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첫 생리를 경험한 이후 두 번째로 느끼는 새로운 자기 생명에 대한 발견의 경이로움이었다. - P12
손숭호를 향해 침을 뱉었다. 손승호를 둘러싸고 떠들어대고 있는 선생들은 똥통의 구더기만도 못해 보였다. 사회주의를 배신한손승호가 어제 한 짓은 센티멘털리스트의 충동적인 행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화를 걸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배신자의 덕을 보는 셈이었다. - P10
"나, 염이오." 마침내 울려온 짧은 음성,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져왔다. "네, 담임 이지숙입니다. 제말을 들으세요. 애가 성격이 위험해요. 제가 오늘 시간이 없습니다. 네에, 오늘 밤 안으로 결정을 내리세요. 언젠가 찾아뵙도록 하지요. 네에, 안녕히 계세요." "고맙소" - P11
그가 비록 배신자일망정 속물근성은 별로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지금 속물들에 의해 소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고역스럽고 괴로울까. 그녀는 손승호가 가엾게도 여겨졌다. - P12
몸져 앓아눕게 된 것은 잡혀가서 치른 곤욕 탓만이 아니었다. 몸은 갇혀 있을 때부터등골에 오소소 찬바람이 일고 팔다리가 찌부드드하니 좋지를 못했는데, 동생이 어렵게 꺼낸 말을 듣고는 그대로 병이 나고 말았다. 상심(心)이라는 것이 허리 꺾일 병이라는옛말이 맞는 말이었다. - P13
무신 말인고허니, 좌익을 헌 집안에는 내년부텀 소작을 안 내주게 될것이라는 말이요. 요것이 머나라가 정해서 시키는 법이 아니고, 원래 지주가 자기 논밭 갖고 자기맘대로 허는 것인디, 요번 난리에 좌익헌테 안 당헌 지주가 없고, 그 사람덜언 소작을 안 부치기로 맘얼 정해가는 모냥이요." - P13
가슴에는 까닭 모를 서러움이 차츰 차오르고 있었다. 서러움은가슴을 채우고 목을 채우고, 입으로 넘쳐올랐다. 추수를 끝내서더 넓어 보이는 고읍들이 서러움으로 차고, 산들도 서러움 속에 잠기더니 마침내 하늘까지도 서러움으로 뒤덮였다. 그 하늘이 차츰흐릿흐릿 변하고 있었다. 들몰댁은 무심결에 눈을 훔쳤다. - P14
길남이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서 들몰댁은 얼핏 남편을 느꼈다. 정없이 산 남편이 아니었다. 정을 나눌 새도 없이놓쳐버린 세월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이리 추워지기 시작하는데 어느 산중에서 겨울을 지낼까. 소문으로는 조계산이라고도 했고, 지리산이라고도 했다. 어느 산이든 가볼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고, 몸이나 성하기를 빌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 P15
불현듯 남편이 그리워졌다. 당장 저 산줄기들을넘고 넘어 찾아가고 싶었다. 두 아이만 없다면 정말이지 당장 찾아가고 싶었다. 무슨 고생, 어떤 고초를 겪더라도 함께 있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죽고 싶었다. 들몰댁의 꺼칠한 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P16
그런데도 그 여자가 정겨운 이웃이아니라 무서운 감시자라는 판단이 백지에 찍힌 먹물처럼 확실하게들몰댁의 의식에 박혀온 것이다. - P18
위로의 말도 모두 거짓이었고 위장이었고 함정이었다. 더구나 아이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던 것은 노골적인 감시였다. 도대체 구룡댁은 언제부터 그 짓을 해왔던 것일까…………. 들몰댁은 팔이 후들거려 걸레를 짤 수가 없었다. 구룡이 경찰보다도토벌대보다도 청년단보다도 더 무섭게 느껴졌다. - P19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은 끊을수도, 헤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거미줄이었다. 무신 짓얼혀서라도 두 자석 안 굶기고 키울팅께 꿈에라도 올 생각마씨요, 꿈에라도올 생각마씨요. 들몰댁은 기도하듯이 간절하게 남편에게 말하고 있었다. - P19
들몰댁은 구룡댁의사립앞을 지나며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로눈치 챈 표를 내서는 안 된다. 예전처럼 변함없이 친한 척하며 지내야 한다. 그러면서 들몰댁은 어떤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구룡댁은 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 P21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소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만약 그리 되면 저 갯뻘밭의 꼬막을 캐서라도 살아가리라 했던 지난번의 생각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 P23
"긍께, 아그덜 아부지 이름이 하대친디, 폴세부텀좌익물이 들었다가 요분 난리에 앞장섰구만요. 그란디 결국 꽃게가불고 식구덜만 남았는디, 좌익 손에 부모 잃어뿐 젊은 사람덜이 부모 원수갚을라고 패럴 짜갖고 밤에 좌익 헌 집덜얼 찾아댕김서 매질을 혔구만이라. 시아부님은 그때…………." - P25
그러므로 첨산은 고흥의 문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고흥사람들은 첨산을 고흥을 지키는 수문장이라고 믿고 있었고, 벌교사람들은 어디서나 그 기이하게 우뚝 솟아 있는 산을 바라보면서 고흥사람들의 말을 수긍했다. 고흥사람들은 그 산을 신성시해서 함부로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 P27
. 40여 명이 전부인 학생들을 줄을 세우고 구령을 붙여가며 신사참배를 다닌 그 유별난 열성은 접어둔다 하더라도 그는 두 학생을 가미카제 특공대로 설득, 자원시킨 공로로 서장의 표창을 받은 위인이었다. - P28
