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어쩌면 명을 기만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외교에서는 때로 ‘사술(術)도 필요하다고 여겼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는 분명 문제가 되지만, 명이나 후금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전쟁을 피하면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 P256
광해군은 주변 국가의 정보 수집에 관한한 상당한 감각을 지닌 임금임이 틀림없었다. - P258
원정군에게 지급할 군량을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군량으로 들어갈 쌀과 잡곡은 주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거둬들였다. 또 명나라가 요구한말 1천 필을 조달하는 비용도 전부 농부들에게 부과되었다. 역시 궁궐을 건축할 때와 마찬가지로 조도사(調度使)라는 임시 관원들을 파견하여 징수를 독촉했다. 자연히 증세 조처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원정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때가 한겨울이어서 방한복을 준비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방한복의 재료인면포를 마련하는 비용은 서울과 개성에사는 백성들의 몫이었다. - P260
장정들을 징발하고 곡식과 면포를 거두어들이는 것 때문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다"고 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격이라고나 할까? 궁궐 공사와 원정군에게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원성이 높아가고 있던 무렵,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는 심각한 기근이 들었다. 궁지에 몰린 농민들이 고향을 등지거나 도적 떼로 변신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 P260
하지만 광해군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하층의 백성들만이아니었다. 재야 사람들은 그들대로 ‘눈을 흘기고 있었다. 사대부들은 강홍립의 항복과 그 이후 광해군이 취했던 대외 정책을 강상윤리를 무너뜨린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강홍립이 후금군에게 항복했던 것이 화이론자(華夷論者)인 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이미 영창군이 죽고 폐모논의가 제기된 이후 조정에서 마음이 떠난 그들이었다.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려 들더니, 이제는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 P267
특히 이이첨에게 ‘식상했던 광해군은 1619년(광해군 11) 3월 박승종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박승종은 이이첨과 오랜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그는 명과 후금 누구와도 원한을 맺지 않으려는 광해군의 외교적 입장에 확실히 동조했다. 윤휘, 임연, 황중윤 등은 쉴새 없이 북경을 오가며 광해군이 내려준 지침을 전달하는 실무자 역할을 잘해냈다. 하지만그 이상의 기획 능력은 없었다. 노회한 명나라 신료들이나 돌파력이 뛰어난 후금의 사자들을 상대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해 보였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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