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할 때 맨 처음 훈신(勳臣)들이 모여 맹세했는데 두 가지 밀약이있었다. 그것은 국혼(國婚)을 잃지 말자는 것과 산림(山林)을 올려 쓰자는 것이었다.
‘국혼‘이란 왕실, 더 정확하게는 국왕과 혼인을 맺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혼을 잃지 말자(勿失國婚)‘는 것은 왕비는 대대로 자파, 곧 서인가문의 여자를 들여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국왕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확고히 하자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산림을 올려 쓰자(用山林)‘는것은 명망 있는 재야의 산림 인사를 중용하여 자파의 위상을 높이자는것이다. - P286

그런 판에 더하여 정인홍은 산림으로서 군림했다. 의병장으로서의명분, 조식의 수제자로서의 학연, 광해군의 즉위를 위해 몸바친 의리까지 갖춘 정인홍의 ‘무게‘는 막중했다.  - P287

이이첨.밬승종, 유희분은 모두 광해군과 혼인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우선 유희분은 광해군의 처남이었다. 박승종의 아들과 이이첨의 딸은 혼인을 했고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광해군의 며느리, 곧 세자빈이 되었다. 세사람은 모두 광해군을 매개로 사돈이 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희분은 문창부원군, 박승종은밀창부원군, 이이첨은 광창부원군의 훈호(勳號)를 받았다. ‘삼창(三昌)‘으로 불렸던 이들은 정치적 라이벌이 되었고,
서로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 P287

조정에는 ‘삼창‘이, 조정 바깥에는 정인홍이 버티고 있었다. 서인이나 남인들의 눈에 그것은 ‘철옹성‘이었다. 광해군대에는 그 때문에 주변부에서 빙빙 돌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권력을 잡은 이상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삼창‘이나 정인홍의 정치적 행태는 배울 가치가 충분했다. 인조반정 주체들사이에서 ‘물실국혼‘, ‘숭용산림‘의 밀약이 나왔던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P287

하지만 등주에 상륙하여 본토로 접어들면서부터 분위기는 급변했다. 6월 13일, 등래순무(登萊巡撫) 원가립일행에게 "왜 광은사신해군을 쫓아냈느냐"고 힐난했다. 사신 일행은 등주에 11일이나 머물면서 원가립을 설득시키려 애썼지만 여의치 않았다.  - P289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유자광은 모의에만 가담했다. 그럼에도 그는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런데 나는 반정군의 병력 성과 기획 전체를 담당했다. 어찌하여 내가 2등공신밖에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이괄의 불만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반정 직후인 1623년 여름, 인조는그를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했다. 후금의 위협에 대처하려면 그와 같은 장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괄은 씩씩거리며 임지로 부임했다. 하지만 임지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 P300

이괄에게 혼쭐이 난반정공신들이 반란 진압 이후 내놓은 대책은 다분히 표피적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기찰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공작정치‘의 냄새가 짙었다. ‘반(反)혁명 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전방위적인 사찰을 강화했다. 남인을 비롯한 정치인들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이들에게는 감시의 손길이 뻗쳤다. 특히 휘하에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지방의 무관들이나 과거 대북파와 조금이라도 연줄이 닿았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사찰 리스트‘에 올랐다. - P301

기찰로 불리는 공작 정치가 강화되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불신풍조를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감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군사들의 훈련이었다. 기찰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무관들은 습진(陳, 병사들을 모아 진을 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을 기피했다. 혹시라도 역모를 꾀하기 위한 병력동원 훈련으로 오해받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훈련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후유증은 후금의 침입을 받았을 때그대로 나타났다. - P302

폐세자빈의 죽음 역시 애처롭다. 그녀는 남편의 탈출을 돕기 위해 나무에 올라 망을 보다가 남편이 붙들리는 모습을 보고 바로 추락했다.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져버린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이윽고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는다. 1623년 10월에는 광해군의 부인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 광해군에게 남은혈육은 딸 하나뿐이었다. 아들과 며느리, 부인의 연이은 죽음에 충격을받았는지 광해군은 몸져누웠다. - P307

폐위된 뒤 유배를 거듭하면서 광해군은 권력의 무상함을 절절히 느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처절한 추락에 대해서도 실감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강화에서 태안으로 옮길 때 그를 호송한 별장들은 자신들이 윗방에 들고 광해군을 아랫방에 머물게 하는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심부름하는 계집종에게도 면박을 받았다고 한다. - P309

왜란 중의 체험이 바탕이 된 그의 대외 정책은 분명 탁월하고 일괄성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군주들 가운데 주변국의 동향과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을 들라면 단연 그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다. "설사 전쟁이 일어나도 사자(使者)는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그의지론은 주변국에 대한 끊임없는 정보 탐색 노력과 맞물려 그가 펼친 대외 정책의 기반이 되었다. 후금을 다독이고 명나라를 주물렀던 그의 외교 역량은 바로 주변국을 알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통해 길러졌다.  - P311

왕위에 오른 뒤전란의 후유증을 수습하고 국가의 기반을 재건하기 위해 기울인 그의 노력은 각별했다. 정파 사이의 대립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대동법을 시행했던 것, 『동의보감』을 반포했던 것, 전란 중불탄 여러 출판물들을 다시 찍어냈던 것, 사고를 다시 정비했던 것 등등 재위 중에 남긴 치적은 볼 만한 것이 많았다. 더욱이 대동법의 시행은 고난받는 하층민중에대한 지배층의 양보라고도 할수 있었다. - P311

임진왜란이라는 전시 상황을 맞아 왕세자로 책봉되었을 때부터 그의 비극적인 최후는 예비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왕위 계승자로서의정통성 결여 때문에, 또 이를 물고늘어지는 세력들 때문에, 그는 늘 전전긍긍했다. 스스로 ‘시혜자라 자처하면서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했던 명나라 역시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 P311

광해군! 결과의 시각으로 보면 그는 분명 ‘패배자‘였다. 왕위에 있으면서 아무리 탁월한 치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왕위를 빼앗긴 일차적 책임은 분명 그 자신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광해군의 몰락은 왕권과 신권의대결에서 왕권이 패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 P310

광해군이 내정에서 좀 더 정치력을 발휘하여 신료들을 조정하는 데성공했더라면 그의 비극적 말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것. 광해군과 그의 국왕으로서의 행적은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이 낳은 ‘시대적 산물‘일 수밖에 없었다. - P312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을 비판했지만 인조반정공신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 정책을 답습했다. 더욱이 일관성 없이 척화와 주화를 반복하다가더 큰 비극을 불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바로 그것이었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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