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승호가글재주가 있다면 안창민은 손재주가 있었다. 그들 둘에 비해 염상진이나 김범우는 말재주가 월등했다. - P123

"허다니, 섭헌 사람은 정작 누군다. 나하고 헌 약조는 워쩌고,
붕알이 한 쪽밖에 없는 거맨치로 남자가 워째 그려."
강동식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좀체로 화를 내는 일이 없는 강동식이었으므로 하대치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121

잠시 멀뚱하니 강동식을 쳐다보았다. 강동식의 말뜻을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었다. 호칭 때문이었다. ‘하동무‘가 아니라 ‘대치자네‘라는 호칭이 그렇게 귀설게 들렸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눈앞의 강동식이 조금 전의 ‘강 동무‘가 아니라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보였다. - P120

우선내 가족, 내 피붙이부터 잘살아보자고 혁명도 하는 것이고 고생도하는 것이지 처자식 맞아죽어 없어지거나 골병들어 병신이 되어버리면 누구 좋자고 혁명이고 투쟁이고 할 것인가. 강동식은 그 말을다 쏟아놓고 싶었지만, 그것이 혁명의식의 결여나 박약을 입증하는 개인적 감정주의로 비판될 것이 분명해 어금니를 맞물며 참아내고 있었다. - P119

. 숨겨야 했기에 더 그립고 감추어야 했기에 더 안타까웠던 사람의 마지막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손 한번 잡아볼 수 없고, 눈물마저 씹고 씹어 삼켜야 하는 기구함을 견딜 수 없어 월녀는 미친 듯이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모든 것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P109

정 참봉은 월녀를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월녀는 그 품에서 비로소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물을 흘렸다. 정참봉이 조끼주머니에서꺼낸 한지에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花‘였다. - P108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겼던 정 참봉은 한 달에 한두 번씩다녀갔다. 남들의 이목을 경계하는 걸음이라서 머무는 시간도 길수가 없었다. 월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을 삼았다. 자신을 대하는참봉어른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어서였다.
"내 고운 사람, 자네헌테 짓는 내 죄를 어찌하나." - P107

월녀는 방문을 밀치고 마루로 나섰다. 그동안 얼마나 오래 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빗소리는 한결약해져 있었다. 정 참봉의 표정은 보이지 않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형체만 보였다.
"소금하고 된장국물뿐인디요, 워떤 것이 더 졸란지 몰르겠네요." - P103

숭늉그릇을 벽 쪽으로 밀어놓고 월녀는 밥상을 들고 일어섰다.
"너무 폐를 끼쳐서……………."
곰방대에다 불을 붙이려던 정 참봉은 월녀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서렸다. - P101

"이리 폐를 끼칠라고 한 것이 아닌디.…………"
정 참봉은 한속이 든 얼굴을 민망하게 구기며 두 손을 모아잡고엉거주춤 서 있었다.
"폐 끼친 것은 담에 갚아주시기로 허고 당장 몸부터 돌보셔야헌당께요."
"당최 면목이 없어서……… - P98

무슨 생각을하며 내 굿춤을 구경했을까. 구경거리로만 생각했을까. 쓸 만한 무당이라고 생각했을까. 글줄을 제대로 읽은 양반치고 무당을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은 글줄만 읽은 것이 아니라 ‘참봉 벼슬까지 지닌 사람이 아닌가. - P95

농사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비는 억수로 쏟아져내렸다. 빗줄기를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월녀의 마음에도 근심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 지어놓은 농사를 망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 탓이었다.  - P89

친일파나 일본에 붙어먹은 것들은 모두 몰아내고 새 사람들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일치를 보이고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자신은 안창민과 손승호 등을 규합해서 민중들의 그런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군단위 조직을 서둘렀다. 그 조직을 통해 동네마다 이장이 바뀌면서 동시에 건준지부가 결성되었고, 전국 형무소에서 2만여 명의 독립투쟁자들이 석방되었다는 소식 - P124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쌀배급이 중단되면서 터지기 시작한민중항쟁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불붙어내려와 마침내 섬진강을 건너 전남으로 그 불길을 옮기게 되었다. 동학농민봉기가 전북에서일어나 그 불길이 삽시간에 전남을 뒤덮고 섬진강을 건너 경남으로 옮겨붙은 것과는 반대의 경로를 밟은 것이었다. 서로 이웃하고있으면서도 산맥으로 막혀 있는 두 지역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섬진강이었다. 10·1항쟁의 불씨를 품은 바람이 섬진강을 건너와 전남에서 제일 먼저 불꽃을 피운 곳은 화순이었다.  - P127

