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미 임관수가 쉰밥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정작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규모의 계엄군이 나타나게 되자 염상구의 마음은 임만수한테서씻은 듯이 떠나고 말았다. - P108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임 대장님. 그런데, 토벌대는 어디에주둔하고 있습니까?" 99 "예, 저어∙∙∙∙∙∙ 우선 남도여관에…. "뭐요, 여관? 당장 짐을 꾸려 남국민학교운동장에 집합시키시오!" 심재모는 의자 옆에 세워둔 M1소총을 불끈 들었다가 놓았다. 쿵! 마룻장 울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 P109
"임만수, 똑똑히 들어! 모두 까내놓고 뒤집어놓고 보면 그저 그타령이라고? 네놈의그한마디로, 네놈이 일정시대에 얼마나 개같이 더럽게 살았는지 환히 알 수가 있다. 개눈엔 똥밖에 안 보인다 - P111
나도 네놈처럼 산 줄 아느냐. 네놈이 일본 말단순사질이나 형사질을 해먹다가 해방이 되고나서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다시복직되어 토벌대장 노릇을 해먹으니, 나도 네놈같은 과거를 가진관동군 출신쯤으로 뵈는가? 정신 똑바로차려난 독립군 출신은못 되지만, 학병 출신이다. - P111
그 학병 출신이야 1년 남은 공부를 작파하고 내가 왜 군대에 투신한 줄 아는가! 바로 네놈들 같은 썩어빠진 종자들이 이 나라의 권력조직 속에 득실거리기 때문이었다. 위로는 친일지주계급들이 풍쳐지고, 아래로는 네놈 같은 민족반역자들이 모여 권력조직 칠팔할을 장악했으니 이 나라 장래를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P112
너 같은 놈들은 해방이 되자마자한 놈도 남김없이 감옥에 처넣었어야 돼. 그리고 엄정한 재판을 거쳐 형량을 정하고, 그 기간을 강제노동으로 채우게 했어야 돼. 그것만이 네놈들의 반역으로 더욱 피폐해진 조국 건설에 다소나마 봉사하게 하고, 민족 앞에 최소한의 사죄를 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네놈들은 그런 속죄의 기간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네놈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지 못했고, 더구나 다시 권력조직에 포함되고 말았으니 모두가 네놈처럼 안하무인의 짓을 하는 것이야.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다니, 네놈은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영창감이야!" - P112
"동네단위의 불순분자 색출이라, 안전지대만 찾아다니며 민폐만끼친 모양이군." 심재모는 혼잣말을 하듯 하고는, "잠적한 반란세력소탕작전은 전개하지 않았단 말이오?" - P113
그의 존재가 믿음직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불편한 것 같기도 했고, 쓸 만한 사람 같기도 했고, 귀찮은 존재 같기도 했고, 서로 말이 없는 가운데 사람들은 제각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감추고 있었지만 심재모에 대하여 달갑잖고 마땅찮게 여기는 감정은 공통되고 있었다. - P115
그들은 내선일체(內鮮一體)만이 우리가 복되게 살 수 있는 최선최상의 길이라는 글을 써대는 한편으로, 성전(聖戰)에 나가 죽는 것만이 가장 영광된 젊은이의 일생이라는 요지의 글들을 뻔질나게써서 선동을 일삼고 있었다. 그들은 글만 쓴 것이 아니었다. 떼지어몰려다니며, 청년 장정은 성전으로, 처녀들은 정신대로 솔선해서나서자고 강연을 하고 다녔다. - P116
심재모는 남태평양 섬들을 이동하면서 그 문필가라는 족속들을 얼마나 중요하고 저주했는지 모른다. 독립투사를 밀고하는 밀정보다도, 독립투사를 고문하는 고등계의말단형사보다도 그들은 더 더럽고 흉악한 종자들이었다. - P116
그의 의식은 가업을 이어 장사로 안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뜻을 함께하는 학병 출신들과 군대로 뛰어들었다. 그는 학병시절부터 남다른 사격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M1소총을 다루었었다. 노획물인 M1소총은 저격용이었고, 자연히 사격술이 뛰어난 그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소총에 비해 M1소총의 성능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조준의 숙달을 거치고, 목표물의 거리와 탄알의 이동곡선이 직감적으로 계산되는 단계를 지나면 이동표적이라도 얼마든지 적중시킬 수있도록 명중률이 높은 총이었다. 심재모는 M1소총을 통해서 미국 - P117