무질서하고 어지러운세상이었다. 모략이 진실을 살해할 수도 있었고, 중상이 순수를 파괴할 수도 있었고, 허위가 진실로 둔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빗장뼈가 부러진 몸으로 광주까지 옮겨갔을 그분의 신변이 염려스러웠다. - P34
고법으로 넘어간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고법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판결과는 별개로 그만큼 신변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 P34
이 선생은 공산주의가 싫어 목숨을 걸고 삼팔선을 넘어온 월남인들의 애국심을 인정하지 않았고, 공산주의 성향이 강한 소작인들을 오히려 두둔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교육적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 P36
결말이 날 수밖에 없으리라 싶었다. 김범우가 알고 있는 이명준은사회개혁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선우진의 입장에서 보면 이명준은 공산주의자로 오해될 수밖에 없었다. - P37
선우 선생님은 주관적 경험이 너무 강하시고, 이 선생님은객관적 논리가 너무 강하시거든요. 원래 토론에는 승부가 없는 법이니까 이 상태에서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김범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 P37
내가 선우 선생한테 하고 싶은 말이 한 가지 있다면, 현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선우 선생이 겪은 경험에 예속되거나 또는 피해를 입은 보복감정으로 가치를 설정하거나 판단의 기준을삼거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탈피하지 못하면 생각이 왜소해지고, 사태를 오판하게 되고, 사람을 오해하게 되고, 스스로 외로워지게 됩니다. - P38
게티즈버그 연설을 한 에이브러햄 링컨 아닙니까. 그는 ‘민주주의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정의했습니다. 그것은 인권선언이며 인간옹호인 동시에, 국민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봉건사회체제나 전제군주체제에 대한 전면부정이며 정면도전이며 혁명선언인 것입니다. - P39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봉건사회나 전제군주체제에 반동으로 생겨났다는 데는 동일성을 갖습니다. - P39
만약 미·쏘가 남북을 분단시키지 않고 우리가 해방을 맞았다 하더라도 결국 지주계급의 몰락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기운이고 역사의 필연인 것입니다. 그런데 미·쏘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면서 이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변은 바로 이남에서 일어났습니다. 집권을 노리는 일파와 자기 방어를 필요로 하는 지주계급이 뭉쳐져 정치세력화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에 대한 역행이고, 사회의 기대에 대한 배반이었습니다. - P40
이번에 일어난 사건을 군부 내에 침투된 소수 공산세력의 책동으로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수·순천만이 아니라 벌교·보성·조성·고흥까지 거의 동시에 공산세력에게장악당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아까 이 선생이 했던 말의 의미는제2, 제3의 그런 사건을 막는 방법은 단순한 폭력행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선우 선생, 이 선생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 P41
지금 이남이 내걸고 있는 민주주의는 링컨이정의한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정당한 사회개혁의 절차를 거쳐 지주계급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주계급을 보호하고 있는 이남의 체제는 민주주의라는 허울뿐봉건사회의답습이고 연장일 뿐입니다. - P41
가슴이 답답했다.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와 불필요하게 긴말을 한 다음의 허탈이 무겁게 밀려왔다. 의식이나 인식의 차이는 어찌할 수 없는 평행선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었다. - P42
기동성과 무력행사도 또한 놀랄 만한 것이었다. 비행기로 순천에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함대로 여수에 무작정 함포사격을 퍼부어대면서, 가까운 지역들의 군경을 투입시킨 입체공격은 전에 볼 수없었던 완전한 전쟁수행이었다. 그건 자신들이 세운 정부를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의 표출인 동시에 공산주의를 말살하고자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 P43
다염상구는 외서댁을 찾아가기로 했던 생각을 지워버렸다. 한번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그의 성미에 불이 당겨지고 있었다. - P46
"저년얼 찌그 벽에다가 뽀오짝 붙여 돌려세우니라." 염상구는 느릿하게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유난히 길게 늘어지는 ‘뽀오짝‘이라는 어조가 잔인스러웠다. 두 부하가 간호원을돌려세워 벽에다 바짝 밀어붙였다. - P49
염상구는 이지숙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그녀는 허물어지듯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염상구는 한 가지 방법만 더 사용해 보고 끝낼 작정이었다. - P65
잎과줄기가 억센 바다갈대는 꽃도 산갈대와는 다르게 피었다. 산갈대가 햇솜처럼 희고 나풀거리는 꽃을 피우는 데 비해 바다갈대는 푸른빛 도는 숱 적은 흰 꽃을 피워올렸다. 김범우는 그 푸른빛 도는바다갈대의 흰 꽃을 좋아했다. - P65