강제로 시행된 미곡수매와, 관리들의 부정으로균형을 상실한 배급제도 때문에 인민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군정에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그 불만이 최초로 폭발한 것이 화순에서였다. 첫 번째 맞이한 해방기념일에 광부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시위를 벌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광주를 향해나아갔다.  - P126

화순은 삼팔 이남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탄광지대였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주된 경제권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농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탄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사회변혁세력도 3천여 명을 헤아리는 광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일제 때부터 철도청이 있었던 순천의 철도 노동자, 항구로서 일본과의 뱃길이 열려 있었던 여수의 부두 노동자와 함께 지방적 특성을 강하게 형성하고 있었다.  - P127

더구나 미군들이 탱크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밀어붙여 죽였다는 것은 민족감정을 예리하게 자극시켰고, 경찰들이 또 그 앞잡이놀이를 했다는 것은 그동안 누적되어온 적개심을 폭발시키게 하고 말았다.  - P131

 그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벌써부터 경상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 이북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환히 듣고 있는 터였다. 미군정의 파괴공작에도 불구하고 인민위원회 조직은 그들을 결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다! 미군은 물러가라!"
"공출제도 쳐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 - P131

"일정 때야 좋았지요. 돈 흔허고 이번 같은 난리 없고."
마치도 그때가 그립다는 듯 전매소장이 읊조렸다.  - P136

그러던 그는 해방과 동시에 햇살을 띤 안개처럼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미군정 실시와 함께였다. 한반도의 해방군이 아니라 분명 점령군의 태도로 남쪽 땅을 장악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치안유지를 한다는 구실 아래 일제치하의 경찰 근무자나 그 앞잡이들을 중추로해서 경찰조직을 재구성했던 것이다.  - P145

장길춘은 김범우가 예사 종자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배짱이 세고대가 강해도 순경에게 붙들릴 때 반 정신이 나가고, 경찰서로 들어서면 온 정신이 나가고,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새우면 살아날 구멍을 찾아 급급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 P149

이틀씩이나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도 늦가을 살모사 대가리처럼독기를 세우고 있었다. 수사를 하거나 취조를 할 때는 상대방의 기가 꺾일 만큼 꺾여 삶은 시금치꼴이 되어 있어야 제격에 맞는 것이었다. 그것이 순경질하는 맛이기도 했다. 그 군림하고 짓밟는 박하사탕 씹는 것 같은 통쾌감과 간지러움 같은 승리감이 없다면 순경질을 무슨 맛으로 한단 말인가.  - P150

"가당찮은 소리요. 조사를 해서 죄를 졌으면 벌을 받는 것이고,
죄가 없으면 풀려나는 것이 법일진대 어찌하여 이 일에 최익승이이름이 들먹여지는지 모르겄소.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으로 할 일이 따로 있을 것인데, 내 자식이 만에 하나 공산당을 했다 하더라도 최익숭이를 찾아가지는 않으리다. 국회의원 세도가 을매나 큰지 모르겠지만." - P156

자식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부모의 보호본능을 믿었던 것이다. 부모의 보호본능이란 자기 자신을 버릴만큼 강한 힘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협하는 상대적인 힘 앞에서는명분이나 위신 같은 것은 감 껍질 버리듯 할 수 있다는 것을 남인태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바였다.  - P157

독립운동에 연루된 자들중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것이 자식을 둔 자들이었다. 그들을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잡아다가 고문하면 신효할 정도로 쉽게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그다음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부모를 고문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가 마누라를 고문하는 방법이었다. - P157

부모네들은 육자배기 가락을 무슨 신명이 나서 뽑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고된 일을 이겨내는 방편으로 썼던 것이다. 농사일의 힘듦을 잊기 위해서, 힘을모으기 위해서, 시름을 달래기 위해서 육자배기는 불려졌다. 그러니까 육자배기는 넓은 들판을 지닌 남도지방의 들녘의 노래였고,
들판이 넓은 만큼 그에 비례해서 많을 수밖에 없는 소작인들의 노래인 셈이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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