어떤장소 어느 경우에도 부녀자를 희롱하지 말것. 셋째이, 어떤 경우어느 입장에서도 민간인을 구타하지말것. 셋째삼, 어떠한 상황에서도 민간인의 재산에 대해서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손대지 말것. 호의라고 해서 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먹는 경우에는, 첫째 사항의 군기문란, 둘째 사항의 근무이탈, 셋째 사항의민폐유발이 적용, 즉결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허용되는 것은 단 하나, 목이 말라 물 - P120
풀리는 법인데, 양은 양만 옳다 하고, 음은 음만 옳다 하니 갈수록꼬이고 얽힐 수밖에. 예로부터 이런 세상을 난세라 했고, 난세에는깊고 넓은 뜻 가진 사람이 살기가 어려우니라. 내가 힘닿는 데꺼정손을 쓰긴 했다만 결과가 어찌 될지는 두고 볼 일 아니겠냐." - P132
그런 움직임의 원인은 바로 아버지에게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가 해방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 벌교지부위원장을 지낸 전력(歷)이었다. 자신이 귀국했을 때는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정에 의해 이미 해산되고 없었고, 아버지가 위원장을 지냈다는 사실은 어머니의 귀띔으로 알았던 것이다. 김범우는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가슴 저리는 아픔을 느꼈는지 모른다. - P133
"난 전혀 협박을 받은 사실이 없어요. 내가 유리하자고 그런 거짓말을 하면 염상진 씨를 악질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거 아닙니까." 전 원장이 고개를 저으며 한 말이었다. 김범우는 하도 어이가 없어 전 원장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극히 사람다운사람 하나가 눈을 껌벅이며 앉아 있었다. - P135
일정 때의 냄새가 물큰 풍겨왔다. 그 냄새는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일장기의 섬뜩함과닛뽄도의 서늘함과 게다소리의 싸늘함 같은 것이 뒤섞인 듯한 아주 기분 잡치는 냄새였다. - P139
그녀의 남편이 좌익이었던 까닭이다. 서로가 똑같은 입장, 정하섭을 보호하고 비밀을 지키는 데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을 고를수는 없었던 것이다. - P145
지주계급과 착취계급을 쳐없애는 혁명, 소작인들이 공평하게 땅의 주인이 되는 혁명, 가난도 굶주림도 없는 세상을 일으키는 혁명, 아아 그날은 언제나올 것이냐. 장맛비에 봇물이 터지듯 그리 시원한 혁명의 날은 언제나 올 것이냐. 하대치는 주먹을 부르쥐며 다시 몸을 뒤척였다. - P164
돈이 제대로 돌지 않게 된 서운상은 논을 사들인 값보다 조금높여서 사람에게 줄을 대다보니 소문이 번졌고, 그 소문을 듣게 된 작인들은 자신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가 터졌음을 알고 서운상에게로 몰려갔던 것이다. 작인들의 서슬에 둘러싸인 서운상은끝까지 부인을 못하고 사실대로 다 털어놓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내막을 정 사장이 알 리가 없었다. - P171
들일이며 밭일이며를 치러내야 하는 농촌 아낙네로서 수건을 머리에 두르는 맵시를 익히는 것은 부잣집 여인네들이 비단저고리옷고름 매는 맵시를 익히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농사일을 하는 아낙네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은 들일이나 밭일을 나가면서 농구를 챙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뉴월 땡볕 아래서 농사일을 할 때 그것은 직사광선을 막는 모자였고, 팥죽땀을 닦아내는수건이었고, 그늘에서 쉴 때는 깔개였고, 일을 마치고 나면 옷털이개였고, 임질을 할 때는 또아리였고, 예기치 않은 물건이 생겼을 때는 보자기였고, 길을 가다가 내외해야 할 남자라도 마주칠 때면 눈길가리개였다. 머릿수건은 여름에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 P188
머릿수건은 여름에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에는 부족함이 없는 방한모자의 구실을 해냈다. 겨울 마파람을 받고 걸을 때 귀는 그 얼마나 시린가. 그런데 머릿수건은, 머리카락한 올이라도 흩어짐이 없도록 꼭꼭 붙여 빗어 추위를 잘 타는 쪽진 머리만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귀까지 넉넉하게 감쌀 수 있도록매는 것이라서 더없이 좋은 방한모자였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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