 P278
대로 안타까움이 타작마당에 한숨으로 토해졌다. 초여름에 한 번, 늦가을에 한 번, 1년에 어김없이 두 차례씩 당하고, 그러기를 수십년 되풀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버릇도 습관도 되지 않고언제나 새로움으로 피냄새나는 한숨을 토해내게 했다. - P279
그건 체념이 안 되는 억울함이었고, 납득이 안 되는 분함이었다. 땅을 빌려지은 농사니까 의당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체념을 하려고도 애써보았다. 그러나 수확의 반을 뚝 잘라내고, 나머지에서 온갖 농비를 제하고 말면 다음 절기까지 식구들 입에 풀칠할 것이 없다는확인 앞에서 억울함과 분함은 새로운 피냄새로 솟아오르곤 했다. - P279
그건 땅을 빌려쓴 당연한 대가의 지불이 아니라 생살을 뜯기는 빼앗김이었던 것이다. - P279
손수 농사를 지었으면 살림살이가 나아지진 못하더라도 새끼들 데리고 굶지는 말아야 그나마 납득이 되고 체념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욱 기막힐 일은 나라가 정했다는 3·7제니 4.6 제니 하는 건 말뿐이었고 지주들은 배짱을 부리며반타작에 못을 박았다. - P279
소작제가 그러한 데다 장리빛도 5부로 굳어진 채 내려갈 줄을 몰랐다. 그 두 올가미에 목이 걸려 있는 한 앞길은 캄캄한 밤일 뿐이었다. - P279
유상몰수, 유상분배 지주에게는 돈을 주고 농지를 몰수하며,-소작인은 돈을 내고 농지를 분배받는다는 그 첫 번째 방법에 대해모든 소작인들은 일제히 반발의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자신들의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번 정해진 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실망과 불만을 동시에 품게 되었다. - P280
그들의 의식 속에 분명하고확실하게 판박혀 있는 농지개혁이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던 것이다. 해방을 맞이한 뒤로 그리도 목마르게 농지개혁이 되기를 바라고 기다려왔던 것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농지를 갖게 되리라는기대 때문이었다. - P280
라라 혀뿐 것 아닌가." "다 숭악하고 징헌 도적놈덜이여." "아흔아홉 마지기 지닌 놈이 한 마지기 가진 사람 것 뺏어 100 마지기 채울라는 것이 있는 놈덜 도적놈 심뽀니께 고것이야 더 말 씹혀봤자 입만 아픈 일이고, 인자 믿을 놈 하나또 없는 시상잉께 우리 앞감당우리가 혀야 써." "금메, 이래갖고는 더 못살겄는디…………." 남자들에못지않은 여자들의 입모음이었다. - P283
작인들을 하나로 묶어가는 일체감으로 변해갔다. 며칠이 지나면서, 농지값을 일시불하는 것이 아니라 5년 동안에 걸쳐 나누어 내게 된다는 내용이 전해졌다. 그 내용은 사람들의 감정을 다소 누그러지게 하는 작용을 했지만,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품게 된 근본적인 불만과 불신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 P283
때를 같이해서 보성군 일대에 밤을 이용해서 삐라가 살포되었다. - P283
"경교장 바로 앞이 적십자병원인데도 운명했다면, 치명상을 입은모양이군." 긴 침묵에서 벗어나며 김범우가 흘린 혼잣말이었다. 침통한 그의 얼굴은 어떤 분노를 담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갔어・・・・・ 비참하고 허망해……." - P287
질그릇처럼 소박하게, 그리고무쇠솥 같은 강인함을 지닌 얼굴이었다. 결코 미남일 수 없으되 의지로운 힘과 믿음직스러운 무게를 지닌 혁명가다운 얼굴이었다. 그분을 총으로 쏴서 죽이다니… 정말이 나라는 끝장난 것인가. - P288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하게 평생을 바쳐 이국땅에서 조국 독립투쟁을 하다가 명색이 해방된 땅에서 4년을 다 못 살고 총을 맞아 죽어야 하다니… 일흔넷, 그분의 일생을 이렇게 허망하고 참담하게종지부 찍게 만든 그놈들, 그놈들을 다시 죽여야 할 게 아닌가. - P288
그분을 미워하고 적개심을 품은 놈들은 뻔하지 않은가. 첫째가 이승만이었고, 둘째가 한민당을 위시한 친일반역 집단이었다. 그분은줄기차게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민족 자주성의 확립을 위해 민족반역자들의 일소를 변함없이 역설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세력 중 어느 하나가 그분의 가슴에 총을 쏴댄 것이다. - P288
그분의 진실과 양심이 해방 4년 동안에 걸쳐 대쪽 같은 의지로 성취하려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 통일자주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여 첫째 외세배격, 둘째 민족통일, 셋째 민주실천이 아니었던가. 그실현을 위하여 그분은 미소가 점령한 현실상황에 정면으로 맞서제2의 독립투쟁을 결연히 선언하면서, 지금은 권력쟁취의 시기가아니라 진정한 독립쟁취의 시기이므로 모두 사심을 버리고 하나로뭉쳐야 할 때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 P289
그래서 그분은 반탁을 했고, 단정수립을 반대했으며, 좌익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통일을이룩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남북협상의 험로에 나섰고, 끝끝내 단정선거를 거부하여 권력의 길을 외면함으로써 스스로의 진정성을증명해 보였다. 그분의 그러한 언행일치는 날이 갈수록 적을 많이만들게 되었다. 군정의 미움을 샀고, 이승만의 증오를 받았으며, 한민당의 표적이 되었다. - P289
그분의 노선을 지지했던 것은, 그분이 내세운 세 가지 실천목표가 장구한 민족의 삶을 위해 옳고 포괄적이었기 때문이고, 그 실천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편중되지 않고, 민족우선 아래 모든이데올로기를 포용할 수 있는 폭과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 P290
두 강대국의 점령과 함께 두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상황 아래서 누가 가장 바람직한 민족의 지도자였을까. 사회주의혁명을 앞세운 극좌의 박헌영이었는가, 권력장악만을 앞세운 극우의 이승만이었는가, 좌우합작을 앞세운 중도적 여운형이었는가, 민족자주를 앞세운 포용적 김구였는가. 두 강대국이 양보 없는 대립을 하는 한 극좌나 극우의 노선은 필연적으로 민족분열을 초래하게 되어있었다. 이데올로기에의한 민족의 분열,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고 비극아닌가. - P290
그러나 모양이 먼저 총을 맞고 떠나갔고, 이제 백범마저 총을 맞고 떠나가게 되었다. 두 민족주의자는 차례로 제거되고 극우와 극좌만 남겨진 것이다. - P291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의 패권주의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의 팽창주의가 대결하는 틈바구니에서 두 민족주의자가 그렇게 죽어가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어찌 될 것인가………….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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