버마의 정글 속이나 태평양상의외로운 섬에서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문득문득 떠오른 것은 그 갈꽃밭이었다. - P66
"약이오." 전원장의 짧은한마디가 다시 염상진의 가슴을 쳐와서는 긴 메아리로 울리고 있었다. - P70
사답을 소작인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쪽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해야 하는 승려들의 집단인 절집이 몇백 년에 걸쳐서지주 노릇을 해온 것만도 부끄러운 죄업을 쌓은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사답의 소유권을 소작인에게 넘겨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따르고 실행하자고 했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절 대중들은 뭘먹고 살라고 그런 소리냐고 맞선 것입니다. - P73
"이번 반란사건이 일어나고 일제히 좌익 색출이 시작되자 법일스님이 좌익으로 몰려 잡혀들어갔습니다. 법일스님은 지금 광주 고법으로 넘어가 계십니다." - P75
"법일스님은 예사 스님이 아니십니다. 열여섯에 출가해서 스물넷, 그러니까 법랍(法) 8년만에 법사가 되셨고, 일본 유학까지 하셨습니다. 웬만해서야만해선사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운정은 귀가 번쩍 뜨였다. "만해라니?" "그 독립운동하셨던만해선사말입니다." - P75
가르침인 ‘탐욕을 버리라‘ 함을 그는 절집에서부터 실행하려고 했을것이다. 운정은 그 사람, 법일의 깨달음과 용기가 눈물겹게 느껴져왔다. 그런 사람이 좌익으로 몰려 재판을 받고 있다니…………. 운정은부끄러움과 죄스러움으로 몸이 죄어옴을 느꼈다. - P79
선암사도 사하촌(寺下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쌍암면 일대에도 농토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절 재산이라는 것은 주지를중심으로 해서 재무담당승 등 몇몇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외의 승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 P78
추수철이 되면 쌀가마니를 실은 달구지 행렬이 일주문에서부터 10리를 이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달구지에는 쌀가마니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자반이며, 곶감이며, 잣이며, 유과를 담은 소쿠리들이 따로 실려 있었다. 그런 것들은 이미 체결된수확량과는 상관없이 소작인들이 마련한 선물이었다. 소작을 부치게 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계속 소작을 부치게 해달라는 뜻이거기에 담겨 있었다. - P78
"오냐! 니년이 누구냐. 불쌍헌우리새끼빨갱이로 모는 니년 가쟁이럴 나가 먼첨 찢을란다아!" 죽산댁은 느닷없이 외쳐대며 지게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러잖아도 붙들려 들어갔다가 나와서 심기가 비꼬이던 참이었는데, 어떤 년이 화풀이감으로 잘 걸렸다 싶었던 것이다.
죽산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빨갱이집안 새끼허고 순사집안 새끼는 저승꺼지가서도 상극이께 다시는 우리 아들하고 못 놀게 맹글어, 빨갱이 문딩이만도 못한 종자들잉께 - P83
"아부지럴 욕허는디도?" "그려, 못 들은 디끼 혀." "대답혀 요것도 약속잉께." "이....… 알겄어." 광조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죽산댁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흘러내리고 있었다. - P86
남편이 하는일과 상관없이 경찰들이나 관공서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대해서는 죽산댁도 누구 못지않게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 P88
"가정과 공부도 충실히 하면서 시 습작도 열심히 하고 있어" "둘 다 가질려고?" "희망은 그렇지."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누나는 천재가 아니잖아." 경희는 멈칫 긴장했다. 대꾸할 수 없도록 허점을 찔린 것이었다. "그래, 난 천재는 아니지." 경희는 자조적인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동생 앞에서 그 사실을수긍해야 하는 기분은 참으로 쓰고도 뚫었다. - P101
경희는 동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충격이 왔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솟구쳤다.동생은 이미 가장(家長)이 되어 있었던 것이고, 외삼촌 같은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그보다 한발 앞선 현실주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희는그 사실이 그렇게 슬프고 아플 수가 없었다. - P102
"참말로 썩을 눈에 시상이시. 해방이되면배불르고 활개치는 시상이 올 줄 알았등마 갈수록 첩첩산중, 지옥중에 불지옥이랑께. 요리 험한 시상일 바에야 일정 때가 훨씬 나았제." - P104
"고단하실 텐데 우선 여장부터 푸시지요." 읍장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여장이라고요? 난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계엄하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소. 계엄하의 군경은 근무에 밤낮이 없다는것쯤 아실 텐데요."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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