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의 입장에서는 미군정의 경제정책에 대한 생존보호와불만표현이 먼저였다. 그러니까 남로당은 군정과 정치투쟁을 하고있는 것이고, 민중들은 군정과 경제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로당은 민중들의 경제투쟁을 조직화하여 정치투쟁으로 확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교활할 만큼 영리한 군정이 그것을 좌시할 리 없었다. 미리 준비해 둔 무력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박살을 내고는 한것이다. - P315
비유의 대상을 한 나라로 잡았다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야. 셰익스피어가 제아무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한들어찌 인도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느냔 말야. 인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차치하고라도 거기엔 4억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엄연히 생존하고 있어. 그 생명들의 존엄성보다 셰익스피어가 더 위대하다니, 그따위 발상법을 가진 영국인들은 일본놈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식민주의자들이야. - P319
김범우는 일어서며 방을 둘러보았다. 천장이 낮은 좁은 방에는예전 그대로 책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그 책들을 보자 한줄기슬픔 같은 감회와 함께 웃음이 떠올랐다. 책탐 많던 손승호의 기억탓이었다. 그가 책을 모으는 노력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거기 자네 책도 몇 권 있을걸세." 김범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손승호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한결 탄력 있게 느껴졌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내 책일 리가 있나." - P325
그는 책벌레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책을 모으는 방법으로 심심찮은 화제를 뿌렸다. 선배나 친구들의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의 책마저도 일단 빌리기만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돌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몰염치한 방법이 처음에는 통했을 리가 없었다. 말썽이 생기고, 오해를 받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끈덕진 책탐은 ‘타고난 팔자‘ ‘죽어야 고칠 병‘으로 주위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 P326
그가 돈을 내고 책을 구입하는방법이라는 것도 희한했다. 그 자신이 책값의 반을 내고, 나머지반값은 5등분으로 나눠 주주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 다섯 명의주주는 이틀 동안에 1회 완독의 기회를 갖고, 그 다음부터는 필요한 경우에 당일 대출로 그 권리를 영원히 누린다는 조건이었다. 물론 책 소유권은 그가 갖는 것이었다. - P326
염상진도 그의 앞에서는 사회주의 이론이 달릴 지경이었다. 그는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길을 위하여 사회주의를 택했었다. 그런데결국 그가 만난 것은 인간부재의 현실일 뿐이었다. - P328
어스름의 부유는 바람의 흔적과도 다르고 안개의 자취와도 다르다. 바람은 일정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단조로운 질서를 지키고, 안개는 잠긴 듯한무거운 꿈틀거림 속에서 농도가 다른 층을 이룬다. 그런데 어스름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땅 넓이만큼 내리는 것이며, 농도가 다른 층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서서히 변색해 가는 것이었다. - P328
벌교의 어스름은 언제나 두 곳의 하늘로부터 내려 하나로어우러졌다. 제석산·광산·금산이 있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과긴 포구를 짓고 있는 바다 쪽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스름이 땅과물의 경계 그 어디쯤에서 포옹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벌교의어스름녘은 환상적인지도 몰랐다. - P328
염상진이 겨우 5일 동안에 100명 이상의 인명 살상을 자행할 줄상상이나 했던가. 그건 염상진이라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정치 폭력화한 주의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이미 주의를 지배하는 이성적 인간이 아니라 주의의 정치적 실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변신한 것이었다. - P329
은교사들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즐겨 써먹었던 ‘서로 따귀 갈기기‘의처벌법이 갖는 가해성과 마찬가지였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더 상대방을 세게 갈길 수밖에 없는 가해성, 그때 내가 때리고 있는 것이 내 친구라는 사실은 이미 망각해 버린다. 상대는 오직 나를 아프게 하는 적일 뿐이고,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격성만 가속화하는 것이다 - P329
있었던 것이다.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찜질당헐 소리제만 서방님 앞이니께 허는디,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요?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한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 허지, 가난하고 무식헌 것덜이 믿고 의지헐 디 없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면 지주 다쳐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 헐 사람이 워디 있겠는가요. 못헐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문 서방의 말이 더할 수 없는 웅변으로 김범우의 가슴을 치고있었다. 그 말은 민중으로서 위선적 정치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고, 왜곡되어 가고 있는 사회현실에 대한 정확한 증언이었고,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고 있는 정당한 발언이었다. - P330
"최익승, 그자가 왜대표를해.서울에 앉어서 무슨 놈의 대표야." 김범우는 치솟는 화를 그대로 내뱉고 있었다. 국회의원 최익승, 그는 한민당 계열의 전형적인 모리배였다. - P335
원으로 설쳤던 것은 김범우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기호는 둘, 최익승, 작대기는 둘, 최익승, 눈도 둘이요, 귀도 둘이요, 콧구녕도 둘이요, 팔도 둘이요, 다리도 둘이라. 기호는 둘, 작대기는 둘, 둘 밑에꾹 눌러, 눌러놓고 봐 고것이 누구냐, 바로바로 최익승, 우리 일꾼최익승, - P335
이승만은 남한 단독선거를 유리하게 치르기 위해 경찰력을 보조할 수 있는 향보단(鄕保團)을 전국적으로조직화했고, - P335
마음속에는 자신이 바로 최익승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킨 것이라는자만이 차 있었다. 그는 최익승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던 것이다. 경찰이 체면 때문에 차마 내놓고할 수 없는 일을 염상구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맡아 처리했던 것이다. - P3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