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진의 아버지 염무칠이 지주 최씨네에서 꼴머슴살이를 벗어나 읍내의 숯가게에 취직한 것이 열여섯 살 때였다. 염무칠의 아버지는 낙안벌의 토호 최씨네의 가복이었다. 국법에 의해 노비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다른 대부분의 노비들이 그렇듯 염무칠의 아버지도 경제적 독립을 꾀할 수가 없었다. 노비문서만 불살라졌을 뿐 생활조건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 P175

세상을 대하는데 밤송이 같은 경계의 촉수를 갖추게 했다. 1전을 보고 물 밑으로 50리를 기어라. 하루에 10전을 벌기로 작정했는데 9전밖에 못벌었으면 굶고, 11전을 벌었으면 전어치만 먹어라. 한번 수중에 든돈은 이문을 물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내놓지 말아라. 이익이 남는 장사를 하는데 손님이 열 번 밟으면 백 번 밟히는 시늉을해라. 돈을 빌려주지 말고 차라리 마누라를 빌려줘라. 싸릿대를 엮어 만든 숯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행상을 다니는 염무칠의 가슴에는 그런 말들이 비석의 비문처럼 새겨져 있었다. - P177

주지스님의 도움으로 숯을 생산가에 받을 수 있었으므로 이문이 컸다. 그러나 왕복 140리의 도보운반으로 물량이제한되어 있어서 목돈을 만지기는 어려웠다. 염무칠은 지치지 않았다. 1년, 2년………… 장가를 들고 자식을 낳고, 염무칠은 20년이 넘게 오금재를 넘나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아들 둘, 딸 셋을 낳아 길렀다. 그리고 선암사 주지스님이 세상을 떠났다. 다비(茶毘)가 끝나고 사리를 거둘 때까지 오로지 속인 옷을 입고 넓게 운 것은 염무칠뿐이었다. - P179

계곡으로 굴러 눈구덩이에 처박히기가 몇 번이었고, 폭설을 만나 길을 잃어버려 얼어죽을 뻔도 했고, 길을 질러가려고 저수지 얼음판 위를 걷다가 한가운데서 얼음이 뿌지직뿌지직 갈라지며 내려앉는 바람에 물귀신이 될 뻔도 했다. 쉬운 말대로라면 그때도 숯을세 가마니나 진 지게를 후딱 벗어던졌으면 물에 빠지는 것은 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그런가. 그 값이얼마며, 그 먼 길을 얼마나 애쓰고 지고 왔는데 벗어던진단 말인가 물에 빠질 때 빠지고, 죽을 때 죽더라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곰 같은 염서방‘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 P180

"제가 어르신의 소작인이 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사용료 같은것은 없이 일정기간 동안 빌려쓴 다음반환하기로 하겠습니다.
반환받으실 때는 박토가 옥토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염상진은 전혀 농담하는 기색이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P185

그만 목이 메었다. "그럴껴, 필경 그럴껴 느그성님은 폴세 백두산도넘어 만주꺼정 갔을까. 하면, 독립군인디." 상진이는 그분의 무사를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목을 삼켜가며 힘주어 말했다. "근디, 니는 느그 성님을 만내봤냐?" 상진이는 여태껏 감추어왔던 말을 속삭이듯 낮게 물었다. "아녀. 아침에 일어나봉께 엄니가 운 티가 나고…………." 범우는 목이 메는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나도 싸게 커서 느그 성님 겉은 사람이 돼야 쓰겄다, 상진은 이 말을 가슴속에다 묻고 말았다. 상진이가 두 학년이나 차이가 나는 범우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바로 ‘김범준‘ 때문이었다.  - P188

후에 선 5일장에서 그 소문은 입증되었다. 음력설 및 대목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터는 아침부터 파장꼴이 되고 말았다. 순천에서 넘어오는 진트재, 보성에서 넘어오는 석거리재, 고흥에서 넘어오는 뱀골재를 막아 장사꾼들의 발을 묶은 데다가, 읍민들이 발길을끊었던 것이다. 썰렁한 장터에 감돌고 있는 냉기는 냉기가 아니라벌교사람들이 내보이는 무언의 살기였다. 그건 김씨 문중 사람들의 은밀한 움직임이 작용한 탓도 있었지만, 그에 앞서 갯가를 끼고있는 벌교사람들 특유의 독기의 표현이라고 해야 옳았다.  - P189

 "사진으로라도 얼굴을 똑 한 번 보고 잡은 것이 소원인디요." 의외의 말이었다. 어린것은 이제 고개를 똑바로 들어 김사용을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어린이답지 않은 결의가 서려 있음을 김사용은 보았다. 그건 큰아들에 대한 소년의 티 없는 존경심이기도 했다. " - P190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고(思考)는 허황한 공상에 지나지 않아.
공상처럼 무용지물도 없지. 특히 현재 우리들이 처한 상황에서는."
"형의 논리는 맞지. 허나 앞으로 몸조심해야 할 거네. 벌써부터순사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까."
"각오하고 있어. 드디어 막은 올랐으니까!" - P193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우정이상의 이념세계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탐독했던 것이고, 거기서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의 길을 찾으려 - P193

김범우가 인간생존의 양심을 밝히는 불씨를 얻었다고 한다면, 염상진은 인간생존의 방법을 뒤바꾸는 무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염상진이 그들 책을 통해서 받은 충격은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었고, 새로운 빛의 출현이었고, 새로운 길의 열림이었다. - P194

염상진이 김범우를 혁명의 적으로 단정하려 할 즈음에 김범우의 실체가 드러났다. 백범 김구(金九)식의 민족주의 통일노선을 김범우는실현시키고자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범우는 경찰서고 군정청이고드나들며 좌익계 학생들을 석방시키기에 바쁘고, 한편으로는 좌익학생들을 설득시키느라고 진땀을 빼는 것이었다.  - P195

범우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가 했던 ‘민족의 발견‘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꽤는 그 의미가 넓고 깊은 말이라 싶었다. 민족ㅡ 그건 모태와 같은 것이고, 음성적(聲的)으로도 어머니를 부를 때처럼 정겨운 슬픔을 담고 있다.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은 소중한 말이다. 그러나 그건 일제하에서나 생기가 도는 말인 것이다. 이미 반도땅은 해방을 맞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바나 행동하는 것은 그 나름으로 일관성과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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